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第一章. 정비(整備)
북경을 포함한 주변 일대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비고의 혈전이 허망하게 끝이 난 후, 모든 것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세상에 떠들기 좋아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무황의 비고는 거대한 무덤으로 변해 다시 가라앉았다며 입을 놀리기 바빴고, 그에 수많은 무림인과 상인들은 탄식을 감추지 못했다.
모두가 많은 인력을 투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무황의 무공이 허무하게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나 그중에서 이번 일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은 다름 아닌 마교와 해남파였다.
콰앙-!
와지끈!
“이런…… 빌어먹을 정파 새끼들!”
천마, 구천악이 자신이 앉아있던 의자를 맨손으로 내려쳤고 그의 주먹에 커다란 의자 하나가 박살 남은 물론이요, 마교의 총단은 얼음장이 깨져나가듯 날카로운 분위기에 휩싸였다.
구천악이 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이겨내지 못하고 밖으로 표출시킨 것이다.
그런데도 화를 다 가라앉히긴 힘들었는지 그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
그런 구천악의 모습에 살아남아 돌아온 이들 중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였다. 잘못 입을 열었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리라.
으득.
‘굳이 이해득실(利害得失) 따위를 생각할 필요도 없다.’
이번 원정으로 인해 잔지괴왕을 시작으로 탈백마왕, 혈운마왕, 공안마왕 총 네 명의 마왕들이 죽었다.
아홉 마왕 중 절반에 가까운 수로 줄어든 것이다.
가장 약했던 잔지괴왕과 공안마왕은 그렇다 치더라도 언제 힘을 길러 자신의 자리를 탐낼지 모르는 다른 놈들과는 달리 다소 무식하긴 하나 자신에 대한 충성심으로 가득했던 혈운마왕이 이번 싸움으로 인해 죽었다.
구천악이 가장 신뢰하던 혈운마왕을 잃은 것이다.
그것도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에게!
그날의 기억이 구천악의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떠오르는 생각에 또다시 구천악의 속이 아리며 뒤틀려 왔다.
‘이…… 그런 애송이 녀석 따위에게……!’
무엇인지도 모르는 폭발에 휩싸여 순식간에 몸이 까맣게 그슬려 죽어버렸다. 혈운마왕이 지닌 능력에 비하자면 너무도 허망한 죽음이었다.
웃기는 건 끓어오르는 분노와 동시에 약간의 호기심이 덮쳐온다는 사실이었다.
하나 그것도 일순간일 뿐.
‘크큭. 대체 그것은 무엇이란 말이냐? 벽력탄? 아니다. 그것은 이미 그 자취를 감춘 지 오래. 다른 무언가다. ……제기랄!’
또다시 구천악의 손에서 의자 하나가 박살이 났다.
콰앙-!
설마하니 정파의 애송이 따위가 그러한 것을 날릴 줄이야!
그에 구천악은 또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죽은 마왕들의 자리를 대신할 이들은 차고 널렸으나, 가장 약했던 잔지괴왕이라 한들 그중에서도 구대마왕(九代魔王)의 자리에 올랐던 이가 아닌가?
오랫동안 축적해두었던 전력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그만큼의 힘을 갖추려면 또다시 지난 세월만큼의 시간이 필요할 터.
그런데도 구천악이 이만큼 참고 있다는 사실이 대견할 정도였다.
‘앞으로 불과 오 년밖에 남지 않았던 계획이거늘……!’
오 년의 세월.
길다면 긴 세월이나, 그간 견뎌온 세월에 비견하면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었다.
하나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무황의 무공은 이제 그 누구도 찾지 못할 곳에 묻혀버렸고, 애꿎은 전력만 잃은 셈이다.
완벽하게 엇나간 것이다.
‘내 안일함이 계획을 모두 망쳐 내버렸구나. 크으으.’
일순간 구천악이 부들거리며 떨리던 온몸이 멈추었다. 바득바득 화를 내던 그가 다시 이성으로 마음을 다잡은 것이다.
‘침착하자. 이대로 화만 내고 있다고 해서 변할 건 하나도 없을 터니.’
“후…….”
꿀꺽.
구천악의 깊고 긴 한숨에 안에 모여 있던 수많은 마인이 침을 꼴깍 삼켰다. 어떠한 명이 떨어질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 잔뜩 긴장한 그들과는 달리 구천악은 조용히 말을 읊었다.
“당분간 재정비할 준비를 하거라. 또한 빈 마왕의 자리는 다시 채울 것이야.”
번쩍-!
구천악의 두 눈이 붉게 빛났다.
“존명!”
그의 조용하지만 넓게 울려 퍼지는 말 한마디에 수십 명의 마인이 외치는 목소리가 마교의 총단 가득 울려 퍼졌고, 곧 모두의 움직임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 * *
쏴아아-철썩!
끼익. 끼익.
“허억……. 쿨럭.”
“거기 누구요?”
해가 진 어둑한 밤, 해남성 해구(海口)의 한 부둣가에 여유를 부리며 보초를 서고 있던 한 이가 자그마한 쪽배를 확인하고 곁으로 조심스레 경계하며 다가갔다.
하나, 그 경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어디서 표류하다 흘러들어온 이인가?’
보초가 다가가니 여기저기 피로 물들어 찢긴 옷, 아니 옷이라고 부르기도 힘들 만큼의 넝마 쪼가리를 걸친 한 이가 작은 배에서 간신히 기어 나왔기 때문이다.
“이게 대체 무슨…….”
보초가 먼저 입을 열기도 전에 쌕쌕거리는 숨을 내쉬던 그 입에선 단 하나의 말을 간신히 내뱉은 후, 힘겹게 내뱉던 숨을 거두었다.
“……해남…… 전멸(全滅)…….”
툭.
목소리가 너무도 작아 잘 들리지 않을 법했으나, 이상하리만큼 그 단어는 그의 귀에 쏙쏙 들어왔다.
“!?”
보초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으나, 이를 확인할 이는 이미 숨을 거두어버렸다.
소식통을 맡은 그는 비고가 완전히 무너져 내리기 직전, 죽을힘으로 튀어나와 이 먼 해남성까지 몸을 이끌어 소식을 남기고서야 눈을 감은 것이었다.
* * *
소식통이 남긴 마지막 말은 해남파 전체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켜왔다. 모두가 기대하였던 사도영의 귀환은 없었다. 아니, 사도영만이 아니었다.
툭.
“……전멸이라니.”
세상을 전부 잃어버린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원형의 탁자에 둘러앉은 이들 중, 길고 긴 수염을 지닌 이가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쾅!
“말도 안 되오. 그럴 리 없소! 우리 장문인께서는…… 장문인께서는 결코!”
“하나, 묵 장로. 이미…… 확인된 바요. 이미 어제 그 소식을 듣고 동이 트는 대로 바로 전서구를 날려보았으나……. 답은 같았소이다. 그리고 소식을 전한 이의 신원도 파악이 되었고. ……장문인과 함께 나섰던 풍비조호대(風飛鳥護隊)에 소속되어 있던 이더군.”
털썩.
얼핏 보면 침착해 보이는 말투였으나, 그 속에는 응어리진 분노가 가득 들어찬 백발노인의 말에 버럭 화를 내며 일어섰던 긴 수염의 인물이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장문인께서 정녕……! 정녕 귀천(歸天)하셨단 말인가?’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으나, 이는 현실이다.
반쯤 쓰러져가던 해남파를 이만큼이나 일으켜 세운 분이다. 해서 믿었고, 당연히 무황의 무공을 얻어 당당히 귀환하리라 여겼다.
이제 중원으로 나아가는 건 코앞의 일이라 하였거늘!
‘한데……. 그러한 분께서 어찌……?’
망연자실(茫然自失)한 표정으로 휩싸인 그들은 더 이상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떠들어 대는 장로들로 인해 시끌시끌했던 이곳은 순식간에 고요로 물들었다.
“……결단을 내려야 하오.”
그러한 적막을 깬 것은 장로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진강노(陳康老)였다.
이미 나이가 종심이 넘은 그는 좀 전에 말을 이었던 백발노인보다 더욱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읊었으나, 이와는 달리 표정은 몹시 심각했다.
‘작금 해남파의 커다란 기둥이 뽑혔으니 이를 어이할꼬…….’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여기에 모여 있는 모든 이들이 다 느끼고 있는 바였다.
무너진다.
그동안 광동마문이라 불릴 만큼 광동에서는 이미 작고 큰 적들을 너무 많이 만들었다.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해 세력을 부풀린다는 명목하에 수많은 착취를 해왔고, 제법 많은 크고 작은 문파들을 힘으로 무너뜨렸다.
그런 시점에, 일류 고수들 대다수와 해남파의 기둥인 사도영이 죽었다는 사실이 퍼지기 시작한다면?
‘……이는 말할 것도 없을 터.’
해남파가 사방에서 공격을 받을 것은 당연지사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비록 해남파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 바다 한 가운데이고 장로들과 제법 많은 무인들이 남아있다곤 하나 이 정도로 해남파를 유지한다는 건 불가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앞에 선명히 보이는 듯했다.
문파 내 젊은 고수들이 전부 죽어 나간 이 상황에 새로운 장문인을 내세우는 것조차도 쉽지 않은 일.
사도영이 해남파를 일으켜 세운 후.
아니, 해남파가 세워진 이래 최대의 위기였다.
“장문인의 시…… 신은? 찾을 수 있소?”
묵 장로라 불린 이가 마지막 희망으로 지푸라길 잡는 심정으로 말을 꺼내 보았으나, 그조차도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일 뿐이었다.
“비고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고 하오. 오죽하면 거대한 무덤이라는 이름까지 붙었겠소. 게다가 그곳은 다른 곳도 아닌 북경이니…….”
말끝을 흐렸으나, 답은 하나였다.
한마디로 불가하다는 뜻이다.
그나마도 시신도 찾을 수 없다는 말은 묵 장로뿐만이 아닌 다른 장로들 모두의 정신을 붕괴시키기엔 충분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장문인의 시신조차도 찾아 묻을 수 없다니!
이 또한 해남파의 큰 수치였다.
그때, 누군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봉문을 준비해야 할 듯하오.”
“진 장로님!”
“그것만큼은!”
진 장로가 내뱉은 한마디 말은 모두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것이야말로 두 번째 명예 손실과 다름없었다.
봉문을 내린다면 분명 주변 문파들이 함부로 들이닥치지는 못할 터다. 하나 그만큼 문파가 쇠약해졌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것이니만큼, 지난 무림의 역사상 봉문은 그리 쉽사리 등장하지 않았다.
한데 봉문이라니?
장로들이 모두 펄쩍 뛰고도 남을 법한 단어였다.
“하면 어찌하면 좋겠소? 이대로 해남파를 다른 문파들에게 넘겨주기라도 하면 된다는 것이오? 우리가 평생을 몸 바쳐 일궈놓은 이곳을? 봉문을 제외한 다른 방도가 있거든 말들 해보시오. 그것이 타당하다고 여기거든 내 순순히 그 고견을 따르도록 하겠소.”
“…….”
진 장로의 너무도 단호한 그 말에 그 누구도 쉽사리 다시 입을 열지 못하였다. 그들 또한 작금의 상황에선 더 나은 방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