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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전생-86화 (86/275)

제86화

‘아버지는 운 가가 도울 거야. 믿어. 믿자. 난 이곳을 막는다.’

마음을 다스린 평서란이 천천히 한 글자씩 입을 떼었다.

“……이곳을 지나가려거든 나부터 죽이고 지나가야 할 거다.”

낮게 가라앉은 평서란의 목소리와 분위기가 바뀌었다.

눈앞에서 아버지가 당하고 있는데 멀쩡한 자식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애써 침착한 모습을 보이곤 있으나, 속으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는 평서란이다.

당장에라도 살을 에어 낼 듯 몰아치는 그녀의 살기가 무겁게 공기를 짓눌렀다.

그런 평서란의 모습에 여인임을 알면서도 다가갈 수 없는 무언의 기운이 감돈다.

꿀꺽.

마치 먼 옛날 고대의 장판교(長坂橋) 전투에서 조자룡(趙子龍)을 돕기 위해 조조(曹操)의 대군을 홀로 막아섰던 장비의 모습을 보는 듯한 모습에 해남파 무인들이 잠시 주춤거렸다.

“뭣들 하는 게냐? 어서 싸우지 않고?”

하나 결국 자신들의 장문인인 사도영의 명령이 더 우선이었는지 재차 들려온 그의 목소리에 해남파 무인들이 평서란과 곽철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타핫!”

‘모두 살아 돌아가지 못하게 만들어주지.’

해남파 무인들이 움직임과 동시에 평서란의 검이 그들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가볍고 경쾌하면서도 빠른 검으로 응수해나갔고, 곧 하나둘씩 그녀의 검에 나가떨어지기 시작했다.

“……!?”

잠시 그녀의 기세에 억눌려 일으킨 공포라 생각했거늘, 예상과는 달리 평서란의 검 끝에는 자비가 없었다.

평목단과 송운의 무위만큼은 아니었으나, 그녀 또한 훗날의 구주칠대무신의 반열에 오르는 여 무재다.

강한 힘이 실려 있지는 않으나, 그녀만의 방식으로 빠르고 강하게 성장해온 평서란이다.

그녀를 얕본 대가는 그들의 목숨 줄이었다.

평서란이 휘두른 손짓 한 번만으로도 여럿의 목숨이 지면으로 곤두박질쳤다.

“크아악!”

“컥……쿨럭!”

평서란의 드높은 무위에 덤비는 이들 족족히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에 놀란 것은 해남파 무인들만이 아니었다.

‘참으로 놀라운 여인이로다.’

처음으로 보는 그녀의 무위는 같이 싸워나가고 있던 곽철우 또한 감탄을 자아냈다. 곽철우 스스로 보아도 돕기보다는 그녀를 뒷받침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평 도독의 하나뿐인 무남독녀라더니, 그 실력이 만만치가 않군. 아버지의 피를 그대로 이어받은 건가?’

자신이 봐왔던 이들 중 몇 되지 않는 실력자였다.

비록 무림에는 그다지 알려진 정보는 없었으나, 오룡일봉으로 불리는 그로서도 후기지수들과 맞붙는다면 평서란이 승기를 잡을 것이라 말하는 게 과언이 아닐 만큼의 실력이었다.

아직 젊은 그들이다.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까지 합하여 본다면 그 가치는 결코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황궁에 대단한 무인들이 모였구나.’

곽철우는 입가에 조금 쓴웃음을 머금었다.

* * *

평서란과 곽철우가 해남파의 무인들이 방해하는 것을 막고 있는 사이 송운은 약간의 부상을 입은 평목단에게로 다가가 서둘러 그를 부축했다.

“장인어른! 괜찮으십니까?”

“나는 괜찮다. 살짝 스친 것뿐이니……. 것보다 아까 보았을 때부터 느꼈으나, 놈의 기세가 만만치 않구나.”

평목단은 여전히 기분 나쁘게 웃고 있는 사도영을 향해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마왕 한 명을 단 한 방에 죽음으로 몰고 간 자입니다. 최대한 약점을 노려야…….”

하나 송운이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사도영이 검을 날려 왔다.

다만, 이전과는 달리 그가 계속 가만히 있을 거라는 기대는 버린 지 오래였기에 당황하지 않고 무섭게 날아오는 검들을 피했다.

콰앙!

검을 피하면서도 송운은 속으로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단 한 번의 실수만으로도 큰 부상, 아니 어쩌면 목숨을 내주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송운의 온몸에 긴장감을 더했다.

‘장인어른보다 두 배. 아니 세 배 이상의 실력을 갖춘 놈이다. 이쪽이 둘이라곤 하나 놈을 이기는 건 역시 쉽지 않을 터. 게다가 장인어른께서는 약간이라곤 하시지만 제법 큰 부상도 입으셨으니, 내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

그런 송운의 모습에 사도영의 입가에 냉소가 퍼지며 입을 열었다.

자신의 것인지 아닌지 모를 피를 뒤집어쓴 채, 웃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지옥에서 막 뛰쳐나온 사신과도 같았다.

광기로 물든 그의 눈빛은 송운을 향했고, 이내 미친 사람처럼 크게 소릴 내며 웃기 시작했다.

“큭큭……. 크하하하하! 쥐새끼마냥 잘 피해 가는구나. 하나 이번엔 내 필히 네 목숨을 취하도록 하마.”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도영의 다섯 개의 검 날이 허공을 날아 송운을 향해 날아들었다.

쌔애액!

카아앙!

아슬아슬하게 검을 받아친 송운은 이를 꽉 깨물며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날아오는 사도영의 검을 쳐내거나 피하기만을 반복했다.

‘그래도 어쩌면 조금은……. 조금은 해 볼 법하겠구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도영이 제법 상처를 입은 덕에 그날 자신이 보았던 무위보다는 조금 뒤떨어진다는 것과 부상을 조금 입기는 했으나 평목단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둘이 힘을 합쳐 놈에게도 조금씩 피해를 입힐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것도 승기를 잡을 만큼의 것은 아니었다.

구천악과의 교전(交戰)에서 입은 듯 보이는 부상에 꽤나 지쳐 보이는 모습이었으나 여전히 그의 검은 빨랐다.

고공에서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네 개의 검은 송운의 정신을 어지럽히며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와 같았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는 순간엔 놈의 검에 심장이 꿰뚫릴 판이었다.

“허억……. 후우…….”

“역시 애송인가? 벌써부터 그리 지쳐하면 내가 너무 쉽지 않느냐. 큭큭.”

계속해서 사도영이 송운을 도발했으나, 그 어지러운 검풍(劍風) 속에서 날아오는 검들을 바라보며 그 흐름을 읽으려 노력했다.

‘어차피 지금의 내 실력으론 사도영의 기묘한 검술에는 통하지 않는다. 지금처럼 조금씩 갉아먹는 것 또한 결국 한계가 올 터.’

송운이 검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쥐었다.

겉으로 보기엔 송운이 끼어들면서 평목단이 사도영과 동수(同數)처럼 겨루는 듯 보이겠지만, 그것이 깨어지는 건 한순간이다.

그만큼 사도영의 무위는 만만치 않았다.

‘선천기폭.’

송운은 머릿속으로 선천기폭을 떠올렸다.

애초에 사도영과 싸울 때를 염려하여 스스로 만들어낸 비장의 수가 아니던가?

‘단 한 번의 기회. 그것으로 모든 상황을 끝내야 한다.’

송운의 눈이 마치 야수의 그것처럼 번쩍인다.

아까처럼만 제대로 선천기폭이 먹혀들어 간다면, 승수는 이쪽으로 넘어올 것이다.

그 위력을 알기에 송운은 더욱더 선천기폭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송운이 기회를 노리고 있을 그 시점.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으나, 속으로 사도영은 놀라움과 감탄의 연속이었다.

‘별것 아닌 애송이라고 생각했거늘…….’

지난번 보았을 때와는 달리 눈빛이 변해있다.

마치 먹잇감을 물기 위해 단 한 번의 기회를 노리는 맹수처럼 그 기세가 드세다.

게다가 자신과 평목단 둘이 싸울 때까지만 해도 싸움의 기세는 완벽하게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거늘, 송운이 끼어들면서 완벽하던 자신의 승률이 기울고 있다.

‘어쨌든 귀찮게 된 셈인가?’

무인으로서의 호승심이 들면서도 귀찮은 무언가가 들러붙은 기분은 떨쳐낼 수 없었다.

어쩌면 구천악에게도 지지 않았던 자신이 한낱 애송이 따위에게 승수를 내주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를 엄습할 정도였다.

‘큭. 분명 지난번에 마주쳤을 땐 새끼 여우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이빨을 감춘 새끼 호랑이였던 모양이군.’

그만큼 겉으론 아직까지 여유 만만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으나, 송운의 생각과는 달리 조금씩 위태로워지고 있었다.

사도영 또한 구천악과의 싸움으로 인해 꽤나 많은 상처를 입은 상태다.

그런 상태에서 송운과 평목단의 합공은 생각보다 그에게 제법 많은 피해를 주고 있었다.

사도영의 답답함이 머리끝까지 차오른다.

그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져 가고 있었다.

‘멸혼절명침(滅魂絶命針)만 쓸 수 있다면……!’

단 한 방.

더할 것도 없이 그것 하나면 충분하다.

저 쥐새끼 같은 놈들을 한 방에 없앨 수 있을 것이다.

하나, 사도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기술을 쓰는 걸 망설이고 있었다.

으득.

사도영이 이를 악물었다.

‘벽력탄…….’

바로 아까 전 송운이 보여주었던 벽력탄 때문이었다.

‘도대체 그것을 어찌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것이 터지는 순간, 자신이 날렸던 검은 그 폭발에 못 이겨 넝마 덩어리가 되어버렸고, 쫓아가던 혈운마왕을 단숨에 타버린 시체로 변하게 만든 물건이다.

아무리 무(武)에 미친 사도영이라 한들, 목숨까지 바칠 정도는 아니었다.

사도영, 그 또한 사람이다.

그때 느낀 벽력탄의 위력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만일 또다시 그게 터진다면 이번엔 거리가 가까이 있는 나까지 위험해진다.’

지금 있는 이곳은 공간이 좁고, 미로처럼 길이 이어져 있어 빠르게 도망간다고 하여도 그 여파에서 다 벗어나긴 힘든 지형이다.

계속되는 이성과 본능 사이의 갈등이 그를 어지럽혔다.

‘빌어먹을!’

생각을 하고 또 해봐도 뭔가 명쾌한 해답이 나오질 않자 사도영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애송이라고 생각했던 놈에게 비록 둘이라곤 하나 자신이 자꾸만 밀리는 것 같은 생각에 기분이 더러워진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사도영이 망설이는 사이.

“끄아악!”

그의 귓가로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사도영의 시선이 순간 자신의 수하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고, 평서란과 곽철우를 뚫기는커녕 계속해서 죽어 나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 멍청한 녀석들이!’

뚝.

마침내 사도영이 간신히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이다.

순간적으로 사도영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나며 그의 온몸 주위로 검들과 함께 미세한 준동이 일기 시작했다.

* * *

그런 사도영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은 송운이었다.

‘뭔가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드드드드.

고오오.

사도영의 주변 허공에 떠다니던 기들이 모이기 시작하며 땅이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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