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화
‘그럼 대체 저 기이한 현상은 무엇이란 말이냐?’
시각적 감각을 초월하는 그 모습에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속도는 송운에게 혼동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그러던 그때, 이번엔 한술 더 떠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환영의 남자가 자신의 눈앞에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순간 송운이 팔을 뻗었으나, 허사였다.
스윽!
휘잉.
송운이 미처 팔을 뻗기도 전에 이미 한참 더 앞서나간 채로 그의 뒤편까지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잡힐 듯 잡히지 않은 그 신형을 본 송운은 오히려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영문을 알 수 없던 송운의 시선이 지금 자신이 겪은 이 모든 일의 근원지인 무황 비서를 향했다.
‘대체 저것이 무엇이기에?’
송운은 처음에 일었던 호기심과는 다른 종류의 호기심이 또다시 들었다.
혹시나 또 시 그 고통을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보다는 제대로 보지 못한 무황 비서의 내용이 궁금하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딱, 딱 한 번만 더…….’
사락.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송운은 다시 한번 무황 비서의 첫 장을 펼쳤고, 자신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 * *
‘아무 일이 없어?’
순간 두 눈을 감았던 송운은 아무런 반응이 없음에 조심스레 눈을 떴다.
그리고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이건……?!’
놀랍게도 새하얀 속지를 빛내며 아무런 글자 하나 적혀있지 않은 빈 책이었기 때문이다.
꿀꺽.
그 모습에 놀란 송운은 혀로 입술을 한번 핥은 후, 마른침을 삼켰다.
‘어쩌면…… 이것이 해남마제를 광기에 물들어 미치게 했을지도 모르겠구나.’
책을 열어보는 것과 동시에 엄청난 양의 정보가 한꺼번에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그렇다는 건 사도영또한 이 책을 열어보았다면 그 역시 자신이 느낀 이 현상을 마찬가지로 겪었다는 소리였다.
아무리 무공으로서 대단한 자일지언정, 이 정도로 급격하게 방대한 정보가 유입된다면 사람이 미치지 않는다는 게 이상할 정도였으니…….
해남마제의 이상한 행동이 왠지 이해가 가는 시점이었다.
‘으음, 나 역시 전생에서부터 살아오면서 쌓아둔 정신력이 아니었다면 정신력이 무너지면서 심마에 빠질 뻔하였구나. 만일 그리되었다면…… 나 또한 해남마제와 같이 광기에 휩싸였을지도 모르겠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송운의 등 뒤로 오싹한 소름이 돋아 올랐다.
턱.
“조금 더 신중해져야 할 필요성이 있겠구나.”
송운은 펼쳤던 무황 비서를 닫으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第十二章. 시공검
평서란과 평목단, 곽철우는 우선 각자의 갈 길이 달랐기에 중간 지점에서 짧은 작별 인사를 한 채 서로 갈라졌다.
평목단과 평서란은 황궁으로, 곽철우는 무림맹으로 각기 돌아가 지금의 현 상황을 보고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본 임무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해야 할 가장 첫 번째 일이었다.
평서란과 평목단도 그랬지만, 곽철우도 많은 이들의 죽음을 함께 보았다. 그런 만큼 더더욱 그들의 작별은 긴말 없이 짧게 이어졌다.
양측 모두 많은 걸 잃은 것에 비해 얻은 건 없었다.
그야말로 무의미한 싸움이었다.
* * *
황궁 태화전 내부.
여러 명의 신하들이 기대에 어린 눈빛으로 이제 막 황궁에 도착한 평목단과 평서란에게 주목했다.
그 신하들 사이에는 송악 또한 함께 있었다.
하나, 그런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결과는 처참했다.
“같이 간, 이들은 모두 어찌 되었소? 무경은 찾은 것이오?”
황제의 물음에 잠시간 침묵을 지키던 평목단이 굳게 닫혔던 입을 열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갑작스레 비고가 무너지면서 무경을 찾지 못한 채 빈손으로 돌아왔나이다.”
쿵.
평목단이 고개를 땅바닥에 처박으며 말을 이었다.
“또한, 이미 비고 내에 들어가 있던 천마와 해남마제를 마주치며 병력을 모두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황제 폐하의 소중한 백성을 잃은 죄! 이 또한 소신의 불충(不忠)이오니 죽여주시옵소서. 폐하!”
웅성웅성.
구천악과 사도영을 직접 마주쳤다는 평목단의 말에 순식간에 태화전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황제가 그런 평목단의 모습에 조용히 눈을 감고선 턱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깊은 고뇌에 빠졌다.
“으음……. 경들은 모두 조용히 하시오.”
황제의 단 한마디에 순식간에 태화전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해졌고, 황제 또한 잠시 침묵에 빠졌다.
길고 긴 침묵에 모두가 조급함을 느낄 때 즈음.
황제가 입을 열었다.
“하면 그대들을 제외하고 살아남은 이는 더 없는 것이오?”
“……송구하오나 그렇사옵니다. 다만…….”
“다만?”
“송 부 대주가 마지막까지 남아 아직 돌아오지 못했으나, 곧 살아 돌아올 것입니다.”
‘아…….’
그 말에 조용히, 그리고 차분히 듣고 있던 송악의 눈빛이 흔들린다.
하나 이곳은 태화전, 황제의 앞이다.
보는 눈이 많아 간신히 버티고 서 있는 그의 모습이 위태위태해 보였다.
보이지 않는 아들의 모습에 겉으로 티를 내고 있진 않았지만 그 역시 몹시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중 같이 갔던 친우의 입에서 아들의 이름이 흘러나온 것이다.
“알겠소. 평 도독. 그리고 평 부 대주. 몰골들이 다들 말이 아니구려. 몹시 피곤할 터인데 오늘은 이만 들어가서 푹 쉬고 조만간 다시 재개하도록 하겠소. 고생하셨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황제 폐하!”
잠시 동안이었으나 억겁과도 같았던 시간이 흐르고, 황제와 신하들 모두가 자리를 물러나고 나서야 평목단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송악에게 다가갔다.
“……우선 자리를 옮김세.”
* * *
둘의 집무실로 자리를 옮긴 평목단과 송악은 뜨거운 찻물이 차갑게 식을 때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미안하네.”
차갑게 식은 차처럼 차갑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먼저 입을 뗀 것은 평목단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가?”
“……비고가 무너지기 시작했고, 해남마제가 우릴 가로막았네. 결코 안 된다며 끝까지 말렸으나, 운이가 우리가 있던 곳을 갈라버렸네. 반드시 살아 돌아오겠다고 약조하였으나……. 정말 미안하네. 면목이 없어. 내 어찌 자네를……. 미안하네. 크흑.”
쨍그랑!
“악이!”
“나는……. 괜찮네.”
송악이 들고 있던 찻잔을 쥔 손에 힘이 풀리며 바닥으로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져나갔고 평목단이 그를 부축하려 하였으나 괜찮다며 손짓했다.
“차라리 나를 원망하게. 정말 자네를 볼 면목이 없으이.”
송악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으나, 애써 진정시키고 있었다. 자꾸만 흘러내리려 하는 눈물을 억지로 꾸역꾸역 삼키며 말을 내뱉었다.
지금 눈물을 보인다면 왠지 아들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송운을 믿는다.
그리고 그런 아들이 결정한 일이기에 아들이 구해낸 자신의 친구 또한 원망하지 않는다.
“후우우……. 내, 내 어찌 자네를 원망하겠는가? ……내 아들이 선택한 일일세. 그만한 사정이 충분히 있었을 터고. 자네와 서란이가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아니 운이가 돌아오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내 아들은 반드시 돌아올 걸세. 믿고, 또 믿고 기다린다면! 반드시 돌아올 걸세. 그러니……. 그런 표정은 짓지 말게.”
“악이……!”
평목단의 예상은 들어맞았고, 역시나 송악은 슬픔을 굳게 짓누르고 있었다.
“나는 내 아들을 믿는다네. 믿고, 또 믿고. 그렇게 기다리도록 함세.”
송악의 눈가엔 송운을 향한 강한 믿음이 새겨져 있었다.
* * *
평목단과 평서란이 황궁에 도착하였을 무렵, 곽철우 또한 무림맹으로 빠르게 걸음을 향하고 있었다.
지친 몸이었으나,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무림맹주와 모두를 생각하면 서둘러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점점 더 빨라졌다.
무림맹 측에서 파견되었던 이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로서 꼭 해야 할 일이었다.
발걸음을 서두른 덕에 예상보다 빨리 도착한 곽철우는 곧바로 무림맹 본단으로 향했고, 그를 알아본 문지기들이 문을 열었다.
“화산파의 곽철우, 무림맹 맹주님을 뵙습니다.”
직감적으로 예감을 한 것일까?
백능은 여전히 흰 백발과 수염을 쓰다듬으며 서 있었으나, 평소와는 달리 그의 입가엔 인자한 미소는 사라지고 북해의 얼음처럼 안면이 굳어있었다.
곁에 서 있는 제갈염의 표정도 그다지 좋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다.
“어찌 되었느냐?”
“……송구합니다. 무경은 가져오지 못하였습니다. 하나, 그 누구도 가져가진 못할 겁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더냐?”
“무경은 해남마제의 손에 들어갔었습니다.”
“……!”
잠시 놀라는 표정의 백능이었으나, 이내 침착하게 곽철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말에는 들어간 것이 아니라 들어갔었다는 과거형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무경을 얻은 해남마제와 그 사실을 안 천마가 대적했고, 그때엔 이미 비고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하여 우선은 비고를 빠져나가는 쪽으로 돌렸으나……. 천마가 그대로 도주했고, 그의 시선이 저희 쪽으로 쏠리더군요.”
“그래서?”
“……황궁 무인 중 한 명인 송 소협이 남은 저희를 내보내고 홀로 해남마제와 맞섰습니다. 아마도…… 비고와 함께 다시 묻혔을 겁니다. 맹주님.”
곽철우의 말에 백능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허허……. 송운이라는 아이 말인가? 나머지를 위해 홀로 희생을 감당하였다는 말이로구나.”
그 역시 송운을 알고 있었다.
지난번 마교 토벌 때의 일을 그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능이 참으로 안타깝다는 시선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천마와 해남마제를 상대하기엔 너무도 역부족하였습니다. 갑작스레 비고가 무너지지만 않았더라면……. 뵐 면목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곽철우가 말끝을 흐리자, 백능이 재촉했다.
또다시 불안한 기운이 그를 엄습해왔다.
그리고 어김없이, 그의 직감은 들어맞았다.
“당 단주께서……. 명을 다하셨습니다. 무너지는 비고 속에서 차마 빠져나오지 못하시어…….”
“허어……!”
“허……!”
이를 듣고 있던 백능과 제갈염의 입에서 동시에 탄식의 소리가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