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전생-99화 (99/275)

제99화

잠시 후.

차가 다 우러났는지 백이 찻잔을 열었다.

시원하면서도 꽃향기가 나는 것이 송운의 머릿속을 맑게 풀어주고 있었다.

쪼로록.

“한번 드셔보세요. 마음에 드실 겁니다.”

백이 미소 지으며 송운에게 찻잔을 넘겼고, 송운이 이를 조심스레 받아들였다.

호록.

뜨거운 물에 혀가 데지 않도록 조심스레 한 모금 들이킨 송운은 무언가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음. 정말 차향이 좋군요. 맛도 좋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배우시다 보면 송 공자께서도 이런 좋은 향을 내는 차를 우릴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송운의 하루가 흐르고 있었다.

* * *

‘고대하던 시간이로군.’

이제는 점심을 먹고 난 뒤 찾아오는 이 시간이 송운은 제법 기다려졌다. 단 며칠을 배웠을 뿐인데, 다도는 생각보다 송운에게 많은 것을 안겨다 주고 있었다.

달그락.

다도가 가볍게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어김없이 백이 다도기를 들고 송운의 침상 곁으로 찾아왔다.

여전히 순박하게 웃는 그의 인상은 참으로 보기 좋다는 생각을 할 무렵.

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기본기는 충분히 익히신 듯하니, 오늘은 직접 차를 우려 보시는 게 좋겠군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몇 번의 대화가 오가고, 백이 물을 끓이기 시작한다.

간단한 화롯불이 바로 곁에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화르륵!

곧바로 불이 붙었고, 송운은 물이 끓기 전 많은 생각에 빠졌다.

며칠간은 그동안 쌓인 피로가 누적되어서인지 피곤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이젠 무언가 생각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런 송운을 백은 재촉하지 않았기에 편히 사색에 잠길 수 있었다.

‘얼마 되지 않은 시간 동안 참으로 많은 일이 일어났구나.’

송운은 회귀 후 있었던 수많은 일을 떠올렸다.

해남마제와 마주친 후, 새로이 만들어낸 무공인 선천기폭을 시작으로 비고에서 간신히 살아나와 백에게 구조를 당했던 것과 무황 비서로 인해 자신이 펼쳤던 시공을 가르는 검까지!

모든 것이 전생에서는 있지 않았던 새로운 기연 혹은 발견이었다.

송운이 알고 있거나, 겪지 못했던 수많은 일이 그를 찾아왔다.

‘거기에 해남마제가 익혔던 그 기이한 능력은 뭔가 이기어검과는 묘하게 분위기가 달랐다. 하면 대체 그 능력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전생에서 해남마제에 대한 악명은 익히 들었으나, 허상이라 생각했던 것이 자신의 눈앞에서 직접 펼쳐지는 걸 봤을 때, 송운에겐 나름대로의 충격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가장 원초적인 문제였던 화마 또한 그 시기가 무려 일 년이나 앞당겨져 찾아오질 않았던가?

한참을 사색에 빠졌던 송운의 어깨에 누군가의 손이 올라왔다.

백이었다.

“송 공자님. 물이 다 데워졌는데도 대답이 없으시기에……. 우선은 제가 우려 놓았습니다. 차 한 잔 드시지요.”

“아, 이런. 감사합니다.”

그가 건네준 따뜻한 차를 송운이 건네받고 그것을 한 모금 마시자, 신기하게도 방금 전까지 송운의 머릿속을 휘저어놓았던 잡념들을 한 번에 날려버린다.

‘참으로 신비하구나. 그냥 차 한 잔을 마신 것뿐이거늘 어찌 이리도 몸이 가벼워지며 그런 생각들이 사라지고 마음에 평안까지 찾아온단 말인가?’

송운은 마치 무언가 자신의 온몸을 씻기듯 개운해지는 몸과 머리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에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인지 모르겠으나, 어떻게 해서든 정도(正度)로 향할 방도가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반드시, 그렇게 만들리라.’

송운의 마음이 더욱 굳건해져 갔다.

* * *

송운은 그날 이후로, 날이 갈수록 다도의 실력이 늘어가고 있었다.

아직까진 움직이지 않는 다리로 인해 매일같이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지만, 백은 송운의 발전을 진심을 담아 칭찬하고 축하해주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 속에 점점 송운과 백은 친밀해져 가고 있었다.

본디 사람과 친해지려거든 식사를 같이 하라고 하였던가?

늘 삼시세끼를 같이 나눠 먹으며 다도를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하루의 일과가 되어버리니, 급속도로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하. 송 공자의 실력이 날로 늘고 있으니 이 또한 기뻐할 일이군요. 인생의 즐거움이라는 걸 딱히 모르고 살아왔는데 송 공자께서 이리 잘 따라와 주시니, 이 백 모 오랜만에 즐거움이라는 감정을 느껴봅니다.”

송운은 그런 그의 말에 가슴 한편이 찡해져 옴을 느꼈다.

‘생각해보니 나야 가족들의 품으로 다시 돌아와 희노애락(喜怒哀樂)을 함께 나누건만, 백 공자께서는 가족의 이야기는커녕 홀로만 이리 지내시니…….’

가끔씩 드는 안타까움에 송운이 자신이 다 낫거든 같이 외지로 나가보는 건 어떻겠냐며 언질을 해보았으나, 백은 웃으며 정중히 거절해왔다.

‘자신은 지금의 생활이 훨씬 편하다 하셨던가?’

그런 그의 생각을 존중해주기로 마음먹었으나, 이따금씩 찾아오는 안타까움은 어쩔 수 없는 듯했다.

백의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진 않았으나 송운은 그가 참한 여인을 만나 결혼까지 하여 아이를 낳는 모습도 보고 싶다는 생각까지도 몰래 해보곤 했다.

이제는 그저 단순한 은인만이 아닌 자신의 형제와도 같이 느껴지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송운은 문득 백의 나이가 궁금해졌다. 송운이 겉으로 보기엔 백의 나이는 아무리 많이 쳐봐도 이립을 넘는다고 보기 힘들었다.

아니 그조차도 제법 많이 쳐주어야 그 정도로 보일까 말까한 외모였기 때문이다.

‘궁금하면 물어보면 되는 법이지.’

그렇게 생각한 송운이 백을 향해 물었다.

“한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백 공자님께서는 연세가 어찌 되십니까? 저는 올해로 스물하나입니다.”

송운의 물음에 백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떼었다.

“그건……”

“그건?”

“비밀입니다.”

송운은 순간 백의 대답에 기운이 빠지는 듯하였으나, 그의 순수한 모습에 그의 비밀을 지켜 주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송운이 포기하려던 순간.

백이 송운의 귓가에 한마디 덧붙였다.

“정확한 숫자는 비밀이오나, 이 백 모는 송 공자보다 나이가 많습니다.”

송운은 그런 백의 모습에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단순히 그의 행동이 어딘지 모르게 귀여웠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럼에도 송운이 백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던 건 송운이 보기에도 백의 젊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그 눈빛의 깊이가 매우 깊어 그저 우습게 넘기기엔 인정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송운은 그런 그의 말에 고개를 주억이며 진지하게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럼 제가 앞으로 백 공자님을 형님이라고 불러도 될는지요? 이렇게 좋게 맺은 인연에, 동생만 둘이 있는지라……. 제게도 형님 한 분 계셨으면 합니다.”

이건 그냥 단순히 고마움에 하는 빈말이 아니었다.

한마디 한마디 속에 송운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런 송운을 향해 백은 환하게 웃었다.

“물론입니다. 그럼 제게도 아우가 한 명 생기겠군요. 하하! 기분 무척 좋은 날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송 아우.”

“저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백 형님.”

* * *

둘이 의형제를 맺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송운의 몸 상태가 모두 완쾌되었다.

백의 정성 어린 간호 덕분에, 내상도 거의 치료가 된 데다가 마침내 조금씩 움직이던 두 다리가 모두 완전히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송운은 하늘에 감사하고 백에게 감사했다.

그리고 새삼 세상의 모든 것들이 반갑게 느껴졌다.

‘건강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되는구나.’

송운은 두 다리로 제자리에서 몇 번 퉁퉁 몸을 튕겨보았으나 역시나 아무런 문제는 없었다.

“다행이다. 네가 이리 건강해져서 돌아다닐 수 있다니 내 기분이 다 좋구나.”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백이 어느새 말까지 놓는 친분을 보이며 송운에게 축하를 건네었다.

여전히 그는 순박하게 웃어주고 있었다.

“백 형. 이게 다 백 형 덕분이야. 정말 고맙고 또 고마워.”

송운은 진심으로 그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백이 없었다면, 그가 자신을 구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지금의 모습을 되찾지 못했을 터다. 완쾌한 모습으로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건 백이 지극정성으로 돌보아주었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런 송운의 말에도 백은 겸손한 말로 자신을 낮추었다.

“아니다. 처음 널 보았을 땐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살고자 하는 네 의지가 없었다면 내가 구했더라도 살아나지 못했을 거야.”

“아 참. 백 형. 지금 우리가 있는 위치가 대략 어디쯤인지 알 수 있을까?”

“하북성 선화현(宣化縣) 오림촌(澳林村)에서도 훨씬 안쪽 깊숙이 위치해 있지.”

하북성 선화현이라면 송운도 들어본 곳이다.

이곳에서 북경까지는 그리 먼 거리도 아닐 터.

송운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백 형. 그게……. 우선은 북경으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 내가 형 집에서 신세를 진 게 어느덧 달포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가족들이 집에서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실 거라…….”

미안함이 잔뜩 깃든 목소리에 백은 송운의 어깨를 툭 쳐주며 말했다.

“너무 처져 있지 마라. 애초에 너에게 뭘 바라고 한 일도 아니니 미안해하지도 말고. 인연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이니. 자, 아무리 북경이라 해도 이곳은 산새이니 날이 밝을 때 출발 하는 게 좋을 거야. 날이 어둑해지기 전에 가야 길도 안 잃어버릴 테고. 아, 그리고 잠시만.”

백이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들고나왔다.

“이거 받아가.”

백은 송운의 간소하나마 짐을 건네준 것이다.

짐은 별것 없었다.

송운이 들고 있었던 검과, 점심에 먹으려고 미리 만들어 두었던 주먹밥이었다.

“백 형……. 정말 고마웠어.”

송운은 그런 백의 모습에 감동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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