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화
평서란이 조심스레 의견을 내놓았으나, 평목단이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답했다.
“곽 소협의 말대로 그런 길은 전혀 없었다. 아마 사람을 위협하는 별다른 함정은 없어도 이 비고 내에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던 무언가가 있다는 것만은 확실해진 것 같구나.”
‘장인어른께서도 별다른 것은 발견하지 못한 듯한데……. 대체 어찌 된 영문이란 말인가?’
송운과 나머지 세 명은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생각하며 있었을까?
평서란이 또다시 먼저 의견을 내놓았다.
“혹, 비밀 통로 같은 게 있었던 건 아닐까요?”
“음……. 서란이 네 말에도 일리가 있구나. 아마 무언가 비밀 통로를 작동시키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고 우리는 앞만 보고 달려왔으니 보지 못하고 지나친 것일 테지.”
“이제부터라도 유심히 보고 움직이는 것이 좋겠어요. 언제 어떠한 곳에서 누구와 마주치게 될지 모르니까요.”
“그래. 우리가 한 곳으로 달려간다 한들 좀 전처럼 다른 누군가가 비밀 통로를 열고 들어온다면 마주칠 가능성이 더욱 커지겠구나.”
그렇게 한참의 얘기를 나누던 차.
평서란이 무언가 발견한 듯 급하게 손짓해왔다.
“이거, 옆의 벽면과는 뭔가 다르게 생기지 않았나요? 혹시 이게 그 비밀 통로 중 하나 아닐까요?”
평서란의 말대로 셋의 눈동자가 그곳으로 향했고, 그녀의 말대로 벽의 모양과 색깔이 미묘하게나마 달랐다.
그 말을 끝으로 평서란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 벽을 눌렀고 누르자마자 어디선가 굉음이 들려오면서 그 육중한 벽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드드드드드.
쿠웅!
한참을 움직이며 열리기 시작한 벽은 이내 본래 뚫려있던 길을 막아버리면서 새로운 길을 만들어냈다.
“허……!”
“하하…….”
“……큼.”
“풋.”
동시다발적으로 네 명의 입에서는 각기 다른 웃음이 새어 나왔고 그것은 웃겨서 웃는 게 아닌, 어이없음에 튀어나온 허탈한 웃음이었다.
“음……. 이거……. 알고 보니 비밀 통로가 아닌 미로(迷路)였군.”
평목단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고, 그런 그의 말을 송운이 이어받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무경을 찾는 건 둘째치고 나가는 길을 찾는 것도 힘들겠군요.”
“휴우……. 이로써 한 가지는 확실해졌네요. 어떻게 마교인들이 그곳으로 들어온 것인지요.”
네 명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 * *
“이 길만 몇 바퀴째죠?”
“아마도……. 이게 맞는다면 세 바퀴째인 듯싶소.”
송운의 대답에 세 명 모두 허탈한 기분이 온몸을 휘감았다. 계속해서 똑같은 길만을 반복해서 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그저 비슷한 길이라고 생각했으나, 한 바퀴가 지나고 두 바퀴가 될 때 구분을 해두기 위해 지나가던 길에 있던 돌멩이로 표시를 해두었다.
그리고 드디어 세 바퀴가 되는 때.
“휴, 역시나 아까 그 돌멩이 맞는 거…… 같죠?”
평서란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고, 그에 송운이 고개를 주억였다.
“미로가 맞긴 맞나봅니다.”
“한 번 꼬이기 시작한 길이니 들어왔을 때와는 다른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지.”
“아까 그 길 이후로는 별다른 벽 문양은 본 적이 없죠?”
“그런 것 같구나.”
“지금쯤이면 나올 때가 된 것도 같은데…….”
계속해서 똑같은 길만 이어지니 답답해질 만도 했다.
그러던 순간.
곽철우가 외쳤다.
“찾았습니다!”
그 소리에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향했고, 그의 손끝에는 또 다른 벽 문양이 있었다.
“이거…… 누릅니다?”
꿀꺽.
지켜보는 세 명은 물론이요, 누르는 곽철우 또한 긴장했는지 고요해진 분위기 속에 침 삼키는 소리마저 크게 들려왔다.
그러곤 마음의 준비가 되었는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제발…….’
드드드드드.
쿠웅!
또 한 번의 아까와 같은 굉음이 울리면서 벽이 움직였고, 전에 있었던 길을 막아서고선 새로운 길을 만들어냈다.
“설마 이번에 또 길이 반복되는 건 아니겠죠?”
“그러지 않길 바라는 바요.”
“우선 이곳에 계속 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앞으로 나아가보자꾸나.”
* * *
“이번 길은……. 몇 바퀴째죠?”
아까보다 조금 더 지친 듯한 목소리로 물어오는 평서란의 물음에 송운 역시 조금은 지친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체력에 무리가 와서라기보다는 계속 반복되는 길을 돈다는 것에 대한 정신적 소모가 더 컸다.
“지금 돈 것까지 총……. 네 번째구려.”
그렇게 약속이라도 한 것마냥 네 명의 눈앞에는 똑같은 곳에 똑같은 돌멩이가 놓여 있었다.
“허어……. 계속해서 같은 길만 맴돌고 있으니……. 정말 큰 일이로구나. 다른 길을 찾아 나왔더니 또 다른 반복이라니…….”
평목단이 지그시 눈을 감으며 턱을 매만졌다.
이대로라면 정말 무경을 찾기는커녕 미로를 빠져나가는 것조차 힘들어질 터였다.
멈춰버린 상태로 모두가 기운이 빠져갈 때 즈음.
송운이 내려앉은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정신 차리자.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여기까지 오는데 치른 희생과 고생이 모두 헛수고가 되어버리는 것 아닌가?’
“다시 한번 기운을 내보죠. 어차피 이곳에서 지쳐 쓰러진다면 결국 아무것도 이룰 수 있는 게 없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복잡한 미로라 할지언정, 그 끝은 반드시 있을 겁니다.”
그 말을 들은 평목단이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그래. 운이 네 말이 맞구나. 모두 힘을 내보자꾸나.”
평목단 마저 다시 기운을 차리니 곽철우와 평서란도 함께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을까?
아까보다 더 눈에 불을 켜고 찾아 나가던 그때, 또다시 미세하게나마 다른 벽 문양을 발견했다.
“저기, 저쪽 벽. 다른 문양이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먼저 발견한 건 곽철우였다.
“그러네요. 하면……?”
지난번의 실패로 인해 이번에는 선뜻 누르기 망설여졌는지, 말꼬리를 흐리는 곽철우였다.
‘이번 건 뭔가 느낌이 조금 싸늘한데…….’
송운은 왠지 모를 이상한 느낌에 뭔가 머뭇거리게 되었으나, 그런 곽철우를 대신하여 손을 뻗었다.
‘설마 무슨 일이 있으려고. 괜한 기우겠지.’
그러곤 벽을 눌렀다.
드드드드드.
쿠웅!
한데, 이번엔 벽이 움직이면서 갑작스럽게 환한 빛이 비치었다.
불빛에 놀란 송운을 비롯한 세 명의 눈이 감겼다가 떠졌고, 눈이 떠지는 순간. 송운 일행의 눈앞에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 * *
문이 열리자마자 송운 일행을 마주한 이들은 다름 아닌 몸 곳곳에 상처를 입은 사도영과 해남파 무인들이었다.
“호오? 길을 잃은 줄 알았더니 새로운 먹잇감이 나타났군. 잘 만났구나!”
반복되는 길을 피하려다 사도영을 만났으니, 늑대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격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쌔애액!
당황한 송운 일행을 향해 다짜고짜 사도영이 달려들었고, 송운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런 젠장. 진짜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구나!’
흥분한 것인지 피아 구별 따위 없이 사방팔방으로 날아오는 사도영의 검을 가까스로 피해낸 송운이 그대로 땅을 짚고 일어서며 자세를 취했다.
하나 이미 송운이 고개를 들었을 땐 붙어 있던 네 명을 찢어놓은 사도영이 어느새 평목단과 검을 마주 대고 있었다.
허공에서 화려하게 춤을 추듯 날아다니는 사도영의 검들은 급박한 상황에서도 송운에게 감탄을 내뱉게 만들었다.
‘곳곳에 눈으로 보일 만큼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는데도 저 정도의 위력이라니……!’
카가강!
키기기긱!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날아간 사도영의 검들이 평목단의 검과 부딪히며 날카로운 쇠붙이들이 괴성을 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리 부상을 입었다 한들, 사도영은 사도영이다.
곧 지금까지의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마어마한 마검의 폭풍이 송운 일행을 향해 덮치기 시작했다.
“운아, 서란아! 피해라!”
평목단이 다급히 소리치는 순간 바로 뒤에서 맴돌고 있던 사도영의 검 하나가 그의 옆구리를 스쳐 지나갔다.
서걱.
미처 피하지 못한 평목단이 고스란히 그 피해를 입었고, 곧 그의 옷깃이 피로 물들기 시작한다.
“크윽……!”
“아버지!”
“장인어른!”
第七章. 마제 격퇴
큰 일격을 받은 송운 일행에 반해 사도영은 부상당한 몸으로도 뭔가 즐거워 보이는 듯했다.
그의 입가에는 가느다란 호선(弧線)이 그려진다.
‘이번 건 피하지 못하였으나, 무위가 제법이로군.’
자신과 칼을 마주하고 있는 평목단의 무위에 흥미가 생긴 듯했다.
‘하나 그조차도 결국 나에겐 아무것도 아니지.’
구천악과 부딪히면서 몸 곳곳에 새겨진 상처가 그의 온몸을 감싸고 있었으나, 그 정도는 아무렇지 않은 듯. 아니, 되레 점점 그 검 날의 끝이 날카로워지고 있는 사도영이었다.
“장난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한마디 조용히 읊조리듯 내뱉은 사도영의 눈이 붉은색으로 빛나면서 평목단에게 달려들려는 그 순간.
카가강!
세 개의 검이 그의 검에 맞부딪혔다.
송운과 평서란.
그리고 곽철우였다.
“더 이상 네 맘대로 날뛰게 두진 않겠다.”
분노로 들끓고 있는 평서란의 모습에 잠시 놀란 듯 보이는 사도영이었으나, 이내 송운과 곽철우의 얼굴을 보고서는 비웃음이 가득 들어찬 얼굴로 둘을 향해 말했다.
“……네놈들은 지난번 싸움에서 내가 무서워 덤벼보지도 못한 채 목숨을 구걸 받은 놈이 아니더냐? 큭큭. 그런 애송이가 감히 날 막아서?”
무엇보다 자신이 놓아준 애송이에게 앞길을 방해받았다는 것에 대해 화가 난 사도영의 눈썹이 위아래로 출렁인다.
“한 놈도 나가지 못하게 살려두지 말고 죽여라.”
“예!”
사도영의 입에서 흘러나온 명령에 뒤에 서 있던 해남파 무인들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하나, 그들은 얼마 가지 못하고 막힐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좁은 길목에 유일하게 지나갈 수 있는 곳을 평서란이 떡 하니 자리 잡고 선 것이다.
“곽 소협. 란 매와 함께 막아 주세요. 저곳은 제가 가겠습니다.”
곽철우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빠르게 평서란의 곁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그 틈을 타 송운은 평목단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평서란은 순간 마음속에서 넘쳐흐르는 분노를 내리누르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꽈악.
이내 그 입술 사이로 비릿한 핏물이 타고 흘러 들어갔으나, 그런 것 따위 아랑곳하지 않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