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화
비록 당헌기가 탐욕에 물들어 스스로 목숨을 잃었으나, 구주칠대무신에 이름을 올린 만큼 그의 무위는 높이 살 만한 것이었다.
송운이라는 아이의 소식도 안타까웠으나, 당헌기를 잃었다는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그런 무림맹의 커다란 대들보 중 한 명을 잃었으니, 백능의 고심이 커질 법도 했다.
‘그리 몸조심을 하라 일렀거늘…… 어찌 내 말을 듣지 않고!’
하나 이미 지나간 일이다.
돌이킬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번 일로 참으로 안타까운 인재를 여럿 잃었구나. 통탄하고 또 통탄할 일이로다!”
백능이 비통(悲痛)함이 잔뜩 낀 얼굴로 먹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 * *
바깥세상이 비고의 일로 어수선할 무렵.
통로에 갇혀 세상과 고립된 송운은 비록 죽을 뻔한 위기를 넘겼으나, 무황 비서를 펼치며 쏟아져 들어온 무공이 무언가 엄청나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결코 단순한 무공이 아니다. 많은 무인이 그토록 탐내할 만큼의 가치가 있어.’
엄청난 정신력을 가진 이가 아니라면 무공을 처음 받아들일 때 오는 심마의 경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을 확률이 훨씬 높았으나, 이를 이겨만 낸다면 어쩌면 송운이 익힌 천의선천기공을 뛰어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천의선천기공이 결코 모자란 무공이라는 것은 아니다.
선천지기를 불려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오감을 상승시키고 모든 점을 선으로 이어 애초에 기초가 서로 다른 무공을 하나로 엮어 합쳐놓으니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천의선천지기를 익힌 덕에 선천기폭이라는 새로운 무공을 창조해 내지 않았던가?
다만, 이건 또 다른 의미에서 무황 비서는 대단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법칙을 무시하고, 시간과 공간을 이용하여 도약하는.
즉, 현재 무림에서도 거의 전설로 통하는 축지법(縮地法)조차도 뛰어넘어 설 수 있는 일종의 초능(超能)과도 같은 힘이라 볼 수 있다. 아니, 실상 축지법만 하더라도 먼 거리를 단숨에 줄여 그곳까지 도달하는 것인데, 이 무공이 실현될 수만 있다면 작금의 무림에 송운을 따라올 자는 없을 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 자꾸만 송운은 호기심이 생기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
‘한데, 이것이 과연 실제로 가능할 수 있을지가 의문스럽구나.’
과연 이 무공이 진정 사람이 행할 수 있을까 싶은 의문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 그 의문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떠다니는 문구에 대한 흐름과 계속해서 떠오르는 동작들은 왠지 송운이 이 무공을 실제로 펼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확신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허상이긴 하였으나, 그 무공을 펼치는 모습이 직접 눈앞에서 펼쳐지지 않았던가?
송운은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히 느껴지고 있었다.
‘도무지 그때의 감각이 잊히질 않는구나.’
송운은 두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한번 시도라도 해 볼까?’
오랜 망설임으로 주저하던 송운이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차피 이곳에 갇힌 것 뭐라도 해보자는 심상이었다.
해본다고 손해를 볼 것까지는 없을 거라는 판단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무인이라 한들 제대로 된 식사를 한 지 어림잡아 하루가 지났다. 하여 배가 고파 되도록 움직이는 걸 자제하고 싶었지만, 왠지 뭐라도 하지 않는다면 정말 이곳에서 굶어 죽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저러한 생각은 모두 접은 채, 송운은 조심스럽게 머릿속에서 문구를 떠올렸다.
굳이 어렵게 머리를 쥐어짤 필요도 없었다.
‘허허……. 믿기지 않을 만큼 너무도 선명하게 떠오르는구나. 일순간 보았던 동작들마저도 모두 다. 마치 수십 년 동안 내가 해왔던 것처럼 익숙해서 놀라울 지경이구나.’
그렇게 송운은 차례대로 떠오르는 문구를 입으로 소리 내어 읊기 시작했다.
* * *
“제시공존 공시존해.”
뭐라 외울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입에서 흘러나가는 첫 문구를 읊고 나자 그에 따라 이번엔 몸마저도 자연스레 송운의 발걸음이 옮겨진다.
이때부터 이미 송운은 무언가 이상한 기류가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처음 무황 비서를 펼쳐보았을 때처럼 무언가 한 번에 훅 들어오는 그런 느낌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비슷했다.
하나 멈추지 않았다.
‘단 첫발일 뿐이거늘, 마치 세상이 휘청 이는 것 같은 느낌이군.’
가만히 서서 발만 내디딘 것뿐인데, 통로 내부가 뒤흔들리며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송운의 온몸을 타고 느껴졌다.
으득.
여기서 멈출 수 없다는 듯, 이를 악다문 채 송운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내력의 운행 법을 그대로 하나하나 짚어가며 그대로 따라갔다.
그렇게 간신히 흐트러지려는 몸과 마음을 붙잡은 송운은 또 한걸음 발을 내디딘다.
“즉시공간.”
두 번째 걸음.
‘이젠 좀 괜찮은 건가?’
그렇게 발이 땅에 닿을 때 즈음.
그 느낌에 익숙해진 것일까?
잠시 울렁이던 느낌이 진정되는 듯 보였다.
하나 그것은 송운의 오판이었다.
이번엔 첫 번째 걸음보다 더 심하게 정신이 까마득해지면서 느낌만이 아닌 실제로 몸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안 돼……!’
하나 송운의 간곡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몸과 정신이 견뎌내질 못하면서 제자리에 쓰러졌다.
“우웨에에엑! 커어억. 컥…… 웨엑!”
그와 동시에 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역겨움과 메스꺼움에 참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고 멈출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마치 몸에 있는 모든 걸 내뱉기라도 할 것처럼.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위액의 역한 냄새는 송운의 비위를 더욱더 자극시키고 있었다.
‘이, 이런…… 개 같…….’
“우웨엑!”
이미 한 번 게워 낼 만큼 게워 낸 송운이다.
정신을 차리고 얼마 되지 않아 연달아 다시 게워 내려 하니 이젠 이것 때문에 죽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문구 한 소절을 읊으며 단 두 걸음을 내디뎠을 뿐인데, 어째서인지 풍족했던 체력이 급격하게 하락하고 있었다.
‘대체……. 대체 무엇 때문…… 인…….’
툭.
그렇게 밑바닥까지 체력을 모두 소진한 송운이 또 한 번 정신을 잃었다.
* * *
번쩍!
“으윽……. 허억!”
다시 눈을 뜬 송운은 여전히 자신이 통로 내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같은 상황의 반복이었다.
‘후우. 또 내가 정신을 잃은 것인가?’
정신을 잃었다는 것을 자각하고 난 후, 자신이 알 수 없는 무황의 무공을 연마하려다 쓰러진 기억이 떠올랐다.
부르르.
그 끔찍한 기억에 온몸에 소름이 끼친 송운은 몸을 떨며 몸서리쳤다.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다. 또 한 번 시도했다가는 이번엔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구나. 하나…….’
왠지 모르게 탐이 났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무공이라 하였다.
이 통로가 어디에 붙어있는지, 얼마나 두터운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 송운 스스로 가진 힘만으로는 탈출할 수 없다.
다시 펼친다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었으나, 어쩌면 이 무공을 익히는 것이 작금의 자신에게 유일한 희망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동시에 교차했다.
‘이거 참……. 진퇴양난이로군. 후우.’
송운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상황에 있어서 그에게 가장 큰 것은 고독보다는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가능성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살아 나갈 확률은 일 할조차도 없다. 어떻게 해서든 나가야만 하지 않겠는가? 밖에선 가족들과 장인어른, 그리고…… 란 매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터인데.’
송운은 점점 고민이 깊어졌다.
그리고 고민이 깊어질수록 송운의 표정에 점점 어둠이 드리운다.
돌아가는 시간이 늦어질수록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는 이곳에선 자신도 버티기 힘들 테지만, 가족들의 걱정은 태산이 될 터다.
전생에도 집을 나가면서 부모님께 평생 큰 걱정거리를 안겨드리지 않았던가?
적어도 이번 생에서만큼은 그런 불효는 절대로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벌떡.
송운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결단을 내린 것이다.
‘모르겠다. 어차피 이리 된 것, 배가 고파 죽나 무공을 익히다 죽나 둘 중 하나겠지. 아니! 반드시 살아서 집으로 돌아간다.’
눈을 부릅뜬 채, 송운이 마지막 온 힘을 쥐어짜 내기 시작했다.
* * *
송운은 천천히 마음을 가다듬으며 호흡을 조절해 나가기 시작했다.
‘천천히 하자. 이번엔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된다.’
“후읍!…… 후우.”
마지막으로 크게 숨을 한번 들이 내쉰 송운은 아까와 같이 문구를 읊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까와는 조금 다르게 마음속으로는 그 문구에 대해 뜻을 풀며 새겨나간다.
“제시공존 공시존해.”
‘모든 시간 속에는 공간이 존재하며 공간이 존재하는 한, 시간 또한 존재한다.’
동시에 첫 번째 걸음을 내디뎠다.
‘역시 여기까진 아직 수월하구나. 이제부터가 진짜겠지. 정신 차리자 운아.’
송운은 이전에 겪었던 기억을 되살리며,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자칫하면 아까와 똑같은 상황이 반복될 터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죽을 거란 각오로 해야 한다.’
송운이 긴장되었는지 어느새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후우…….”
‘머뭇거려선 안 된다. 그런 건 느낄 틈새도 없게끔 빠르게 앞으로 치고 나아간다.’
송운이 마침내 두려워했던 두 번째 발을 내디디며 문구를 읊었다.
“즉시공간.”
‘그것이 바로 시공간이리니.’
얼마나 긴장한 것일까?
한 손에는 검을, 다른 한 손은 주먹을 불끈 쥔 송운의 두 손이 모두 새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크윽!’
휘청.
머리가 윙윙거리며 울리고 속이 메스꺼워지면서 또다시 세상이 빙빙 도는 것만 같은 기분에 송운의 몸이 또다시 휘청거렸다.
‘이겨내야…… 해. 이번엔 절대 여기서 쓰러지면 안 된다!’
송운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 과정을 버틸 수 있는 건 이번, 단 한 번뿐이라는 것을.
그랬기에 아까와 똑같은 고통이 그의 온몸을 엄습해 왔지만, 이번만큼은 송운도 절대 양보하지 않겠다는 듯 이를 악물고 마지막으로 온몸에 있는 힘을 쥐어짜 내며 버텨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