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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전생-94화 (94/275)

제94화

만일 그도 당헌기나 사도영처럼 욕심을 부렸다면 저곳에 싸늘한 주검으로 평생 묻혔으리라.

천마는 무공서를 얻지 못하였다는 아쉬움보다는 목숨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감이 더 큰 듯했다.

미련을 떨쳐낸 구천악은 표정을 찡그리며 남은 자신의 병력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빠르게 돌아간다!”

“예, 주군!”

* * *

들어오기 전 보았던 통로는 들어와서 보니 그의 짐작보다 훨씬 더 넓어 보였다.

‘이 리보다는 훨씬 더 길어 보이는군.’

툭.

끝에 다다랐는지 벽이 송운을 가로막았다.

비록 사방이 어두워 시력으로 볼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으나 대략 계산해 본 결과, 끝에서부터 끝까지 걷는 데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들어오기 전, 육안으로 확인한 결과였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흔한 동굴의 이끼조차도 송운이 인위적으로 벽을 뚫어 만들어놓은 통로였기에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때였다.

후우웅.

‘음?’

끝에서 끝까지 걷던 송운의 오감에 무언가 감지된 것이다. 미세하나마 들려온 소리는 분명 좁은 구멍을 타고 흘러나오는 바람 소리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이었지만, 송운은 오감에 신경을 곤두세운 채 벽을 천천히 짚어 나갔다.

‘조금만, 조금만 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송운은 바람이 어디서 새어 들어오는지 알 수 있었다.

‘여기였나.’

피식.

송운은 마침내 찾은 그것에 대해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많은 양의 바람은 아니었지만, 작금의 송운에겐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틈새를 통해 바깥의 바람이 유입되고 있다는 사실은 작금의 송운에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혹여나 무너지기 직전에 많은 공기가 남아 있었을 수도 있었기에 필사적으로 찾아 헤맨 것이었다. 그러한 것을 찾았으니 굳어있던 송운에게 희망을 찾아준 것이다.

외부의 공기가 유입되고 있다는 것은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기본 조건이 충족된다는 뜻이었다.

물론 물 한 방울도 먹을 것도 없는 동굴 속이었지만, 그런 것 정도는 없어도 한동안은 버틸 수 있다.

하나 공기가 없다면 인간은 단 일 분조차도 제대로 버텨낼 수 있는 재간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공기는 생명이고, 송운에겐 새로운 희망이었다.

‘나갈 수 있다.’

캄캄하던 앞길에 빛이 새어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 * *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구멍을 찾은 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여전히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 시간의 흐름을 잘 알진 못했으나 슬슬 송운의 시야가 어둠에 적응해나갈 무렵.

‘좋아, 이젠 제법 내력도 많이 되돌아왔구나.’

가부좌를 튼 채, 내공심법을 돌리던 송운은 여러 번의 격전에 소모되었던 내공들 또한 어느 정도 다시 회복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번쩍.

감았던 눈을 뜨니 보이지 않았던 내부가 송운의 눈에 들어온다.

내력이 돌아온 덕분에 안정된 시야와 오감의 상승까지 더해져 처음 들어왔을 때에 비해 훨씬 어둠 속에서도 잘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몸 좀 천천히 풀어볼까?’

가부좌를 풀고선 몸을 일으킨 송운은 때마침, 답답함에 잠시 벗어두었던 웃통 속에 끼워져 있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무황 비서라……. 이게 대체 뭐라고 이 사달이 났단 말인가? 허허…….’

송운이 속으로 헛웃음을 삼키며 천천히 책을 집어 들었다.

일반 서책들과 별반 다름없는 평범한 외관이었다.

어쩌면 무공서라는 게 당연히 겉면은 그럴 터나, 너무나도 평범하여 화가 날 정도였다.

‘이 서책 하나 얻겠다고 이리 수많은 생명들이 희생되어야 했다니……. 아무리 무황이 만든 무공이라 하나 너무도 허황되고 또 허무하구나.’

그때, 문득 송운의 뇌리에 죽는 순간까지 이 책을 지키려 했던 사도영의 모습이 떠올랐다.

워낙 순식간에 지나간 일이라 자신이 죽는 줄도 몰랐을 사도영이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끝끝내 놓지 못했던.

그리고 모든 이들이 그토록 원했던 무황 비서의 내용이 궁금해졌다.

‘어차피 내 손에 들어온 거 내용 정도 읽어본다고 해서 나쁠 건 없겠지.’

일이 터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순간의 안일한 생각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 채, 책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 송운이 책을 펼쳤다.

‘이건……?’

가장 맨 앞 장을 펼친 송운의 머릿속으로 순식간에 무언가 들어오는 듯싶더니 정신이 어지럽게 윙윙대며 어느 순간에 다라서는 휙 돌아버린 것이다.

‘뭔가 잘못되었다.’라는 생각이 동시에 송운을 강타했으나, 그것을 깨닫기엔 이미 너무 늦어있었다.

“커헉…… 크, 크아아아악!”

둥그렇게 파인 통로가 마치 빙빙 도는 것과도 같은 모습에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엄청난 수의 글자와 그림이 송운의 머릿속으로 파고들어 왔다.

순식간에 들어오는 탓에 막아볼 틈 따위도 존재하지 않았다.

‘안…… 안 된다. 어서 막아야……!’

봇물 터지듯 들어오는 정보의 양이 너무도 방대하여, 받아들이다 못해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으나, 이상하게도 끝도 없이 들어오는 정보는 모두 꾸역꾸역 송운의 머릿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계속되는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을 때,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나자 잠시 익숙해지는가 싶더니 곧바로 송운의 온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덜덜덜.

‘……추, 추운 건가? 커헉……!’

하나 추운 건 아니었다.

지금 비록 자신의 정신이 완벽히 제정신이라 판단하긴 어려웠지만, 결코 추위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애초에 바람조차도 아주 작은 구멍으로 들어오는 곳이니 그럴 리 없다. 몸과 정신이 견디질 못하니 한계를 뛰어넘어 떨려오는 쪽이 차라리 더 가까웠다.

‘제발…… 제발 그만……!’

멈추길 바라는 송운의 간절한 소망은 정보의 소용돌이 속에 묻혔다. 곧 속이 메스꺼워지면서 어지러워졌고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눈이 충혈되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우웨에에엑!”

무언가가 식도를 타고 넘어간 게 반나절이 지난 지 오래다. 먹은 게 위로 올라올 리는 없었으나, 이를 대신하여 헛구역질과 쓰디쓴 위액이 그의 목울대를 타고 꾸역꾸역 올라온다.

“……끄아아아아악!”

송운은 계속해서 이는 미칠 듯한 고통에 당장 정신을 놓아버리고 싶을 정도였으나,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울고불고 절로 나오는 비명 소리는 갇힌 통로를 타고 울려 나갔다.

‘놓고 싶…… 다. 제발 날……!’

한참을 끔찍한 고통 속에 몸부림치던 송운이 이젠 정말 죽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 무렵.

번쩍!

송운의 눈이 돌변했다.

‘……갖고 싶다. 이 모든 지식을……. 전부……!’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만 같은 최악의 고통 속에서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그 수많은 내용들이 너무도 탐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의식을 놓고 싶은 마음과 그걸 모조리 자신의 것으로 갖고 싶다는 송운의 두 마음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은…… 안 돼……!’

‘아니다 송운아. 넌 가질 수 있다.’

한참을 치고받고 싸우는 듯 보이던 두 개의 마음은 결국 탐이 많던 쪽이 이겼는지 점점 희미해져 가던 송운의 의식이 다시 또렷해지면서 한 마리의 배고픈 아귀(餓鬼)가 된 것마냥 미친 듯이 지식을 흡수하고,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더…… 더 많은 걸 원해……!’

번쩍!

송운의 두 눈이 어둠 속에서 붉게 빛났다.

* * *

“헉, 허억……!”

한참 동안 정신을 잃었던 송운은 눈을 뜨고서야 캄캄한 어둠이 자신을 반겼고, 자신이 아직 통로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후우……. 꿈인가? 참으로 지독한 꿈이다. 두 번 다신 꾸고 싶지 않은 꿈이로구나.’

잠시 한숨을 내 쉰 송운은 얼마나 그 고통이 컸는지 너무도 생생하여 식은땀으로 잔뜩 젖은 이마를 닦기 위해 왼손을 들어 머리로 갖다 대려 하였으나, 몸에 아무런 기운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꿈이 생생해서 그런지 몸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인가?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군.’

하나, 이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결과일 뿐.

당연한 것이다.

아니,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

‘아니다. 틀렸다! 꿈이 아니야. 설마…… 그 모든 것이 정녕 꿈이 아니었단 말인가?’

이내 송운의 머릿속을 무언가 크게 강타했기 때문이다.

송운은 순간 드는 생각에 오싹함이 온몸을 한 바퀴 타고 흘러내렸다.

단순히 꿈에서 느낀 것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하나 알 수 없는 문구들이 송운의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제시공존 공시존해 (諸時空存 空時存偕) 즉시공간(卽視空間). 자존형시 각동시괴 (自存’形時 覺同時壞)라!’

이는 모두 꿈속에서 정신을 놓기 전까지 거의 무아지경의 상태에 이른 자신의 정신이 먹어 치운 문구들이었다.

한데, 꿈이 아닌 현실에서 이루어진 것들이라니!

너무도 자연스럽게 읽혔고, 어느새 그것들이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송운은 그 사실에 더욱 놀랐다.

“……모든 시간 속에는 공간이 존재하며 공간이 존재하는 한, 시간 또한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시공간이리니. 네가 존재하는 곳 또한 시간에 의해 형성된 것이며 그것을 깨닫는 동시에 시간과 공간의 경계는 무너질 것이다…….”

송운이 문구들을 따라 읊으며 해석을 해나가자, 이번엔 그림들로 그려진 복잡한 동작들이 그의 머릿속을 채워나간다.

하나 송운의 머릿속에 그려져 나갈 때엔 이미 그것은 그림이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듯 부드럽게 이어지는 동작들은 느릿하게 움직여지는 보폭이 첫 번째 걸음을 떼었다.

‘그리고…….’

꿀꺽.

두 번째 걸음과 세 번째 걸음이 옮겨지는 순간, 평범해 보이는 횡 베기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송운의 두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부웅.

‘어째서지……? 분명 느리게 지나갔거늘!’

첫 번째와 세 번째 걸음까지 가는 데는 매우 느리게 지나가는 것 같이 보여졌으나, 어째서인지 송운 스스로 느끼기에는 엄청나게 빠르게 지나간 듯 느껴진 것이다.

이 알 수 없는 묘한 모습에 송운은 넋이 나간 듯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느리게 보이는 것은 속임수였나?’

송운은 고개를 내저었다.

결론은 아니었다.

분명 느리게 지나간 것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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