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화
‘차라리 눈이 오면 나을 것을…….’
송운이 축축하게 젖어버린 신을 바라보며, 수련을 포기하고 방으로 들어가려던 그때.
누군가 송운에게 달려왔다.
달평이었다.
“대공자님. 주인 어르신께서 서재로 오시랍니다.”
“지금 말이냐?”
“예, 예. 급하신 일이라고…….”
“알겠다. 지금 가도록 하마.”
송악의 서재.
“아버님, 저 운입니다.”
송운의 방문에 송악이 그를 바라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양손을 등 뒤로 한 채, 바깥을 향해 있었다.
“이 아비를 따라 밖으로 갈 채비를 좀 해야겠다.”
송운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비에 흠뻑 젖은 옷을 바라보며 난감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설마하니 집 밖으로 나갈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한 채, 젖은 옷 그대로 왔기 때문이다.
“저…… 그럼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오겠습니다.”
송운의 살짝 당황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송악이 그의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주억이며 답했다.
“그러도록 하거라.”
잠시 후.
옷을 갈아입고 온 송운이 송악을 따라간 곳은 커다란 객잔 앞이었다.
“아버지 이곳은 황궁으로 가는 길이 아니지 않습니까?”
“알고 있다. 내가 설마 그 길을 몰라서 이리 왔겠느냐? 오늘은 황궁이 아닌 이곳에 모이기로 하여 그런 것이니 따라오면 된다.”
송운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의문이 생겼으나, 이내 아버지를 뒤따랐다.
‘그래. 아버지께서 어련히 생각이 있으신 거겠지.’
끼익.
이윽고 송악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시끌벅적해야 할 객잔 안은 고요했고, 오롯이 객잔의 점소이만이 그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 점소이는 뾰족한 수염에 세 갈래로 나뉘어 정갈히 정돈한 듯한 그는 꽤나 싹싹하게 구는 것이 눈치도 빨랐다.
“이미 예약이 되어 있네. 그곳으로 안내해 주게.”
“아 예, 나으리. 따라오시지요.”
연신 고개를 낮추며 말하는 점소이를 따라간 곳은 삼층에 있는 조금 거대한 방이었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음? 대체 무슨 일로 이런 곳에 사람을 모았단 말인가?’
평목단을 비롯하여 아는 얼굴들은 몇 없었고, 대다수 생소한 이들이었다. 하나 그 복장을 보건대, 다들 무복을 걸치고 있어 누가 보아도 무림인임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사람이 왔음에도 누구 하나 말이 없는 걸 보니 결코 가벼운 자리가 아님을 감지한 송운은 빠르게 눈을 굴리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송악과 평목단을 의뭉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으나, 그 둘도 고개를 내젓는다.
알 수 없는 묵직함이 도는 분위기 속에서, 그런 송운의 궁금증을 풀어줄 이는 따로 있었으니…….
먼저 입을 연 이는 제갈염이었다.
“모두가 모이신 듯하니 본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우선 제 소개를 먼저 하지요. 저는 무림맹의 총군사. 제갈염이라 합니다.”
송운은 그의 말에 눈에 놀라움이 가득 찼다.
‘저자가 그 유명한 제갈염인가?’
무림맹의 총군사로 그와 관련된 일화는 이미 무림에서 수두룩하게 퍼져 있을 정도다. 그런 그가 직접 왔다는 것에 대해 황궁에 속한 이들 또한 적잖이 놀라는 모습이었다.
송운 또한 전생에 무림 속에서 살아왔으나, 단 한 번도 본 적은 없었다.
‘조금 더 나이가 있는 자라고 생각했거늘.’
생각보다 젊은 그의 모습에 놀란 것이다.
게다가 무림맹의 총군사인 제갈염이 움직였다는 것은 뭔가 그만큼 중대한 사항이 있다는 말과도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 먼 섬서성(陝西省)에서 이곳 북경까지 총군사라는 직책을 맡고 있는 이가 왔단 말인가?
그때, 누군가 제갈염을 향해 날카로운 가시가 돋친 질의를 던져왔다.
“그럼 총군사께서는 어찌 갑작스레 바쁜 사람들을 한데 모은 것이오? 그 연유가 몹시 궁금하군.”
무림맹에서 황궁과 정파 측 사람들을 한곳에 모으기 위해서 택한 장소가 이곳 북경이다.
며칠의 기한을 줬으나, 다들 먼 북경까지 온 것에 대해 꽤나 불만이 많은 듯했다.
하여 모두가 하나같이 제갈염을 향해 질타하는 시선을 보냈으나 그러한 시선에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한 목소리로 할 말을 이어 나갔다.
“여기 계신 분들이 궁금해하실 법도 하지요. 여러분이 궁금해하시는 그 연유는 지난번 있었던 마교와 해남파의 일 때문입니다.”
“그것이 어쨌단 말이오? 이미 지나간 일이외다. 게다가 결국 더 이상 피해는 없지 않았소이까?”
“맞소. 굳이 우리가 이곳까지 와야 하는 정당한 사유를 들어야…….”
정신없이 쏘아대기 바쁘던 이들에게 선하게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던 제갈염이 탁자를 턱 하니 내려찍으며 단 한마디를 내뱉었다.
탁!
“무황비고.”
“……?!”
“무, 무황비고라니? 갑자기 그건 무슨 말이오?”
잠시간 지었던 험악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진지해진 표정으로 제갈염이 말을 이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무황비고가 북경에 있다는 소문이 그들 사이로 퍼진 듯합니다. 그 소식을 접한 마교와 해남파가 북경으로 몰려든 것이지요.”
“무, 뭣이오?!”
“그 말인즉슨 무황비고가 실존한다는 말이오?”
웅성웅성.
순식간에 그의 말 한마디로 인해 분위기가 술렁거린다.
황궁 측도, 정파 측도. 모두가 당황해 마지 없음은 틀림이 없었다.
그것은 송운 또한 마찬가지.
다른 이들도 물론 모두 같겠지만, 그중 가장 놀란 이는 아마도 송운일 것이다.
송운은 마음속으로 터져 나오는 짧은 탄성을 삼켰다.
‘으음……! 무황비고라. 그건 이미 오래전에 전설 속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던가! 전생에서도 없었던 일이다. 대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송운은 혼란으로 인해 머리가 지끈거려 오는 것을 느꼈다. 지난번 화마를 시작으로 자꾸만 자신이 알고 있던 미래가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뒤바뀌어가고 있다.
마치 송운을 비웃기라도 하겠다는 듯 말이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란 말이냐? 도통 알 수가 없구나. 허어. 만약 그러한 것이 그놈들 손에 들어간다면……. 그것만큼 끔찍한 일은 없을 터.’
홀로 사색에 잠겨 있던 송운의 귓가에 제갈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은 특별히 그 사안이 중대한 만큼, 다들 알아두셔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직접 얘기를 드리고자 자리를 마련한 것이니 너무 노여워하지 마시지요.”
그 말을 들은 모두가 수긍한 듯 고개를 주억였다.
세상이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 * *
휘이잉.
한차례 장대비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객잔의 창밖 넘어, 누군가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각기 흑색과 청색의 복면으로 얼굴을 둘러싼 두 명의 복면인이었다.
“일단 그분의 뜻대로 일이 흘러가고 있기는 한 것 같군.”
“그러한 듯하네. 한데……. 정말 괜찮은 것인지 모르겠네.”
청색 복면을 뒤집어쓴 이가 고개를 슬쩍 내저었다.
끄덕.
그런 그의 심경을 이해하겠다는 듯 흑색 복면이 맞받아쳤다.
“자네의 말에 어느 정도 동조하는 바이네. 비록 우리가 만든 무황비고가 가짜라곤 하나…….”
말끝을 흐린 흑색 복면의 시선이 하늘 끝 그 어딘가로 향했다.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지.’
그랬다.
세간에 알려진 무황비고는 진짜가 아닌, 흑야에서 조작하여 만들어냈고, 퍼뜨린 소문이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결코 우습게 볼 것도 아니었다.
자그마치 독고백이 직접 저술한 무공서적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무림 전체를 통틀어 가장 최상위층에 서 있는 그다. 비록 가짜로 만들어진 무황비고이나 진짜보다 더 높은 수준의 무공일 것은 보지 않아도 확신할 수 있었다.
“우리가 만들어낸 가짜라고 하기엔 그 수준이 너무도 뛰어나지 않은가? 되레 진짜보다 더한 물건일세. 그분이 만든 무공을 취하는 이는 그것보다 훨씬 더 어마어마한 힘을 갖게 될 것이네. 그렇지 않은가? 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계신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으니…….”
흑색 복면이 그 말에 조용히 한숨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후우, 감히 우리 같은 놈들이 그분의 깊은 뜻을 알 리가 있겠는가? 분명 그분께서도 다 아시면서 지시하신 일일 터네. 우리들은 그저 하라는 대로 시키는 대로 따를 뿐.”
흑색 복면의 말 대로였다.
그들에게는 독고백의 명령을 거부할 권한이 없었다.
독고백의 말은 곧 법이요, 진리인 것이다.
복면인들이 걱정하는 사안은 분명 독고백도 알고 있을 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고백은 자신이 저술한 무공서책을 남겨 가짜 무황비고를 만들라 지시했다.
또한 이 일을 진행하는 부하들에게 절대 손을 대서는 아니 된다 엄명을 내린 것이다.
그의 명령이 떨어진 이상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네.”
독고백은 이번 계략을 통해 강호가 혼란에 빠질 것이라 예상했다.
이미 오래전에 전설로 남은 비고를 들춰낸다면 그것을 취하려는 이들끼리 서로 으르렁거리며 칼부림을 낼 것이고, 그리된다면 당연히 강호는 피로 물들 게 뻔할 것이라고.
역시나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들어맞았고, 정사파, 황궁, 마인 할 것 없이 모두가 술렁이고 있다.
하나 그런 만큼 누군가는 그 무공서적을 취하게 될 터다. 그리된다면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꼴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실상 그 정도 무공을 익혀 대성을 한다 한들 그분의 발끝이나 따라가겠는가?”
그런 흑색 복면의 말에 청색 복면이 그제야 고개를 주억인다.
“하기야……. 그것도 그렇군.”
부르르.
청색 복면은 잠시 독고백의 모습을 떠올렸는지 온몸에 난 털들이 쭈뼛 서는 듯한 소름이 돋아났다.
분명 자신들이 떠받들고 있는 이였으나, 독고백의 점점 커져 가는 광기는 그들에게 선망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 누구도 그분을 이길 수 없다.’
예측도 아니었다.
당연히 그리될 것이다.
독고백이 만들어낸 무공서적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결국 그 스스로 창조해낸 무공이다.
대성을 이룬다고 하여도 독고백의 무위는 결코 따라갈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에 청색 복면이 이야기의 화두를 돌렸다.
“하면 자네는 누가 그분의 무공서적을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구천악(具天齷)에게 걸겠네.”
“구천악이라면……. 천마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