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덥군.’
그런 그가 만족감을 느끼기도 전에 뜨거운 여름 햇살보단 덜하나 못지않게 붉은빛을 내비치는 겨울의 햇빛은 검은 무복의 하얗고 고운 미간을 찌푸리게 만든다.
일 년 내내 딱히 이렇다 할 추위가 없는 해남성과는 달리 북풍이 불어오는 내륙의 냉기가 그를 괴롭힐 법도 했으나 사내는 그런 바람조차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뚝. 뚝.
그 사이를 타고 이마에 몽글몽글 맺혔던 땀방울이 지면을 향해 떨어져 내렸고 이런 그의 마음을 헤아린 것일까?
고공(高空)에서 불어온 바람이 그의 얼굴을 강타했다.
휘이잉-
“……빌어먹게 좋은 날씨군.”
검은 무복의 목소리에 짜증이 잔뜩 깃들 무렵, 누군가 조용히 그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타닥.
온몸을 검은색으로 둘러싼 사내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문주님.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검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수련을 하던 검은 무복의 정체는 다름 아닌 현 해남성의 주인.
해남마제라 불리는 이.
사도영이었다.
* * *
“드디어 찾았습니다.”
“……무황비고를 말이냐?”
스르릉.
사도영이 지면에 박아 넣었던 자신의 검을 거두어들이며 자신의 수하에게 천천히 물었다.
“예.”
“이번엔 확실한 것이더냐?”
“예, 틀림없는 무황비고의 입구입니다.”
제법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크큭……. 그렇단 말이지.”
사도영은 눈 앞에 펼쳐진 중원의 땅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뜨거운 햇살이 그의 눈을 괴롭혔으나, 그런 것 따위 아랑곳하지 않아 보였다.
지난 수십여 년의 세월 동안 힘을 잃은 해남파는 중원에 나서보지도 못한 채, 꼼짝없이 이곳에 갇혀 살아야 했다. 사도영은 전대 해남파 장문인이자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는 죽어가면서도 자신과 해남파를 걱정한 것이다.
마교에게 치이고 중원의 무림에 밀려났던 해남파의 안위를 걱정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드디어……. 드디어 우리 해남파의 명성을 드높일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아버지.’
까득.
사도영이 이를 악다물었다.
“서둘러 준비를 마치거라. 우리 해남파가 마중제일문(魔中第一門)이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천하를 뒤집어엎을 기회니라.”
잔잔히 흘러들어오는 바다처럼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바람이 불어오는 거대한 파도 같은 웅장한 힘이 담겨 있었다.
“예, 문주님!”
고개를 조아리던 사내가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힘차게 외쳤고 그 순간 사도영의 눈빛이 매서운 해남의 해풍(海風)처럼 매섭게 변했다.
자신이 서 있는 한, 더 이상 해남파의 설움 따위는 없다.
그 앞길을 막는 이는 모조리 짓밟아버리리라!
第四章. 비고 개방
비고의 문이 열렸다.
정확히 비고를 찾아 나선 지 보름만의 일이었다.
그 소식은 암암리에서 흘러나와 곧 곳곳으로 널리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각기 가장 빠른 발들이 소식을 전해왔다.
모두가 찾아 헤맸던 비고였기에, 그 소식은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했다.
* * *
“오늘따라 달이 매우 흐릿하구먼. 그렇지 아니한가 총군사?”
백능이 하늘을 쳐다보며 말을 건네었다.
그의 말 대로 오늘따라 유독 밤하늘에 가늘게 뜬 그믐달은 가뜩이나 얇은 몸에 주변에서 자신을 가리는 구름들 때문에 더욱 힘겹게 빛을 내고 있었다.
“그러하군요.”
제갈염이 달빛에 비친 어두운 그림자 사이로 고소를 지으며 답했다.
“꽤나 오랫동안 무림이 조용하긴 했지. 어쩌면 당연한 이치인 게야. 끌끌……. 본디 무림은 늘 혈겁(血劫)에 휩싸여 살아왔지. 이 늙은이가 너무 오랫동안 평안히 지내 온 듯싶네. 너무도 오래 살았어.”
“맹주님…….”
아릿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제갈염을 뒤로한 채 백능은 지나온 날들을 회상하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백능의 나이가 나이인지라 살아온 세월도 그만큼 길었다.
그 사이엔 좋은 기억도 있었으나, 그만큼 험한 꼴도 많이 겪었다. 더 이상 그러한 일을 만들지 않으리라 무림맹주의 자리에 오르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백능이다.
한데, 역시나 세상은 자신의 뜻대로 흘러가 주지 않는다.
‘결국 또 한 번 세상이 뒤집히는 꼴을 보아야 하는 것인가…….’
백능의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져 오기 시작했다.
‘그래, 아직은 시간과 기회가 있다. 막아야 하느니라.’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마음을 단단히 굳힌 백능이 입을 열었다.
“이미 해남파와 마교가 도착하여 서로 싸우고 있다고 하였던가?”
백능의 물음에 제갈염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답했다.
“송구하오나, 그렇습니다. 그 때문에 수많은 무인들이 서둘러 나서야 한다며 난리이오니…….”
백능은 이미 예측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주억였다.
“놈들은 아주 노련한 사냥개일세. 양측 다 여태껏 몸을 사리며 웅크린 채, 십여 년이 넘게 틀어박혀 있던 놈들이란 말이네. 그런 그들이 나선 것이라면 사실일 가능성이 크네. 특히 천마, 구천악! 그놈은 머리가 영리하지. 마인답지 않은 이성을 지닌 자일세. 조심성이 많고 머리도 제법 굴릴 줄 아는 놈이 직접 움직였다는 것은 신빙성이 꽤나 높아지지. 물론 그 정도는 총군사인 자네가 나보다 더 잘 알 것이라 믿고 있네.”
“어찌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마교와 해남파라면 이미 비고 내부로 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네.”
제갈염의 눈빛이 크게 한번 출렁인다.
이미 떠도는 소문 사이로 들려오는 수많은 말들 중 하나였으나, 맹주인 백능마저도 그리 추측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 말 역시 진실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
“황군 쪽은 어떠한가?”
“이미 그쪽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허허……. 그렇다면 더더욱 지체할 시간이 없겠구먼. 우리가 이보다 더 늦어서는 안 되네. 서둘러 추가 병력을 편성해 보내도록 하게. 그 무공이 마인 놈들의 손에 들어가서는 결코 아니 되네. 알겠는가?”
“예, 알겠습니다. 맹주님.”
“아, 그리고……”
백능이 머뭇거리자 제갈염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말씀하시지요.”
“모두…… 몸조심하라 일러주게.”
백능이 망설이다 말한 그 말에 어둡기만 하던 제갈염의 얼굴에 슬쩍 웃음이 지어졌다.
그런 그를 향해 허리를 숙이며 대답을 마치곤 곧장 뒤돌아 가는 제갈염의 모습을 바라보며 백능은 깊은 한숨만이 새어 나왔다.
‘허어……. 부디 아무런 일이 없어야 할 터인데…….’
그의 고민이 깊어갈수록 밤도 함께 깊어가고 있었다.
* * *
아직 새벽의 동이 트지 못하고 사방으로 푸르스름한 빛이 맴도는 시각.
송운과 함께 평서란이 수련을 하고 있었다.
일로 인하여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들이었으나, 이렇게 틈틈이나마 같이 수련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온 것이다.
지난번 있었던 약속을 잊지 않은 송운이었다.
하여 평서란이 오기 전까진 천의선천기공을 통해 홀로 수련하며 스스로를 가다듬었고, 평서란이 도착하면 이렇게 함께 대련을 하게 된 것이다.
부웅!
매섭게 허공을 가르며 다가오는 검날에 송운이 빠르게 몸을 돌려 피해냈다.
“란 매. 검 끝이 더욱 날카로워진 것 같구려.”
“그런 말 할 틈에 한 번이라도 더 피하시는 게 어떠세요? 하앗!”
평서란이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송운에게 또다시 검을 들이밀며 바짝 붙는다. 하나 이를 송운이 가만 보고 있을 리 만무했다.
카앙!
날렵한 쇳덩이끼리 부딪치는 소리는 둔탁했다.
“허어, 이거 잘못하면 한순간에 갈 뻔하였소.”
“그러지 않으실 거란 거 저도 충분히 알아요. 설마 운 가가가 그 정도도 피하지 못하시려고요?”
송운은 담담하게 말하는 평서란의 말에 그저 멋쩍은 웃음만 지을 수밖에 없었다.
‘허허허……. 역시 란 매도 은근히 성질이 있단 말이야.’
그렇게 약 이틀 전부터 시작된 둘의 대련은 벌써 삼 일째 접어들고 있었다.
송운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그녀의 새로운 모습에 처음엔 당황했으나, 이젠 제법 익숙해져 가고 있는 참이었다.
검을 쥐지 않은 평서란과 검을 손에 쥔 평서란의 모습은 너무나도 극명하게 달랐기 때문이었다.
한데 아무리 그렇다 하여도 어느 정도 손속에 자비를 두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마치 어제의 복수라도 하겠다는 듯, 요 며칠 동안 겪었던 그녀의 손속 중 유독 맹렬하고 사나웠다.
채앵!
“자꾸 대련 중에 딴생각하시기예요?”
송운은 속으로 뜨끔하면서 어디선가 얼핏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여인의 감은 뛰어나다고 했던가?
‘대체 어찌 저리 감이 좋은지…….’
그때였다.
푸드득!
하얀색으로 뒤덮인 새 한 마리가 송운의 어깨에 살포시 날아든 것이다.
동시에 평서란과 송운의 검도 멈추었다.
“웬 새가…….”
의아한 표정으로 새를 바라보던 송운에게 평서란이 한마디 거들었다.
“전서구(傳書鳩)네요. 거기 왼쪽에요.”
송운은 곧장 새의 왼쪽 발을 향했고, 평서란의 말대로 검은 쪽지가 묶여있었다.
푸드득!
송운이 새의 발에 묶여있던 쪽지를 풀자 곧바로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훈련이 참으로 잘 되었구나. 한데 이 시간에 갑자기 웬 전령을……?’
“황궁에서 보내온 것이네요. 뭐라고 적혀있어요?”
평서란의 말에 송운이 쪽지를 펼쳐보자, 궁금한 듯 평서란이 그의 옆으로 다가왔으나, 송운의 키가 워낙 큰 탓에 보이질 않자 그에게 직접 물은 것이다.
펼친 전서 속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무황비고 열림. 연락이 닿는 대로 황궁으로 모일 것.’
빠르게 읽어나간 송운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지자 평서란도 좋지 않은 소식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비고의 문이 발견되었다는군.”
“비고라면……. 당연히 무황비고를 말하는 거겠죠?”
“그렇소. 그토록 찾아 헤맬 때는 보이지 않더니만, 제 발로 나타난 것 같구려. 급작스럽게 열린 소식이라 당황스럽군.”
‘뭔가 좀 찜찜한 감이 없잖아 있긴 하나…….’
천자의 명이 떨어졌다.
한데 그러한 것을 어찌 어길 수 있을까?
“지금 당장 출발해야 할 듯싶소.”
송운의 말에 평서란의 표정도 미묘하게 바뀌었다.
“서둘러야겠네요. 우선은 황궁으로 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