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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전생-83화 (83/275)

제83화

허탈한 마음도 없잖아 있었으나, 예상외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에 안도의 한숨 같았다.

“후우……. 아무래도 우리가 과민반응을 한 것 같소이다.”

당헌기가 말하자 가장 왼쪽 끄트머리에 서 있던 중년의 무인이 입을 열었다.

“이미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정말 이대로 가다가는 마인 놈들에게 비경을 다 빼앗기지 않겠습니까? 좀 더 서둘러야 합니다. 이미 꽤나 많은 길을 타고 들어온 듯한데, 지금껏 함정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곧. 아무런 함정도 없다는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음……. 원길(元佶)의 말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소. 평 도독.”

다들 그 말에 어느 정도 수긍하는 분위기 이자, 평목단은 평서란과 송운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향했다.

“너희들 생각은 어떠하냐?”

“정말 지금처럼 함정이 아무것도 없다면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앞서 나간 놈들 또한 그걸 알았다면 더 빨리 움직였을 겁니다.”

“저도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송운과 평서란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았고, 그에 이어 곽철우와 다른 무인들 또한 고개를 주억인다.

“모두의 의견이 만장일치(滿場一致)인 것 같구먼. 하면 곧바로 움직이도록 하지. 갑시다.”

타다닥!

평목단의 말을 시점으로 원길이라 불린 중년 무인이 가장 먼저 튀어 나갔고 그 뒤를 열한 명의 발걸음이 뒤따랐다.

* * *

가장 먼저 튀어 나갔던 원길이란 무인의 발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평소 정의감이 넘치는 그로서는 마인들에게 무경을 빼앗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어린 시절 마교인의 손에 부모님과 형제 모두를 잃어버린 그였기에 누구보다 더 그들에 대한 두려움이 반대로 복수심으로 커져 달아올라 있던 그다.

‘절대로 빼앗겨서는 아니 된다!’

그런 마음은 더더욱 원길의 발걸음을 재촉시키고 있었다.

“원길! 자네 속도가 너무 빠르네. 조금 늦추게. 아무리 지금까지 함정이 없었다고는 하나 이곳은 비고 안일세!”

원길의 뒤를 바짝 따라가던 동료가 그에게 충고를 건네었으나 당금의 그에겐 들릴 리 없었다.

“지금은 무경이 더 중요하네.”

타다다닥!

“저 친구가……!”

무시한 채 달려 나가는 그를 보며 결국 설득을 포기한 동료 무인도 고개를 내저으며 그를 더욱 바짝 쫓기 시작한다.

그의 성정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더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달렸을까?

어디선가 미세한 혈향이 난다 싶더니 송운이 지나가는 길목 옆 검에 심장에 꿰뚫린 채 눈도 채 감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한 시체들이 보였다.

이에 송운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주변에 묻은 혈흔을 향해 손을 뻗어 만져보았다.

쩌억.

피의 끈적끈적한 느낌과 함께 아직 채 굳지도 못한 그것으로 보아 조금 전까지 이곳에서 전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는 건.

‘이미 한차례 격전(激戰)이 벌어진 듯하군.’

송운의 미간에 슬쩍 주름이 새겨진다.

“좀만 더 빠르게 움직이면 그들과 마주할 수 있을 겁니다. 속도를 조금 더 높이시죠.”

그 시체들의 모습이 다른 이들의 눈이라고 보이지 않을 리 만무했고, 잠시 발걸음이 멈췄던 원길이 아까보다 더욱 빠르게 달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또다시 속도를 올리며 달리길 한참 했을까?

파앗!

송운 일행의 눈앞에 커다란 공동(空洞)의 틈 사이로 밝은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곳인가?’

의문을 품고 달려갈 무렵, 맨 앞에서 선두로 나섰던 원길의 눈동자가 솔방울만 하게 커지더니 이윽고 그의 발걸음이 황급히 멈추었고 그와 동시에 모두가 멈추어야만 했다.

탁.

계속해서 무언가 홀린 이처럼 달려 나가던 원길이 발걸음을 멈추니, 뒤에서 달리던 이들의 발걸음마저 멈추게 한 것이다.

이상한 원길의 모습에 다들 조심히 앞으로 나아갔고, 공동의 입구 앞까지 다가간 순간.

모두가 말을 삼켰다.

“이게 대체 무슨 일……?!”

* * *

공동의 안.

환한 빛에 휩싸인 채 검은색 무복을 입은 한 무리가 기세등등하게 서 있었다.

송운 일행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이.

바로, 사도영과 해남파 무인들이었다.

타닥.

사도영은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돌렸다.

씨익.

‘쥐새끼들인가? 생각보다 빠르게 쫓아왔군.’

우우웅.

쌔애애액!

그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지어지면서 동시에 사도영이 손짓을 하며 사방팔방으로 검을 뿌렸다.

푸부북!

뿌린 검들은 일제히 바닥으로 정확하게 박혀 들어갔고, 이를 본 송운 일행 모두가 주먹을 굳게 쥐었다.

결코 검을 뿌려 바닥에 꽂아 넣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뿐만이 아니라 그를 뒤따르는 무인들 또한 이곳까지 들어온 만큼 만만치 않은 고수임은 분명했다.

꿀꺽.

다들 말없이 긴장 태세로 돌입하였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긴장한 것은 바로 송운과 곽철우였다.

‘해남마제……!’

그가 누군지, 그의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 얼마 전 바로 코앞에서 똑똑히 지켜본 둘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렇게 다시 마주했구나.’

송운은 그날의 분함과 동시에 차오르는 긴장감에 오른손을 쥐락펴락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서로의 무위를 재며 얼마간 대치하고 있었을까?

반대편에 있는 세 개의 입구 중 하나에서 해남파와 송운 일행을 제외한 또 다른 기척이 들려왔다.

일순간 모든 이들의 고개가 기척이 난 방향으로 향했다.

“호오……. 설마하니 이런 곳에서 다 모이게 될 줄이야.”

“허, 이젠 마교까지 인가…….”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가라앉은 분위기는 한겨울 북풍의 차가운 칼바람처럼 점점 더 싸늘하게 식어갔다.

* * *

우르르 빠져나오는 이들 사이에서도 유독 돋보이는 이가 즐겁다는 듯, 한 명이 이빨을 번뜩이며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은 육 척을 넘는 키에 빨간색 무복을 입고 이와 같은 색으로 붉게 물들어 괴이한 얼굴을 한, 온몸에서 질척이는 마기를 폴폴 풍기는 자.

송운은 그 얼굴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너무도 잔혹하여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간혹 꾸던 꿈에서도 잊히지 않던 모습이다.

한데 그 모습을 어찌 잊을까?

“천마……?”

눈앞에서 천마, 구천악을 발견한 송운의 두 동공이 그 여느 때보다 더욱 크게 떠졌다.

“감히 이곳이 어딘 줄 알고 오만하게도 온갖 벌레 새끼들이 다 꼬여 들었구나. 큭큭. 네놈들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느냐?”

웃으며 고요하게 다가오던 구천악의 모습에 여태껏 말 한마디 없이 뒷짐을 진 채, 서 있던 당헌기가 앞으로 조심스레 나섰다.

그러자 송운이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천마와 해남마제. 그 둘만으로도 만만치 않은 상대임은 틀림이 없으나, 당헌기 또한 자그마치 현 구주칠대무신이다. 게다가 그에 못지않은, 아니. 이미 충분히 그 자리에 오를 만큼의 실력을 지니신 장인어른께서도 계시질 않느냐? 두 분이서 합공을 펼친다면 전혀 승산이 없다고 볼 수는 없겠구나!’

나머지 뒤의 무인들은 송운 본인과 곽철우. 그리고 평서란과 나머지가 있는 힘껏 맡는다면 될 터.

송운의 마음속엔 어느새 절망이라는 단어 대신 희망이라는 단어가 새겨지고 있었다.

‘단 일 할이라도 승산이 존재한다면 응당 맞부딪혀보아야 하는 것이 진정한 무인 아니겠는가?’

그렇게 모두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을 무렵.

분위기는 점점 더 얼어붙고 있었다.

하나, 그 속에서도 유독 사도영의 눈빛이 어딘가를 향하여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으니…….

시선의 끝이 구천악을 향하고 있었다.

그 눈빛은 결코 두려움이나 그런 것 따위가 아니었다.

분노였으며, 광기였다.

‘해남마제가 왜……?’

송운이 이를 느꼈으나, 정작 구천악 본인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

그 순간.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던 공기의 흐름이 사도영을 중심으로 깨어졌다.

지면에 박혀있던 사도영의 검이 허공으로 떠오르면서 무언가 할 새도 없이 구천악을 향한 것이다.

쐐애액!

“……!?”

카앙!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해 있던 구천악이 몸을 다급하게 틀며 검으로 맞받아쳤으나, 사도영은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정신없이 휘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휘잉.

튕겨져 나온 검들을 다시 한곳으로 모으더니 광기 어린 시선이 그의 전신을 휘감으며 오싹한 살기가 사도영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크크큭. 천마! 오너라. 이 무림에서 진정한 마(魔) 중 일마(一魔)가 누구인지 직접 보여주마!”

누구 하나 말릴 틈새도 없이 허공에서 날아가는 검들의 향연은 그야말로 급작스러운 공격이었다.

카앙!

“이, 이 미친놈이!”

연이어 날아오는 검들에 또 한 번 당황한 듯 구천악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반격에 나섰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교와 해남파의 무인들이 서로 격돌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모두 싸워라!”

* * *

“이이제이(以夷制夷)인가?”

마교와 해남파가 격돌하는 모습은 어마어마했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송운 일행에게도 그 여파가 고스란히 전해져 올 정도였다.

‘해남마제가 천마의 두 발을 묶어버렸구나. 이대로라면 우리에겐 이득일 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원길이 조용히 입을 떼었고 송운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고개를 주억였다. 원길의 입가에는 어느새 자그마한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런 원길의 말에 동의하는 듯 당헌기가 평목단과 눈을 마주치더니 말을 이었다.

“가야 하오 평 도독. 저들이 서로 엉켜있는 지금. 지금이 기회요. 갑시다!”

파박!

말을 마친 당헌기는 귀신과도 같은 몸놀림을 보이며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올랐고 마교와 해남파가 싸우는 틈새를 뛰어넘었다.

세상 거칠 것 없이 뛰어나가는 그의 모습을 보며 송운은 감탄 어린 탄성을 내뱉었다.

‘허! 역시 구주칠대무신은 구주칠대무신이라는 건가?’

“이놈! 어딜!”

카앙!

그런 당헌기의 몸놀림을 눈치챈 구천악이 빠르게 손을 뻗으려 하였으나, 그조차도 사도영에게 다시 막히는 꼴이 되었다.

“네놈은 나와 붙어야 할 것이다. 다른 곳까지 신경 쓸 정신이 남아 있나? 아니면 설마, 지금 날 우습게 보는 건가 구천악?”

“이놈이 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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