제110화
‘역시 장인어른의 감은 뛰어나시구나.’
물론 이곳에 온 가장 첫 번째 이유는 그의 안부를 묻기 위해서였지만, 흑야에 대해 의논을 하기 위함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 말에 놀람과 동시에 역시나 실망감도 함께 찾아왔다.
적어도 황궁에 꼬리가 한둘쯤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마저 사라진 것이다.
“그렇군요. 후우……. 마치 귀신에 홀린 것 같은 기분입니다.”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다. 그날을 기점으로 처음부터 흑야란 존재가 없었던 것처럼 소리소문없이 사라져버렸으니……. 답답할 노릇이구나. 이대로 조용히 있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나, 언제 놈들이 또 활개를 칠지 모르는 상황이니 말이다.”
평목단 역시 송운과 같은 생각이었다.
어느 정도의 저력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기에 갑자기 사라진 그들의 행보는 두 무인을 모두 걱정에 빠뜨리기엔 충분했다.
어느 곳에서도 그들의 행방이 묘연하니 답답할 수밖에.
덕분에 송운은 이것으로 정녕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음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젠 결국 직접 찾아 나서는 것밖엔 방도가 없는 것인가?’
송운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평목단을 향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앞으로는 좀 더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장인어른.”
그런 송운의 모습에 평목단이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아니다. 아니야. 할 일이 많으면 그럴 수도 있는 법이거늘……. 어찌 내 그것을 탓하겠느냐? 오히려 나로 인해 험한 곳으로 끌어들여진 네가 너무 무거운 짐을 진 것은 아닌지 나는 걱정이 되는구나. ……항상 몸조심해야 한다. 운아.”
“아닙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저도 알게 될 일이 아닙니까? 다만 그 시기가 조금 앞당겨진 것뿐이지요. 장인어른께서도 이미 흑야에게 노출이 되신 만큼 항시 조심하셔야 합니다.”
송운은 걱정하는 평목단을 향해 괜찮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렇게 서로의 안부를 전한 후, 다시 한번 각오를 다진 채 집으로 돌아왔다.
* * *
평목단을 만나고 온 이후, 송운은 지체 없이 곧바로 일을 실행에 옮겼다. 계획, 구상 단계에 머물러 있던 것을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다.
그는 가장 먼저 북경을 택했다.
연유는 간단했다.
송주촌에 있었을 때야 제법 먼 곳이었으나, 지금은 거주지가 북경인데다 흑야가 가장 많이 활개를 친 것 또한 북경이니 이곳을 중점으로 정보를 끌어모으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등하불명(燈下不明)이라 하였다. 우선은 가장 가까운 곳부터 조사해나가는 것이 좋겠구나. 자기 바로 앞에 있는 것도 잘 모르면서 벌써부터 많은 것에 욕심을 내서는 안 된다. 이곳부터 시작하여 차차 범위를 늘려 가면 되는 것이지.’
송운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생각해야 할 것이 너무도 많았다.
‘……만월문(萬月門).’
송운은 마음속으로 떠오르는 한 문파의 이름을 읊조렸다. 하오문도 하오문이지만 북경에서만큼은 최고라 자부할 만큼 크게 자리 잡고 있는 이들이 존재한다. 그들이 바로 만월문이었다.
‘현 북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보 집단이라고 했던가?’
개도 제집 앞에서는 텃세를 부린다고 하였다.
앞으로 천조회의 움직임은 준비해온 시간만큼 더욱더 세밀하고 조심스러워질 것이다.
하나 아무리 은밀히 움직인다 한들 자칫하면 천조회를 제대로 키워보기도 전에 주변의 정보 집단의 견제로 인해 망할 수가 있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제 밥그릇을 다른 놈들에게 빼앗길 수 없다는 놈들의 필사적인 몸부림이 있을 것이란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천조회가 자리를 잡을 동안은 최대한 그들의 시선을 빗겨나가야 한다.’
그것 역시 앞으로 송운이 풀어나가야 할 난관 중 하나였다. 마음을 굳게 정한 송운은 그 문제에 관해 계속해서 머리를 굴려 나갔다.
그렇게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 * *
“……이제부터가 진짜이군요.”
“주군, 저희가 최선을 다해 꼭 알아내겠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송운의 말을 들은 천조회 중 그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해오던 것이었기에 오히려 이제야 제대로 된 명을 받았다는 기쁨에 눈망울을 반짝거리며 각오를 다졌다.
흑야에 관련된 정보를 조사하는 만큼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임에도 그들은 서슴없이 자신을 따르고 있다. 그러한 천조회의 모습에 송운은 그저 고맙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형님들. 그리고 조총과 적돈 모두 감사합니다. 항시 조심. 또 조심하셔야 합니다.”
“주군, 어찌 저희에게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이미 우리 모두 주군에게 목숨을 바치기로 마음먹고 맹세했지 말입니다!”
“조총이 말이 맞습니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겠지만 저희도 그간 많이 성장하지 않았습니까. 일전과 같이 허무맹랑하게 당하진 않을 겁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주군.”
파바밧!
각기 마지막 말을 남긴 천조회는 서점을 지킬 서사를 제외하고 재빠르게 경공을 펼치며 사라졌다.
순식간에 휑해진 공간에 단둘이 남은 송운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듯 그들이 사라진 곳을 향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서사가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그저 주군께서는 지금껏 그래왔듯 저희를 믿어주시면 되는 겁니다.”
별다른 말은 아니었으나, 그 한마디는 송운에게 왠지 모를 위안이 되어주었다.
“역시…… 그렇겠지요. 서사 형님?”
그의 말에 조용히 서사가 고개를 주억였다.
* * *
천조회가 본격적인 정보 수집 활동에 나선 지 약 열흘쯤 되는 때였다.
몸을 숨기는 것에 가장 특화된 만큼, 대오는 가장 깊은 범위를 파고들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엔 송운을 향한 충성심으로 간신히 이겨내었던 공포감이 이제는 점점 자신감이 붙어가고 있었다. 송운도 놀랄 만큼 그가 익힌 무공과 재능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예상보다 뛰어났던 것이다.
그때마다 더 큰 가문이나 문파 속에 녹아들었다.
자신보다 높은 무위의 무사들이 주변을 지키고 있었으나 포위망을 교묘히 벗어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는 걸 깨달은 후였다.
‘그럼……. 대체 누구지?’
한데 그런 그에게 이틀 전부터 아주 미약하나마 몇 번에 걸쳐 수상한 기운이 몸을 스쳤다. 처음엔 자신을 눈치챈 누군가가 미행을 하는 것이라 여겨 몇 번이고 재차 확인했지만, 결과는 아니었다.
‘……살기는 담기지 않았어.’
만약 자신이 숨어들었던 곳 중에 눈치를 채고 달라붙은 것이라면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기 위해 죽이려 들 것이다. 그만큼 대오가 들었던 정보들은 흑야에 관련되진 않았으나, 그들에겐 중요한 것들이었다.
자신들과 호의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에게 어떻게 뒤통수를 칠 것인지, 어찌하면 더 많은 이득일 낼 수 있을지 등등의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결코 새어나가선 득이 될 일이 없는 이야기들로 가득 찬 더러운 인간의 이기심이었다.
그래서일까?
더더욱 간간이 느껴지는 그 시선은 대오를 찝찝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자신감이 많이 차올랐다고는 하나, 여전히 대오는 대오다.
그 많던 겁이 하루아침에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였다.
오싹.
‘바, 방금도……!’
아무런 감정 없이 순식간에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시선은 대오를 움찔거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부, 분명 무언가 있었는데……. 이상하네.’
워낙 빠르게 사라지는 터라 방향을 잡으려야 잡을 수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대오는 결국, 원인을 찾지 못하자 기분 탓이겠거니 하며 몸을 한 번 털어내고선 어둠속에 숨어들었다.
움찔.
하나, 이번에 놀란 것은 대오만이 아니었다.
‘……제법이군. 이제 겨우 절정에 접어든 녀석이…….’
대오 스스로는 몰랐지만, 찰나였으나 오늘 그가 쳐다본 방향은 흑색 복면이 숨어있던 곳과 일치했던 것이다.
지난 며칠과는 달리 어이없게 들키자 자신이 요즘 너무 안일했다는 생각이 순간 들면서 빠르게 치고 빠졌기에, 대오가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건 당연했다.
‘생각보다 위험한 놈인 건 확실하군.’
온몸으로 실전을 겪으면서 실력이 더욱 빠르게 늘고 있었던 것이다.
며칠 동안 지켜본 그의 판단이었다.
그 길로 곧장 흑색 복면도 어딘가로 몸을 날렸다.
* * *
흑색 복면이 향한 곳은 휘황찬란한 온갖 장신구들과 달콤하고도 씁쓸한 주향과 함께 거의 나체라고 봐도 무방할 여인들의 분내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미지의 공간이었다.
‘이곳은 언제 와도 적응이 되질 않는구나.’
워낙 얼굴에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그의 표면에 슬쩍 주름이 가해질 무렵.
흑색 복면의 육안에 누군가의 형체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곧 형체의 주인 앞에 육안으론 볼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오체투지를 하며 몸을 수그렸다.
“……은형(隱形). 주군을 뵙습니다.”
“그래. 굳이 이곳까지 찾아온 걸 보니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라도 있는 것 같구나.”
독고백은 그 희고 긴 손가락 사이에 쥐고 있던 여인의 허벅지를 꽈악 움켜쥐었다.
“흐응……. 읍…… 배, 백 님……! 아아악……!”
그러자 처음엔 억눌린 교성이 새어 나오더니 이내 괴로운 비명으로 바뀌면서 게거품을 물고 쓰러졌고, 그 소리는 폐쇄된 너른 벽을 타고 널리 울려 퍼져나갔다.
그 끔찍한 괴성은 가까이 있던 여인들을 비롯해 멀리 있던 이들까지 마치 자신의 몸이 뜯겨 나가는 것인 마냥 괴롭게 느껴졌고 쏟아지는 원망은 흑색 복면, 은형에게로 향했다.
하나, 그것마저도 오래가진 못했다.
자칫 독고백이 그것을 느끼고는 화살이 괜히 자신에게 쏟아질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비명을 만들어낸 당사자는 마치 그저 과즙을 짜낸 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입꼬리는 하늘을 향해 올라가 있었다.
마치 그의 표정에는 어딘지 모르게 별 흥미 없는 이야기라면 너 역시도 똑같은 꼴을 당하게 될 거라는 의지가 담겨 있는 듯했다. 그의 곁에서 보낸 오랜 경험과 생존 본능이 새빨간 경고등을 켜고 있었다.
꿀꺽.
은형은 당장이라도 물러서고 싶은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으나 그의 앞까지 온 이상, 아무런 보고도 하지 않는다면 결국 어딘가 하나는 불구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너무 잘 아는 그였기에 붙잡은 이성으로 또박또박 입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