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화
‘역시 란 매는 무엇을 해도 잘 어울리는구나.’
평서란이 입고 있는 푸른 빛이 도는 옷감과도 썩 잘 어울렸기에 송운의 얼굴엔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예쁘구려. 역시, 란 매와 참 잘 어울리는군. 내 그대에게 해준 것이 없어 늘 미안하던 참이오. 이것이라도 받아줄 수 없겠소?”
그의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는 송운의 표정과 말투에 평서란은 더 말리지 못하고 그저 얼굴만 붉힐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거절한다면 송운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과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결국 평서란이 먼저 백기를 들었다.
“……고마워요. 운 가가. 잘 쓸게요.”
第三章. 돌아온 천조회
세상은 언제 시끄러웠냐는 듯 찾아온 평온 속에서 시간은 눈 깜짝할 새 흘러갔고 추운 겨울을 벗어나 새로운 한 해가 찾아왔다.
따뜻한 기운을 마치 만천하에 알리려는 듯 앙상한 가지를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산들은 저마다 몸을 뽐내려 푸릇푸릇함을 자랑했다.
‘역시 이 시기를 맞이하는 건 늘 즐겁구나.’
송운은 아주 옛날부터 사계절 중 봄이 가장 좋았다.
가장 역동적이고 새 생명이 태어남을 알리는 그 따스함은 마치 어머니를 닮아 그를 포근하게 감싸주어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었기에…….
스스로 택한 삶이었으나 전생에 홀로 살아가던 그에게 봄이란 그런 존재였다.
‘물론 지금은 어머니가 곁에 계시지만…….’
송운은 잠시 지나간 옛 추억에 대한 회상에 잠시 젖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곧 천조회가 돌아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어째 아직까지 연락 한 통 없구나.’
일 년.
천조회가 약조를 하고 송운의 곁을 떠나간 것이 어느덧 일 년이 흘렀다.
그와 같은 시기에 떠났던 양조광에게는 이따금씩 안부 겸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이상하리만치 천조회에게서는 전혀 소식이 없었다.
심지어는 자신의 약혼식에서마저도 한결같지 않았던가?
이쯤 되니 혹여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닌지 올 때가 되었는데도 돌아오질 않으니 노심초사하였으나 송운은 그때마다 마음을 바로 하고 그들을 믿었다.
‘내가 생각하는 극악의 사태가 아니라면……. 아니 반드시 살아 돌아온다.’
그러한 믿음이 없었다면 거금을 들여 그들이 돌아오면 머물 거처 또한 완공시키지 않았을 터.
은밀하고 또 은밀하게 진행된 사안인 만큼 돈뿐만이 아니라 사람을 쓰는 것 또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기에 배로 힘이 들었지만, 그런 것 따위 아무렇지 않았다. 다행히도 두터운 친구 사이가 된 유가량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어 입이 무거운 이들을 몇 고용할 수 있었고 지금도 꾸준히 불려 나가는 자산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돈은 돈을 부른다.
지금 송운이 딱 그랬다.
‘이 년 만에 북경까지 닿는 넓은 시야를 만들겠다니…….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참으로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니었던가?’
이를 생각하자 헛웃음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천중오제가 훗날 천하제일의 정보 집단으로 거듭난다 한들, 그것 또한 수십 년이 지난 후다.
그 재능을 일찍이 깨우치게 돕는다 한들 그 어떤 정보 집단이 하루아침에 그 정도로 클 수 있단 말인가.
가당치 않은 소리였다.
‘어찌 보면 전생의 나는 정말 헛살았다고 하여도 무방하겠구나. 얻은 것이라곤 무공 하나뿐이니…….’
그렇게 생각하니 약간의 허무감이 송운을 덮쳐왔다.
학문을 배우고 견식(見識)을 넓혀나가니 세상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방대했다.
세상은 알면 알수록 되레 점점 더 크게 다가온다.
‘내가 바로 정저지와(井底之蛙) 신세가 아니었던가?’
송운의 입가에 씁쓸한 고소가 걸렸다.
무림에서 정보력이 가장 뛰어난 개방과 하오문은 그 방도들과 문도들이 많아 전국으로 퍼져있는 이들의 정보를 모으고 간추려 뽑아낸다.
하나 송운이 만든 정보 집단인 천조회는 다섯 명의 인원이 전부다. 가진 재주가 뛰어나 적은 인원으로 은밀하게 움직일 수는 있을 터나, 빠르게 성장하기 위해선 그들의 뒤를 받쳐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지금이야 자신과 양조광이 힘을 합쳐 닦아놓은 것들로 인해 길을 터 가고 있지만, 당시 있던 것이라곤 스스로 가진 무공과 학사라는 가문뿐이던 그에게 서슴없이 내민 손을 잡아준 천조회가 아니던가?
비록 넉넉하진 않아도 서로를 의지해가며 살아오던 그들이 자신 때문에 정체 모를 괴한들에게 습격을 당해 목숨까지 잃어버릴 뻔했다.
송운의 곁을 떠난 지금 당장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믿고 또 믿는 것뿐이었다.
* * *
짹짹! 짹짹짹짹!
‘오늘따라 새들이 더 크게 지저귀는구나.’
송운은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창문을 향해 바깥을 바라보았다. 게다가 하늘도 유난히 쾌청한 것이 마치 반가운 손이라도 올 것인 마냥 좋았다.
그때였다.
“대 공자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어서 나와 보세요!”
밖에서 급하게 자신을 찾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손님? 지금 이때 날 찾아올 손님이…….’
짝!
송운은 양 손뼉을 마주쳤다.
‘천조회!’
그 길로 한달음에 달려 나간 송운은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이들을 향해 한껏 반가운 마음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형님들! 조총아! 적돈아!”
“주군! 으하하!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큰소리를 내서 웃는 우곤을 시작으로…….
“이 서사. 주군을 뵙습니다. 생각보다 늦어져 송구합니다.”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서사와.
“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주군.”
여전히 수줍음을 많이 타는 대오.
“크으! 집이 아주 멋집니다요. 주군!”
호기심이 많아 여기저기 둘러보기 바쁜 조총.
“……밥……. 배고파.”
그리고 여전히 먹성 좋은 적돈까지.
드디어 집을 떠난 지 일 년 만에 천조회와 송운이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 * *
와구와구. 쩝쩝.
적돈이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소리와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에 오랜만에 송가가 들썩였다.
“주군. 그동안 별 탈 없이 잘 지내셨습니까?”
“예, 특별한 일을 제외하고는 없었습니다. 형님들께서는 그간 무탈하게 지내신 겁니까?”
송운의 물음에 서사가 먹던 음식을 마저 꿀꺽 삼킨 뒤 차분히 답했다.
“세상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그동안 저희가 보지 못했던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이래저래 지리도 많이 익혀두었고 말입니다.”
그런 서사의 말을 우곤이 이어받아 외쳤다.
“뭐, 딱 보아도 그러하지 않습니까?”
우곤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크게 웃으며 넓은 가슴을 내밀며 쿵쿵 두드렸다.
송운 역시 굳이 묻지 않아도 이미 알 수 있었다.
천조회를 보자마자 가장 먼저 한 것이 내력을 끌어올려 한 명 한 명 살펴보는 일이었다. 개개인의 성장 폭은 저마다 달랐으나, 분명한 건 모두 성장했다는 것이다.
얼굴도 모두가 밝아져 있었다.
오랜 여정의 고됨은 묻어나왔으나, 누구 하나 얼굴을 찡그리는 이는 없었다.
‘확연히 풍겨져 나오는 기운이 다르다. 특히 대오 형님은…….’
송운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그것은 자신감이었다.
없던 것이 생기니 좀 더 생기를 띠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늘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펴져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밥. 더 없어요?”
그 순간 진지해졌던 송운을 깨뜨린 건 적돈이었다.
“에이 이놈아. 그렇게 먹고도 배가 고픈 것이냐? 옜다! 먹거라.”
적돈이 더 많은 밥을 원하자 서사가 자신의 앞에 있던 음식을 넘겨주며 가벼운 면박을 준 것이다. 하나, 누구 하나 그 모습을 싫어하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모두의 얼굴엔 함지박만 한 웃음꽃이 피었다.
‘무공이 상승한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그대로구나 다들.’
송운은 이제야 마음 한 구석 허전했던 무언가가 채워짐이 느껴지며 마음이 편해졌다. 비록 함께했던 시간은 적었으나, 그만큼 천조회의 존재감은 생각보다 컸다. 마치 어제 보았다 오늘 만났다고 해도 믿어질 만큼 친숙했다.
“꺼억.”
적돈이 잘 먹었다며 배를 통통 두드리며 트림을 한 것을 마지막으로 모든 식사가 끝이 나자 상다리가 부러질 것 같던 식탁에는 빈 그릇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국물이고 뭐고 하나도 남김없이 싹싹 긁어먹은 것이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말이다.
물론 그 중의 대다수는 적돈이 해치운 것이었지만…….
“자, 다들 식사가 끝나신 것 같군요. 저를 따라오시지요.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모두가 송운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저 부드럽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용히 송운을 따라 나간 다섯 명은 집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상가 근처에 걸음을 멈추었다.
“이곳입니다.”
“가, 갑자기 웬 서점입니까?”
대오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질문을 던진 것은 대오 한 명일 뿐이었지만,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는지 열 개의 초롱초롱한(?) 눈이 온통 송운의 입을 향했다. 그 덕에 아무도 송운의 진지한 입과는 달리 눈이 웃고 있다는 것은 보지 못했다.
“그것은…….”
꿀꺽.
“들어가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하아…….”
“……끙.”
송운의 장난기 어린 말에 곧 허탈한 한숨이 새어 나왔지만 말이다.
* * *
“이…… 이건!”
서점 안으로 들어가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역시나 서사였다. 그리고 곧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책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크기도 크기이지만 그에 걸맞은 방대한 책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황궁에 있는 서고에 비견할 만큼은 아니더라도 평생 서사가 접했던 양에 비하면 훨씬 많았다.
천조회 중 가장 뛰어난 머리를 지닌 이유는 힘든 나날 속에도 이같이 책을 늘 곁에 두고 학문을 즐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역시 서사 형님이 제일 좋아하실 줄은 알았지만…….’
송운 역시 뿌듯해지는 기분은 어쩔 수 없는 듯했다.
애당초 겉모습을 서점으로 만든 연유는 첫째로 서사가 책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연유는 남들의 이목을 속이기에도 이만한 것이 없다. 크기가 조금 크긴 하나 언뜻 보기엔 다섯 형제가 운영하는 그저 책을 사고, 파는 곳이기에 의심을 살 여지가 없다.
게다가 마지막으로 서점의 일이라는 것이 글을 읽을 줄 안다면 다른 일들에 비해 크게 어려울 것이 없다는 것도 한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