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화
“적어도 내 손에 하나뿐인 명줄을 잃고 싶지 않다면 자신을 좀 더 성장시킨 후에 찾아와야 할 것이다.”
펄럭!
해남마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냉기를 풀풀 풍기며 이내 돌아섰고, 그런 그의 뒤를 곧바로 해남파 무인들이 따랐다.
* * *
휘이잉.
한바탕 혈풍이 휩쓸고 지나간 이 자리엔, 해남파도 마교인도 없었다.
남은 건 오로지 피투성이가 된 시체들과 황군.
그리고 정파의 병력뿐.
비록 그들이 처음 했던 우려와는 달리 백성들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없었으나, 어느 누구도 쉽사리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단 한 번의 손을 쓰지 않고 적을 물렸으나, 그렇다고 하여 이긴 것 또한 아니었다.
‘……우리는 대적할 가치도 없다는 것인가?’
송운은 해남마제가 떠나기 전 남긴 그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고기를 잡는 어부들은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새끼는 놓아주는 것이 그들만의 관례이다.
그래야만 그 새끼들이 더 자라 어른이 되고 어른이 되어 후대를 놓기 때문이다.
송운은 오늘의 자신이 마치 그 물고기 신세와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꽈악.
송운은 두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온다.
그 무엇도 아닌 자신을 향한 분노였다.
폐관 수련을 하며 조화경에 올랐고, 그 벽을 깨고 나오면서 충분히 무위에 자신이 있었던 그다.
‘이젠 제법 강해졌다고 생각했거늘. 세상에 나오자마자 또다시 마주친 적은 괴물에 가까운 신위(神威)를 지니고 있다. 아직도 갈 길이 멀었구나. 크윽……!’
부정하고 싶었으나, 이미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 일이 아니던가? 부정한다 하여 없던 일이 될 순 없는 법.
점점 송운이 강해질수록, 그만큼 적들도 강해지고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일 지도 모를 터나, 마치 누군가 자신을 데리고 장난을 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내가 너무 안일했구나. 세상은 넓고 강한 자는 많다. 그걸 잊지 말자. 지금보다 더…… 더 강해지면 된다.’
송운은 분노로 이는 마음을 가라앉힌 채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더욱더 강해지리라고.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우선은 돌아갑니다. 빠르게 전령을 띄워 뒤에 오는 후발대에게 전하세요. 이곳으로 오지 않아도 된다고.”
第二章. 비고의 정체
파앙!
사방에 검은 어둠이 내려앉은 시각.
오늘따라 유독 하늘 가득 가린 검은 구름 사이로 번지는 흐릿한 달빛에 몸을 맡긴 채, 한 인영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인영은 바로 송운이었다.
이번에 겪은 해남마제의 일로 큰 충격을 받았던 탓일까?
시간을 쪼개어 수련하는 데 더욱 매진하게 된 것이다.
마교와는 달리 예상하지 못했던 복병의 등장은 무림맹도, 송운에게도 모두 골칫거리를 떠안게 된 것이다.
만약 해남마제가 마음만 먹는다면 중원으로 진출하는 건 시간문제일 터. 작금, 중원의 모든 눈과 귀가 해남파에게로 몰리고 있었다.
“후우…….”
털썩.
송운은 정신없이 몸을 놀리던 수련을 잠시 멈추고, 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밤이슬에 땅바닥과 마주한 옷깃이 촉촉이 젖어 들어갔으나, 아랑곳하지 않아 보였다.
그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기에는 지금 송운에겐 너무도 커다란 숙제가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드러누운 채 검은 하늘을 바라보던 송운은 며칠 전의 그날을 되새겼다.
그러자 그의 머릿속에서 해남마제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기어검이라니!
단 한 번의 손짓으로 탈백마왕의 목숨을 취했다.
다섯 자루의 검이 해남마제로부터 의지를 얻고 생명력을 이어받아 사냥에 나선 뱀처럼 순식간에 상대방의 목덜미를 물어 일격으로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 냈다.
‘만약 해남마제와 싸우게 된다면……?’
송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결과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패할 것이다. 검을 자신의 뜻으로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경지에 올라선 그의 무위를 막기에는 송운의 실력으론 턱없이 부족했다.
‘과연 무림인가…….’
그의 괴물 같은 신위에 송운은 할 말을 잃었었다.
아니, 감히 나설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굳이 송운이 아니었더라도 그 자리에서 해남마제와 맞섰다면 방심은커녕 생각할 틈도 없이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내 손에 죽고 싶지 않다면 자신을 좀 더 성장시킨 후에 찾아와야 할 것이다.”
송운은 해남마제가 마지막에 남겼던 말을 곱씹었다.
그의 자신감에는 이에 걸맞은 힘이 있었다.
분했지만, 사실이었다.
강자존!
그 말은 작금의 무림 전체에 해당되는 말이기도 했다.
‘해남마제의 말이 맞다.’
힘없는 자에겐 발언을 할 권한조차 주어지지 않고 죽임을 당하는 곳이 바로 이곳, 무림인들의 세상이다.
이번엔 적이 순순히 물러서 주었지만 두 번씩이나 그럴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더군다나 해남파 또한 중원의 진출을 호시탐탐 노려보는 곳이 아니던가?
그 정도의 세력으로 지금껏 나서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보일 지경이었으니.
마음만 먹는다면 여차하면 무림맹을 제치고 해남파가 장악하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아니, 충분히 그러할 것이다.
초절정 고수가 백이 들러붙는다 한들 한 명의 이기어검을 다루는 이를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어찌 범 한 마리를 개미가 떼로 몰려든다고 이길 수 있단 말인가?
광동마문이라고 불릴 만큼 해남파는 마교와는 또 다른 악이다.
그런 이들이 날뛰는 세상이 온다면 가족들 또한 무사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송운은 이를 악다물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내가 더 강해져야 하겠구나.’
한 집단의 우두머리가 심검(心劍)의 경지에 근접하게 올라있다. 수하들이라고 하여도 절대 만만치 않은 상대가 될 것이다.
그들과 싸워 이길 가능성을 일 할이라도 늘리기 위해서는 잠시간 이동하면서 나는 짬마저도 모두 수련하며 노력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싸워보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 될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노력해야,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잡아볼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을 다잡은 송운이 땅에 누였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더 노력하고 놈보다 더 앞서나간다.’
송운의 두 눈에 빛이 반짝였다.
* * *
한편 송운이 온 힘을 쏟아 수련에 매진하고 있을 때, 무림맹에서도 가만히 넋 놓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지켜보고 있을 순 없었다.
하여 은밀히 사람을 보내 마교와 해남파가 동시에 움직인 이유를 알아보느라 정신없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무림맹 본단 내부.
조용히 앉아 차를 마시던 백능이 제갈염의 잔에도 차를 따라주며 넌지시 물어왔다.
쪼로록.
“좀 알아보았는가?”
“예, 맹주님.”
“그래. 대체 해남파와 마교가 동시에 움직인 연유가 무엇이라 하던가?”
백능의 물음에 제갈염이 표정이 썩 좋지 않다.
그 표정에서 이미 티가 났다.
‘좋지 않은 소식임은 틀림이 없겠구나.’
이윽고 제갈염이 입을 열었고 그가 꺼낸 이야기는 백능의 예상보다 훨씬 좋지 못했다.
“누군가 무황비고가 북경에 있다는 소문을 퍼뜨린 듯합니다.”
“음……?”
백능은 놀란 토끼처럼 눈이 동그랗게 커다래지면서 제갈염을 바라보았다.
무황비고라니!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본 적이 있는 존재였다.
하나 모두가 전설로만 들어왔을 뿐.
그 누구도 실제로 보았다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 존재가 왜 지금에 와 갑작스레 들춰졌단 말인가?
백능은 급해지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 뒤 제갈염에게 다시 물었다.
“그것은 오래전부터 전설처럼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아무도 사실인지는 밝히지 못하였다고 알고 있네만.”
“그렇습니다. 맹주님 말씀대로 수많은 무인이 찾으려 하였지만 결국엔 찾지 못하고 모두 포기 했었지요.”
“허……! 한데 그러한 것이 어찌 이리 갑작스레 나타났다는 말인가?”
제갈염이 이에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이었다.
“후우. 그건 아무리 파 내봐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베일 속에 꽁꽁 감춰 그 꼬리를 찾으려야 찾을 수 없도록 뚝뚝 끊어놓았더군요.”
제갈염의 말에 백능이 지그시 눈을 감으며 희고 정갈한 자신의 수염을 쓸어내렸다.
‘무황비고라……. 수십 년 전에도 그로 인해 수많은 무인이 싸우고 죽어 나갔더랬지. 그랬던 것이 또다시 고개를 들고 수면 위로 올라왔단 말인가. 하나 이것이 정녕 사실이라면……!’
그의 복잡한 마음을 아는지 맑게 갰던 하늘에 먹구름이 몰리면서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허허허. 너무 오랫동안 무림이 조용하다 싶었거늘……. 결국 무슨 사달이 나도 날 모양일세. 비가 올 듯 말 듯한 하늘의 모습이 꼭 당금의 무림 같구먼.”
백능은 말을 끝내며 근심 가득한 얼굴을 한 채,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우르르릉.
툭. 투두둑.
그러자 백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응답이라도 하려는 듯 하늘에서 굉음을 내며 온몸을 비틀어 짜내었고, 이내 비가 한 두어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맹주님 말씀이 옳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되도록 큰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말입니다.”
“으음……. 지금 이 이야기를 알고 있는 자가 누가 또 있는가?”
“아직은 저와 정찰조장. 둘뿐입니다.”
“그러한가? 하면 내일 날이 밝는 대로 황궁으로 연락을 넣게. 그날, 다른 이들에게도 알리도록 하지. 그전까지는 함부로 이야기가 새어 나가서는 안 되네. 그리고 사실 여부도 알아보게. 알겠는가 총군사?”
진실이든 거짓이든 누군가 어둠 속에서 전 무림을 상대로 혼란을 가중케 하기 위한 농락일 수도 있다.
이는 무림맹주로서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백능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예, 알겠습니다. 맹주님.”
* * *
쏴아아.
‘무슨 놈의 비가 이리도 오는 것인지.’
송운은 수련장 가운데 크게 들어선 나무 아래서 어젯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를 맞으며 수련하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다만 밤사이 꽤나 많은 양의 비가 내린 탓에 땅바닥에 물이 한 웅덩이 가득 고인 것이다.
‘날씨가 제법 따뜻해진 탓인가?’
아직 겨울이 다 지나가지 않았는데, 눈이 아닌 비가 오니 이상하게 여길 법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