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화
진 장로는 주먹을 굳게 쥐었다.
꽈악.
그렇게 쥐인 두 손이 부르르 떨려왔다.
무능한 현실의 모습에 답답함이 끝까지 차오른 것이다.
‘나 또한 어찌 봉문을 원하겠는가? 하나…… 방법은 이것뿐인 것을……!’
진 장로의 말이 끝난 후 반 각 정도가 흘렀고, 얼마 되지 않은 동안임에도 불구하고 모두에게 억겁의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다.
“더 이상 반대가 없다면 봉문을 허하는 것이라 알겠소.”
누구도 입을 여는 이는 없었고, 침울한 분위기만이 그들의 피부를 스르륵 감싸왔다.
“후우……. 이로써 만장일치(滿場一致)로 해남파의 봉문을 공표하겠소.”
깊은 한숨을 내뱉은 진 장로가 묵직한 목소리로 운을 떼었다.
‘조금 더 신중, 또 신중했어야 했거늘……. 복구를 시키는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리겠구나.’
괜스레 멀쩡했던 입안이 씁쓸함이 맴돌았다.
그렇게 오랜 세월 광동마문이라 불리며 주변 일대를 두려움에 빠뜨렸던 해남파가 스스로 목을 넣어 감추고 문을 걸어 잠갔다.
* * *
해남파가 봉문에 들었다는 것과 송운이 무사히 귀환하였다는 소식은 곧 무림맹의 귀에도 빠르게 들어갔다.
“그래. 총군사. 송운이란 아이가 살아 돌아왔다고 하였는가?”
“예. 맹주님.”
“참으로 오랜만에 괜찮은 소식이로구먼.”
‘곽가의 이 아이도 마음의 짐은 조금 덜 수 있겠구나.’
호록.
백능이 자신의 눈앞에 놓여있던 찻잔에 남은 차를 마저 마시며 말했다.
비록 이번 일로 인해 당헌기를 비롯한 고수들을 많이 잃었으나, 해남파는 봉문을 내걸었고 마교 역시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큰 타격을 입었을 터다.
‘우리 역시 적잖이 피해를 보긴 하였으나…….’
지금 와서 생각해본다면 이번의 일이 무작정 손해를 입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만큼.
아니, 오히려 자신들 쪽이 가장 적은 피해를 입었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해남파의 장문인인 사도영과 젊은 고수들이 모두 목숨을 잃었고, 마교 또한 마왕들을 비롯하여 꽤 많은 인원을 잃었으니 당분간은 많은 피를 볼 일은 없을 터.’
백능의 굳어졌던 얼굴이 그제야 조금씩 펴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 그것은 곁에서 조용히 앉아서 듣고 있던 곽철우 또한 마찬가지였다. 백능의 것과는 조금 다른 안도의 표정과 함께 여러 가지의 감정이 섞여 묻어나오고 있었다.
‘송소협……. 살아 돌아와 주어서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그를 떠올리자 그날의 마지막 송운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급박하게 무너져 내리던 비고 속에서 스스로 길을 끊어버리고 나가라 외치는 그를 놔두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곽철우라고 해서 절대 가볍지는 않았다.
아니 무겁고 또 무거웠다.
십 할 중 십 할에 가깝게 살아 돌아오기 힘들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누가 보더라도 죽을 수밖에 없는 극악의 상황에서 송운은 기적(奇蹟)과도 같이 살아 나온 것이다.
만일 송운이 살아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곽철우 또한 평생 갚지 못할 은혜와 무거운 짐을 가슴속에 얹고 살아갔으리라.
그런 곽철우에게 송운의 무사 귀환은 그 어떠한 소식보다 반가웠다.
“언제 한번 송운이라는 아이의 얼굴을 보았으면 좋겠구나.”
백능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한결 편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 *
집으로 귀환한 지 어느덧 사흘이 흘렀다.
오랜만에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 송운은 마음에 알 수 없는 묘한 평온함이 느껴졌다.
익숙한 향기.
익숙한 방안의 풍경.
그리고 문을 통해 흘러 들어오는 가족들의 소리까지.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을 반겨주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가족의 품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겠지.’
몸과 마음이 편해지니 곧 송운의 얼굴도 더욱 밝아져 갔다. 아마도 부모님과 동생들에게 자신의 소식을 알리고 잠시나마 드렸던 근심, 걱정도 덜어드렸다는 것도 한몫했으리라.
“어디 다친 곳은 없는 게니?”
“그때 당시에는 조금 다쳤으나, 지금은 보시다시피 사지 모두 멀쩡합니다. 하하.”
예령이 조심스럽게 송운에게 입을 열었고, 송운은 그 물음에 흔쾌히 대답할 수 있었다.
‘한동안 정신을 잃고 사경(死境)을 헤매긴 하였으나 지금은 멀쩡하니, 괜히 말씀드려 이미 지나간 일로 걱정을 시켜드릴 필요는 없겠지.’
머릿속으로 빠르게 판단을 내린 송운은 자신이 그동안 있었던 일을 최대한 별일이 아니었던 것처럼 교묘히 말을 바꾸어 말을 이어나갔다.
그 덕에 그동안 어찌 지낸 것인지 차마 먼저 묻지 못했던 식구들의 궁금증까지 모두 풀려나갈 수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집까지 오는데 늦게 된 겁니다. 송구합니다. 어머니 아버지.”
송운이 다시 한번 홍예령과 송악에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하나 그런 송운의 어깨를 예령이 다정히 다독였다.
“괜찮다 괜찮아 운아. 우리는 너만 무사히 돌아왔으면 그것으로 되었다. 한데 그 백형이라는 분에게 크나큰 은공을 입었구나.”
“그런 셈이지요. 지금은 어머니 아버지께 먼저 당도하는 것이 옳다고 여겨 서둘러 돌아왔으나, 조만간 시간을 한번 내어 한 번 더 찾아 가 볼 생각입니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지만 언제 한번 집으로 초대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구나.”
“예, 그것도 한번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때였다.
“오빠.”
송운과 송후 사이에서 가만히 앉아있던 송하가 말을 걸어온 것이다.
송운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눈높이에 맞춰주었다. 동그랗게 똘망똘망한 눈망울로 입은 비죽 나온 채 자신을 바라보는 송하의 모습에 송운은 절로 웃음이 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막내가 무슨 일로 오빠를 이리 찾을까?”
“……이젠 정말 어디 멀리 가거나 하지 않을 거지?”
거두절미하고 물어오는 송하의 말에 송운은 잠시 당황하였으나, 이내 다시 목소릴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음, 우리 송하가 걱정이 많이 되었나 보구나. 그것까지는 어려우나 밖에 나갈 일이 생기거든 반드시 집으로 돌아오겠다는 약조는 하마.”
“정말이지?”
“그럼! 누구와의 약조라고 이 오빠가 안 지키겠느냐?”
“헤헤. 그런가? 역시 우리 오빠 최고!”
송운의 대답을 듣고서야 안심하는 듯 비죽였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말아 올라갔다.
“호호. 싸우며 자라는 형제지간이 많거늘 우리 아이들은 남매끼리 사이가 좋으니 보고 있는 이 어미도 기분이 좋아지는구나. 그렇지 않습니까? 악 가가.”
홍예령이 눈가에 반달 같은 웃음을 띠우며 말하자 송악은 민망한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끝에 조용히 한마디를 더 붙였지만 말이다.
“험. 뭐, 다 그런 것이 아니겠소? ……보기야 물론 좋은 것이고.”
“역시 그렇지요? 어서 식사들 하자꾸나. 밥이 식겠어.”
예령이 그 모습을 보며 웃자, 모두가 함박웃음이 되었다.
“예, 어머니.”
“네에!”
* * *
한동안 북경을 두려움과 공포에 몰아넣었던 마교와 해남파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다.
유난히 추웠던 이번 겨울의 추위도 점점 물러나자 그와 함께 얼어붙었던 상권과 민심이 돌기 시작하면서 예전과 같은 활기를 찾아가고 있었다.
좀 더 조용할 줄 알았던 시장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오히려 예전보다 훨씬 더 인산인해를 이루며 시끌벅적했다. 그동안 팔지 못해 손해 난 것을 메우려는 듯 몹시 바빠 보였다.
한동안 잃어버렸던 평화를 다시 찾는 듯했다.
송운 역시 그러한 모습이 싫은 건 아니었다.
그만큼 다시 사람들이 안정을 찾았다는 것일 테니.
북경이 안전하다는 것은 넓게 보면 가족들의 안위와도 직결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집으로 직접 적들이 쳐들어오지 않는 이상 말이다.
‘허허, 죽을 고생을 한 보람은 있는 건가?’
그렇게 한동안 혼자 사색에 잠겨있을 무렵, 갑자기 알 수 없는 송하의 말이 튀어나왔다.
“그래도 다행이야.”
“음? 무엇이 말이냐?”
송운은 같이 주변을 걷고 있던 송하의 말에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야 오빠도 무사히 돌아왔고 나쁜 놈들도 모두 물러갔으니깐!”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구나.”
송운은 그녀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서 말인데 오빠.”
“……?”
“이제 한동안은 외출할 일 없는 거지?”
“그럴 게다. 딱히 일이 있지 않은 한은.”
“그럼…… 오늘부터 오빠 수련에 나도 함께해도 될까? 요즘 들어 예전만큼 무공이 늘질 않아서…….”
송운은 평소와 같은 동생의 귀여운 모습이 아닌, 진지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물어오는 그녀의 물음에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최근 몇 년간 내가 정신이 없어 제대로 봐준 적이 거의 없구나.’
그의 기억에 마지막으로 그녀의 수련을 봐준 것이 어느덧 약 반년 전 일이다. 무공에는 어느 수준에 다다르면 한계라는 것이 찾아온다.
한데 송하 같은 경우는 늘 집에서 지내는 데다, 자신의 집안은 학사의 집안이다. 더더욱 다른 무인과 가깝게 지낼 수 있는 수단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홀로 그 벽을 치고 나가는 것은 확실히 힘들 터.
어릴 적 가르칠 때부터 유난히 무에 재능을 표출한 그녀지만, 그런 송하 역시도 한계가 찾아온 것이다.
물론 그 시점이 생각보다도 빠르긴 했지만.
‘슬슬 봐줄 때가 되었지. 한동안은 특별히 황궁에서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어디 멀리 나갈 일도 없을 터고…….’
생각을 마친 송운은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그렇게 하자꾸나. 내일부터 늘 수련하던 시간에 수련장으로 나오너라.”
“응!”
그의 말에 송하는 기쁜 듯 그제야 활기찬 미소와 함께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귀여운 녀석.’
* * *
번쩍.
새벽같이 눈을 뜬 송운은 아직은 캄캄한 바깥을 바라보며 잠옷을 벗고 움직이기 편한 무복으로 갈아입었다.
‘오늘부턴 송하와 함께인가?’
오랜만에 동생들과 함께 수련할 생각을 하니, 송운의 입가엔 저절로 행복한 미소가 걸렸다.
실상 송운 역시 한동안 그의 집에 머물며 치료받는 데 온 신경을 쏟았고, 집에 돌아온 후에도 그동안 처리하지 못했던 일들을 마무리 짓느라 바빴기에 오랜만에 수련에 나서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왠지 평생을 해오던 수련임에도 마음이 싱숭생숭한 기분이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향한 수련장에는 송운의 예상외로, 두 명의 인영이 보였다.
처음엔 누군지 의아했지만, 곧 그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