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화
차분히 말하며 순박하게 웃는 그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산골에 사는 순진한 청년 같아 보였다.
‘정말 다행이구나. 이분이 날 발견하지 못하였더라면……. 휴.’
송운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시 한번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이런 큰 신세를 지게 되었군요.”
“아닙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어찌 죽어가는 이를 돕지 않고 지나치겠습니까? 이것도 인연인데 몸이 다 나을 때까진 푹 쉬었다 가시지요.”
“아닙니다. 어느 정도 나으면 곧바로……. 크윽.”
송운은 몸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이상하게도 하반신이 말을 듣지 않았다.
꿈속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다리 쪽이 크게 다친 것인가? 허어.’
그런 송운을 향해 청년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이곳은 외진 곳이라 사람이 다니질 않아 저도 조금 심심하던 참이었습니다. 약부터 드세요. 몸이 한결 나아지실 겁니다.”
청년이 건네준 약은 향긋하면서도 약간은 쓴 향이 났다.
“아……. 고맙습니다. 그럼.”
꿀꺽.
약을 받아든 송운이 약을 천천히 들이켰다.
“……?!”
한데, 약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마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계속된 토악질로 인해 식도가 많이 상했을 터인데, 부드럽게 넘어가면서 엄청난 내상이 느껴지던 속이 확 풀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세상에 이런 약이 존재했단 말인가?’
꽤나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많은 내상 약을 보아왔던 송운이지만, 이 정도로 잘 듣는 약은 보지 못했다.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송운은 이내 청년에게 약의 재료를 물어보았다.
“혹여 이 약에 무슨 약재가 들어갔는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여쭈어보아도 되겠습니까?”
“음. 죄송하지만 이건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비밀인지라 말씀을 드리기가 좀 곤란하군요.”
약간 곤란한지 어색하게 웃는 그의 모습에 송운은 괜한 은인에게 불쾌감은 준 것은 아닌지 슬며시 걱정이 들었다.
하여 곧바로 사과를 건네며 화젯거리를 돌렸다.
“역시 그렇군요. 괜찮습니다. 오히려 제가 죄송하지요. 아, 그러고 보니 은인의 성함도 알지 못했군요. 제 이름은 송운입니다. 그냥 편하게 송운이라 불러주시면 됩니다. 은인분의 성함은 어찌 되시는지요?”
그러자 청년이 입가에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답해왔다.
“응당 사람을 구한 것뿐인데 은인까지라 할 게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백이라 불러주시면 됩니다. 그게 편합니다.”
* * *
이곳에서 눈을 떠 해가 뜨고 지는 걸 몇 번이나 반복하였을까?
송운은 조금씩이나마 자신의 몸이 나아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엔 외상도 외상이지만 내상도 만만치 않았거늘……. 내상이 생각보다 빠르게 낫고 있구나.’
눈을 떴을 때부터 거의 움직이지 않던 하반신은 여전히 말을 듣지 않아 답답한 감은 있었으나 그것도 미세하게나마 좋아지고 있었고 그 외의 것들은 심신이 안정되면서 확연히 나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렇게까지 되는 데 백의 도움이 가장 컸다.
‘백 공자께서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그의 말대로 꼼짝없이 산짐승들의 먹이가 되었을 터인데. 정말 고마운 사람이구나.’
그뿐이 아니었다.
백이라 자신을 소개한 청년은 생각보다 다재다능했다.
약은 말로 할 것도 없이 잘 달여 내어 송운을 매번 놀라게 했고, 간혹 송운이 좋아할 만한 차도 매우 잘 우려냈다.
외진 산새에서 자란 탓일까?
백은 약초들과 차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것 같았다.
게다가 홀로 살아온 덕에 스스로 음식을 해 먹다 보니 음식 솜씨도 매우 뛰어나 매번 식사 때마다 송운의 미각, 후각, 시각을 즐겁게 해주었다.
뭐든 다재다능한 덕분에 송운은 침상에 누워 움직이지 않은 채,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오늘은 오리고기인가?’
새하얀 국물에 갖가지 신선한 채소들과 버섯이 버무려진 모양새에 덧붙여 약재도 넣었는지 약재의 부드러운 향까지 가미되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탕은 송운의 위와 코를 자극시켰다.
꿀꺽.
‘먹기엔 너무 아까운 음식이로다. 게다가 신세 지는 것도 모자라 이리 얻어만 먹고 있으니…….’
그런 송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머뭇거리는 송운을 향해 조심스레 백이 물어왔다.
“어째 보고만 계십니까? 혹여 오리는 못 드십니까?”
“아, 아닙니다. 그저 먹기에 아깝다는 생각을 좀 하고 있었습니다. 매끼니 때마다 아무런 도움도 못 되는데 얻어먹기만 하고 있으니……. 다른 곳은 이제 다 괜찮은데 이상하게 하반신이 말을 잘 듣지 않는 중이라……. 미안합니다.”
송운의 대답을 들은 백이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 웃으며 답했다.
“하하. 그런 것이었군요. 괜찮습니다. 저는 환자를 부려 먹을 만큼 악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다 괜찮아질 겁니다. 해서 특별히 몸에 좋다는 약재도 조금 넣어보았으니 사양 말고 어서 드세요.”
‘역시 약재의 향이 난다 했더니만.’
송운의 입가엔 어느새 미소가 어렸다.
백의 그런 세심한 배려심까지, 참으로 괜찮은 사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렇게 잘생기고 재능이 많은 남자가 산에 처박혀 홀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정도였으니…….
송운은 이내 오리의 살을 뜯어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육즙과 향긋한 내가 그대로 송운의 입안을 가득 채웠다.
‘음……! 맛있구나.’
“어떻습니까?”
“참으로 맛있군요. 어서 백 공자께서도 같이 드시지요. 혼자 먹기에는 양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게 백과 송운의 점심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 * *
식사를 마친 후에 백은 늘 약과 차를 달여 내왔다.
송운 또한 차를 좋아하였기에 그 시간이 싫지만은 않았다. 어차피 지금은 움직일 수 없으니 할 수 있는 거라곤 백과 갖는 시간이 유일했다.
“음……. 오늘도 차향이 참으로 좋군요. 이렇게까지 우려내는 게 결코 쉽지는 않았을 텐데.”
송운의 놀라는 모습에 백은 몹시 즐거운지 내내 표정이 밝았다.
‘하기야 홀로 지내왔다고 하였으니, 오랜만에 사람과 대화하는 게 즐거울 만하지.’
그런 백의 모습에 송운이 고개를 절로 끄덕인다.
“매일같이 이리 식후에 한 잔씩 곁들이다 보니 그런가 봅니다. 아, 그럼 혹시 앉아서도 배울 수 있는 다도(茶道)를 좀 배워보시는 건 어떠하겠습니까? 송 공자께서도 매일 앉아만 있으려면 심심하실 듯한데.”
“그거 괜찮군요. 그렇지 않아도 저 또한 차를 좋아하는 편이니 이참에 백 공자께 다도를 배우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거 정말 여러모로 신세를 지는 건 아닌지…….”
송운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리자 백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환하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송 공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니 하루하루가 즐거워 좋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백 공자님.”
* * *
그렇게 해서 시작된 백과 송운의 다도 시간은 앉아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던 송운에게 매우 즐거운 시간이 되어주었다.
송운 역시 그동안 많은 차를 우려 보았으나, 제대로 배워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백은 송운과 함께 하기 위해 다도에 필요한 그릇들과 찻잎을 내왔다.
“우선 다도에는 색, 향, 형, 수, 다기, 시, 온도, 우려내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절로 총 열 가지의 요령이 있습니다.”
“음, 생각보다 다도에 많은 요령이 필요하군요.”
“그렇지요.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색(色), 향(香), 미(味)입니다.”
송운은 백이 하는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진중한 표정으로 하나하나 새겨들었다.
“혹, 송 공자께선 가장 좋은 명차(名茶)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음……. 아무래도 용정차가 아니겠습니까?”
송운의 대답에 백이 시원스럽게 웃었다.
“하하하! 예. 맞습니다. 서호용정(西湖龍井)이라 불리기도 하지요. 그 외에도 벽라춘(碧螺春), 군산은침(君山銀針), 육안과편(六安瓜片), 황산모봉(黃山毛峰), 태평후괴(太平猴魁), 신양모첨(信陽毛尖), 안계철관음(安溪鐵觀音), 기문홍차(祁門紅茶), 봉황단총(鳳凰單叢) 등이 있으나, 저는 그중에도 태평후괴를 가장 좋아합니다. 그 향이 참 향긋하여 꽃이 만발하는 봄을 떠올리게 하지요. 만물이 깨어나는 봄은 그 기개가 이제 막 날갯짓하는 이의 그것과도 닮아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맛은 상쾌하고 달아 차를 즐기지 않는 이들의 입맛에도 잘 맞지요.”
신이 난 듯 설명하기 바쁜 백의 말을 송운은 열심히 경청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지식을 들을 수 있다는 건 송운 본인에게도 참 즐거운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한참의 설명이 끝난 후, 백이 차를 우리는 걸 직접 보여준다며 그릇과 찻잎을 꺼내었다.
꺼내놓은 찻잎의 모양새는 양 끝이 뾰족하고 길며 미세하게 흰 털이 나 있었다.
‘찻잎의 생김새가 참 독특하구나.’
송운이 찻잎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백이 그를 향해 말했다.
“찻잎의 모양이 독특하지 않습니까?”
송운은 마치 자신의 속마음을 들킨 듯 깜짝 놀랐다.
하나, 그저 그것에 대해 설명을 하려 한 것임을 알고 헛웃음을 흘렸다.
“이제 슬슬 물도 알맞은 온도가 된 듯하군요. 이 차를 우려내는 방법은 중투법(中投法)으로 하시면 됩니다. 즉, 이렇게 제가 하는 대로 따라 하시면 됩니다.”
백이 먼저 끓인 물로 온배(溫杯) 시켰다.
“온배를 시키는 이유는 찻잔이 따뜻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급하게 할 것이 아니라면 이 과정이 들어가면 차는 더 맛있게 우려지지요.”
곧 찻잔이 따뜻해지자, 그에 이어 뜨거운 물을 찻잔의 절반에 맞추어 따라내었다. 그다음 찻잎을 물에 담그는 치차(置茶)를 거쳐 윤차(潤茶).
즉 찻잎을 적시는 침윤포(浸潤泡)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그리고 잠시 찻잔의 입구를 닫았다.
“잠시 후에 입구를 열고 다시 끓는 물을 차에 부으면 이로써 차를 우리는 것이 끝이 나지요. 이렇게 하는 게 바로 중투법입니다.”
“이제 보니 차를 우리는 법도 참 다양하고 많은 것 같군요. 덕분에 좋은 걸 배웠습니다.”
“겉보기엔 쉬워 보일지 몰라도 한 번에 잘 되진 않을 겁니다. 생각보다 공을 많이 들여야 하니까요. 하나 차를 우리다 보면 온갖 고뇌도 사라지고 그 향이 사람의 기운을 맑게 해주니 배워두시면 좋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