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이겨내야 한다. 이번이 힘을 낼 수 있는 마지막이다. 제발…….’
하나, 송운의 그러한 애타는 노력에도 몸은 또다시 휘청거렸고, 넘어지려던 순간이었다.
송운이 간신히 입을 열어 다음 문구를 외친 것이다.
“자존형시 각동시괴!”
‘네가 존재하는 곳 또한 시간에 의해 형성된 것이며 그것을 깨닫는 동시에 시간과 공간의 경계는 무너질 것이다……!’
터억.
쥐어짜 내듯 마지막 문구를 내뱉으며 세 번째 걸음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허억……. 허억…….”
가쁜 숨을 내쉬며 송운이 잠시간 괜찮아지는 듯, 싶던 그때. 몸이 두 번째 걸음보다 더한 고통으로 짓눌리기 시작했다.
두 번째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통에 처음엔 이마에만 맺혔던 땀이, 이제는 송운의 온몸이 땀으로 목욕하듯 젖어갔다.
“크아아악!”
두 번째 걸음을 내디뎠을 땐, 온 세상이 빙빙 돌며 흔들리는 것과도 같은 느낌이었다면 마지막 세 번째 걸음에서는 세상이 힘없는 종잇장처럼 구겨지는 기분이었다. 거기에 누군가 자신의 등을 억지로 떠미는 것 같은 느낌까지 송운을 괴롭혔다.
아니, 세상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몸마저도 구겨져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 온몸을 감싸고도는 듯했다.
그리고 간신히 버티고 있던 정신마저 붕괴되어 버릴 것 같은 그때.
후웅!
‘커윽…… 됐…… 다!’
머릿속에서 따라 그려지는 흐름을 따라 검을 쥔 손에 힘을 넣은 채 마지막 남은 모든 기력을 담아 송운의 팔이 횡 베기를 시도했다.
서걱!
* * *
휘이잉.
‘대체……. 어찌 된 일이지?’
송운은 지금 자신에게 벌어진 일에 순간 판단이 서지 않을 만큼 당황하고 있었다.
죽자 살자 덤벼든 마지막 횡 베기를 시도한 후는 무언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듯한 기분이 온몸을 감싸고 들었다.
‘분명 이상한 느낌이었는데…….’
손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마치 종이가 잘려 나가는 듯한 느낌과 함께, 몸이 존재하는 감각이 미묘하게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거기에 시야도 순간적이지만 불빛이 꺼졌다 켜진 듯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단순히 불이 꺼졌다 켜진 게 아니라, 아주 캄캄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환한 빛을 마주하는 것과도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도통 설명할 수가 없었다.
어둠 속에 있다 나와 오랜만에 보는 불빛에 어지러움을 느낀 것이라 생각한 송운은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그 오묘한 느낌들은 왠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설마 또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지.’
스르릉.
송운은 하늘로 솟아있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선, 완연한 동굴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멍하던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따스한 햇볕이 마주하고 시원하면서도 상쾌한 바람이 자신의 몸을 타고 흘러 지나가고 있었다.
바람이 송운의 뺨을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가자 그제야 송운은 뒤를 돌아보았다.
“……세상에.”
송운은 그야말로 세상에라는 말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걸어 나온 길 뒤로, 그 무게를 가늠할 수도 없을 만큼의 거대한 몸집을 지닌 암반 더미가 입을 쩌억 벌린 채, 반듯한 일자로 두 동강이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설마 내 검격이 저 암반 덩이에 저런 상처를 냈단 말인가?’
단순히 검을 한 번 휘둘렀을 뿐이다.
한데 어찌 저런 큰 암반 더미를 가를 수 있었단 말인가?
정녕 믿을 수 없다는 듯 그곳을 한참 쳐다보았으나, 송운은 결국 믿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손에 검이 들려있었고, 불과 일 분 전까지만 해도 막혀 있던 통로가 한눈에 들어온 것이다.
가장 확실한 확답은 송운 스스로를 제외하고는 지금 이곳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 순간.
동시에 속이 뒤틀리는 느낌과 함께 머리가 띵해지면서, 눈에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뭐지?’
주륵.
이내 머리 쪽에 있던 실핏줄이 다 터져나간 것인지 송운의 코와 입에선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이게 대체 무슨……?’
쿵.
피를 닦아낸 송운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그가 무언가 알아내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입에서는 피를 토해냈다.
“쿨럭. 우…… 우웨에에엑!”
그리곤 서서히 정신이 희미해지면서 처음 무황 비서를 받아들였을 때와 비슷한, 그러면서도 조금은 더 다른.
죽음이라는 단어가 강하게 와 닿았다.
‘여기까지 와서…… 죽을…… 순…….’
털썩.
나름대로 안간힘을 써보려 하였으나 송운이 희미해져만 가는 의식을 붙잡기엔 역부족이었다.
사박.
그렇게 송운이 의식을 잃고 쓰러진 직후.
송운의 머리 위로 햇빛이 비치는 사이에 웬 검은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졌다.
第十三章. 백(白)
새카만 어둠 속.
그 속에서 눈을 뜬 송운은 정신을 차리고 나서 한참 동안을 자신이 겪은 고통과 암반 더미를 자르고 나온 것이 되레 꿈이 아니었는지 의심하였으나, 몸과 정신이 내지르는 고통스러운 느낌은 송운에게 꿈이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다.
‘크윽……대체 여긴 어디인 거지?’
정신을 잃기 직전에도, 정신을 차린 뒤에도 계속해서 느껴지는 고통은 아직 그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지끈거리며 어지럽게 다가오는 두통은 송운을 매우 괴롭게 했다.
게다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에 홀로 버려져 있다는 생각은 더욱 송운을 답답하게 만들고 있었다.
대체 이곳이 어디인지, 자신이 왜 이러한 상태에 빠져있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니 답답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할 정도였으니…….
송운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몸을 움직여보려 하였으나, 이조차도 쉽지 않았다.
애당초 두 다리는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그나마 조금씩 움직일 수 있는 건 목과 손가락뿐.
그 이상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허허…….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 어찌 숨은 제대로 쉬고 있다니.’
송운은 그 사실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다 보니 송운이 이 공간 속에서 알아낼 수 있는 것 또한 자연스럽게 최소한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죽진 않은 것 같은데……. 이 상태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결국 시체와 다를 바가 무에 있단 말인가? 어차피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면 굶어 죽겠지.’
송운은 허탈하고 또 허탈한 마음에 몸을 움직이려던 것을 포기했다. 한참을 시도하였지만, 움직이려 할 때마다 엄청난 고통이 송운에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그의 영혼은 고통받고 있었다.
단 한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은, 마치 물속 같으면서도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나 그런 건 이미 작금의 송운에겐 중요치 않아 보였다.
‘참으로 인생이란 것이 허무하구나. 결국 이리 죽을 것을. 홀로 발버둥 치다 죽음을 자초한 꼴이지 않은가.’
송운은 계속되는 고통 속에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때.
송운은 기이한 경험을 또 한 번 할 수 있었다.
‘……빛?’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지독하게도 어두운 이곳에, 어디선가 빛살 한줄기가 뚫고 내려와 화한 느낌과 함께 조금씩 느리게나마 어둠을 몰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자신이 이젠 헛것을 보는 건 아닌지 의아해하였으나, 그 빛은 헛것이 아니었다.
‘진짜 빛이로구나!’
처음 한 줄기로 들어왔던 그 빛은 점점 커져 송운이 누워 있던 곳까지 닿았고, 마침내 환히 밝혀주는 빛이 송운의 몸에 닿는 순간.
마치 어머니의 품에 안겼던 그 느낌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포근하군.’
그뿐만이 아니었다.
‘왠지 모르겠으나, 고통이 점점 가시는 듯한 기분이구나.’
송운은 점점 그 빛 속에서 평안함을 찾아가기 시작했고, 이내 완전히 고통이 사라지면서 잠시 잊고 있었던 가족들을 서서히 떠오른다.
그 덕에 정신이 번쩍 든 송운은 자신이 좀 전에 가졌던 생각을 한 번에 털어 내버렸다.
‘그래.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지? 이곳에서 살아 나간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느냐?’
이내 송운은 밀려오는 포근함과 동시에 급격한 몰려오는 피로감에 스르륵 눈을 감았다.
* * *
스륵.
송운은 천천히 눈을 떴다.
‘이곳은 또 어디지?’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밝은 햇살이 크진 않으나, 작지도 않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컴컴한 세상 속에서 비췄던 빛만큼 포근하진 않았으나, 그 빛마저도 송운에겐 반가웠다.
‘그래도 내가 살긴 살았나 보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쉰 송운이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고, 벽이 온통 나무로 되어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작은 오두막집인 듯했다. 게다가 자신이 누워 있는 침대 또한 목조로 된 침상인 듯했다.
‘설마 또 꿈인가?’
연달아 낯선 장소에서 눈을 뜨니 송운에겐 혼동이 왔다. 이젠 어떤 것이 꿈이고 현실인지조차 감이 잡히질 않았다. 이전의 컴컴한 세상에서 눈을 뜬 것보다야 훨씬 나은 듯했지만.
그중에서도 단 하나 공통적인 것이 있다면 지금도 자신의 몸은 움직이기 쉬지 않다는 것이었다.
저벅저벅.
어안이 벙벙한 채로, 사방을 둘러보던 송운의 귓가에 누군가의 기척이 들려왔다.
‘누구……?’
송운이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보자 웬 젊은 청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훤칠한 키에 다부진 체격.
거기에 더해 잘생긴 외모에 누구나 보면 선하다고 볼 수 있을 인상을 지닌 이였다.
한참 송운이 그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을 때.
젊은 청년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리곤 이내 송운의 이마 위에 놓여 있던 아직 물기가 촉촉한 천을 내리며 손을 올렸다.
“깨어나셨군요.”
입을 연 청년의 목소리에는 미성이 가미된 묘한 마력이 담겨있었다.
송운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곳은 현실이고, 자신을 간호해준 이가 바로 저 청년이라는 것을.
“아……. 고맙습니다. 정말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윽.”
송운은 몸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청년이 이를 제지했다. 그리곤 새로 가져온 듯 보이는 천에 물을 적시며 짜내고선 송운의 이마 위에 새로 얹어주며 말했다.
촤악.
“아직은 누워계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운이 좋았지요. 가끔 산책을 나가곤 하는데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웬 사람 한 명이 피를 흘리고 쓰러져있기에 처음엔 많이 놀랐습니다. 워낙 외진 곳이라 사람이 다닐 곳이 아닌데 피까지 흘리며 쓰러져있었으니 말입니다. 날이 져 산짐승이라도 마주쳤으면 큰일 날 뻔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