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화
“상단 일도 꽤나 바쁠 터인데, 어찌 이 먼 곳까지 왔는가?”
“친구가 약혼식을 올린다는데 안 올 수가 있나. 게다가 아버지께서도 함께 오자고 하셨네.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하하.”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유가량은 참으로 밝은 친구였다. 곁에 있으면 덩달아 자신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모쪼록, 여기까지 왔으니 마음껏 들고 가게. 지난번 일 또한 자네 덕분에 생각보다 더 많은 이익을 남겼다네. 고마우이.”
“그 일은 나중에 얘기하도록 하지. 이 좋은 날 일 얘기를 꺼내서야 쓰겠나? 그럼 좀 있다가 봄세.”
한참을 이야기 나누던 그를 보내자, 그 뒤로 양조광의 모습이 보였다.
연락이 닿지 않는 천조회는 오지 못할 테지만 양조광에겐 미리 서신으로 약혼식이 있다고 전하자 두말없이 오겠다는 답신이 왔었다.
아마 그의 행색을 보아하니 날짜에 맞추어 방금 막 도착한 듯했다. 그렇게 송운이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양조광이 먼저 그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운 공자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그는 여전히 온화한 미소와 함께 송운을 바라보았다.
“난 늘 잘 지내고 있지. 너야말로 괜찮은 거야? 이 대체 얼마 만에 보는 얼굴이야?”
집을 떠난 후, 줄곧 편지로만 서로의 안부를 전하던 양조광의 모습을 보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아직 언제 돌아오겠다는 약조도 없던 그이기에 더욱 반가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아, 그리고 운 공자님. 약혼 축하드립니다. 이건 약소하나마 받아 두세요.”
양조광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그에게 건네준다.
함을 열어보니 잘 말려진 선명한 비취 같은 녹 빛이 도는 잎이 담겨있었다.
“이건……?”
“용정차(龍井茶)입니다.”
송운의 두 눈이 커졌다.
용정차라면 절강성(浙江省)의 향주(杭州)에서 재배되는 것으로 차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며 황실이나 귀족들이 아니면 그 얼굴을 보기 힘든 것이다.
이러한 것을 대체 어디서 구했단 말인가?
송운은 괜찮다며 거절하려 했으나, 이번엔 양조광이 더 빨랐다.
“뇌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데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하여 드리는 뇌물이니 사양 말고 받아 두세요. 운 공자님께서도 차를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그 향이 진하고 단맛이 나서 평서란 아가씨께서도 좋아하실 겁니다.”
그러고는 송운을 향해 미소 짓는 게 아닌가?
‘허허. 이번엔 내 차례라 이건가.’
송운은 한 방 먹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고마웠다.
그도 역시 자신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였을 터니 말이다.
“알겠다. 알겠어. 이번엔 내가 받을 차례로구나. 고맙다. 나중에 꼭 잘 마시도록 할게.”
양조광과의 조우를 마치고 한참을 돌아다녔을까?
송운의 눈에 누군가 또 한 명의 모습이 들어왔다.
“명도?”
“아, 이거 미래의 신랑이 될 이를 이제야 보는구만. 으음, 이곳까지 왔는데 얼굴 보기 이리 힘들어서야.”
“어찌 이곳까지 왔는가? 안휘성에서 여기까지라면…….”
“내 친우이자, 우리 가문이 자네 덕에 크게 은공을 입었네. 이런 좋은 날에 내가 빠져서야 되겠는가? 소식을 듣고 서둘러 올라왔지. 부모님께서도 축하한다 전해 달라 하셨다네. 건강해 보이니 좋구만. 나는 그저 자네를 축하하러 온 것뿐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말게.”
다행히 그의 안색을 보아하니 그 이후로 별일은 없는 듯했다. 가장 걱정되었던 이 중 한 명이다.
익히 양조광의 서신에 그의 이야기를 들었으나, 직접 보니 더욱 마음이 놓이는 송운이다.
‘다행일세. 자네를 이리 계속 볼 수 있다니.’
하나 송운은 그런 마음을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다.
오롯이 자신만이 아는 이야기를 그에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이미 전생의 일.
쓰라렸던 기억은 이제 저 멀리 날려 보내면 되는 것이다.
“아무튼, 이리 와주어 정말 고맙네.”
“하하. 이제 어서 미래의 부인이 될 여인께 가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시간이 꽤나 흘렀네. 그래도 약혼식이라고 자넬 위해 예쁘게 치장했을 텐데 이리 무심하게 돌아다니기만 하고 있어도 되는 것인가?”
그의 말을 듣고 나니, 그제야 평서란이 떠올랐다.
장명도의 말대로, 그녀는 오늘 최고의 여인이 되기 위해 곱디고운 치장을 했을 터.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어 반가운 마음에 정신이 팔려있던 것이다.
“아, 그렇지. 내 이리 정신이 없어서야……. 그럼 이따 봄세.”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그렇지. 평 소저가 많이 기다렸을 터인데…….’
서둘러 송운은 평서란이 있을 그곳으로 향했다.
* * *
‘정신이 많이 없으신가?’
평서란은 오늘따라 유독 얼굴을 보이지 않는 자신의 미래의 지아비가 될 송운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어색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입어본 화려한 복장에 치장까지.
화려하기만 하지 전혀 활동성이라곤 전혀 없는 치렁치렁한 옷깃이 그녀에겐 마냥 귀찮았다.
늘 무복만 입을 줄 알았지, 여인으로서 제대로 꾸며본 적이 없었던 그녀다.
그런 평서란이 참고 입고 있는 이유는 오롯이 송운.
그 때문이었다.
송운을 생각하면 가끔은 예쁜 옷을 입고 고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나 다른 여인들처럼 꾸밀 줄도 모르고 부끄러운 마음에 늘 시도조차 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바로 오늘.
그 기회가 온 것이다.
동경(銅鏡)을 통해 바라본 자신의 모습은 참으로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예뻐 보일까?’
곁에서 자신을 꾸며주던 시녀들이 너무 예쁘다며 감탄을 날려대도, 그녀 스스로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러갔고, 이제는 송운이 야속하게까지 느껴질 무렵.
누군가 자신이 있는 방 안으로 들어오는 기척이 들렸다.
“아……. 내가 많이 늦었구려. 미안하오.”
‘너무해요.’
순간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던 말을 뒤로 한 채, 이내 자신의 모습을 자각한 평서란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인다.
“괜찮아요. 조금 늦은 것뿐인걸요.”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안 것일까?
송운이 평서란을 향해 다가왔고, 이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따라 더욱 예쁘구려. 내 생에 본 여인 중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군.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온 줄 알았소.”
순간 할 말을 잃어버릴 만큼 멍해진 평서란의 얼굴에 홍조가 일었다.
‘예쁘다는 말이 이리도 설레는 말이었던가?’
살면서 예쁘다, 아름답다는 말은 수없이 들어왔다.
그때마다 귀찮음에 대꾸조차 하지 않고 싸늘하게 뒤돌아섰던 그녀다. 그런 그녀의 심장을 자꾸만 뛰게 하는 송운의 말은 스스로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두근두근.
자꾸만 커져 오는 심장소리는 조금만 더 가까워진다면 송운의 귓가에도 들릴 것만 같아 조바심이 들게 했다.
그때였다.
“커험, 으흠!”
“아, 아버지.”
“오셨습니까?”
약혼식이 곧 시작된다는 말을 전하러 온 평목단이 둘의 사이에 방해라도 되는 마냥 끼게 된 것이다. 하나 모두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은 무언가 알릴 신호가 필요했고, 차마 말로 하지 못한 채 헛기침을 한 것이다.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먼저 나가 있을 테니 천천히 나오너라.”
“아닙니다. 같이 나가시죠. 평 의숙……. 아니 장인어른.”
송운은 이제 더 이상 평 의숙부라는 호칭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급하게 말을 바꾸었다. 평목단은 그 소리가 영 나쁘지만은 않았는지 호탕하게 웃으며 답한다.
“으하하. 녀석 거, 호칭 참 어색하구나. 그래. 같이 나가자꾸나.”
밖으로 나오자, 평목단의 말대로 모두가 앞마당으로 모여 있었다.
“주인공들이 이제야 나오는구먼.”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 아닙니까?”
송운과 평서란이 나오자, 모두가 그 둘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평서란의 외모는 말할 것도 없었고, 송운 또한 큰 키와 체격.
그리고 날카로운 턱선과 함께 남자다운 외모가 그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하하. 감사합니다.”
“자, 모두들 마음껏 드세요. 오늘은 기쁜 날이니까요.”
정식 결혼식이 아니라 특별한 행사는 없었으나, 초대된 모든 이들이 함께 먹고 마시며 그 둘을 축하했다.
“내가 한마디 축하해도 되겠는가?”
그때, 평목단이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송악이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이자,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리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 모습을 본 평서란은 잠시 걱정스러운 듯 쳐다보았다. 저런 표정을 짓는다는 건 뭔가 또 짓궂은 무언가 있다는 것이니까.
“우선, 오늘 와주신 모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운이와 내 딸 서란아. 바로 합방을 하지 못한다는 게 좀 아쉽긴 하겠지만, 결혼식도 머지않은 미래에 올리게 될 터니 조금만 참거라. 나도 빨리 금쪽같은 손주가 보고 싶으니……. 그렇지 않은가 악이? 으하하!”
“커흠. 난 손녀도 괜찮다네.”
가만히 앉아 있던 송악까지 한마디 거들자, 평서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굴만 발개졌고 대신 송운이 그에 답했다.
“걱정 마시지요. 장인어른. 아버지. 혼인까지 올리거든 꼭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래그래. 사내라면 그 정도 포부는 있어야지. 암. 역시 내 사위로다!”
“와하하하!”
“좋구만 좋아!”
평목단의 말을 시작으로 점점 분위기는 뜨겁게 달구어져서 중천에 떠 있던 해는 어느덧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저 멀리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송운의 입가에 미소가 한가득 머무른다.
‘참 먼 길을 왔구나. 하나, 앞으로는 더 많은 길을 걸어가야겠지.’
비록 오늘이 올 때까지 한 해 동안 많은 일이 있었으나, 가족들 모두 무사히 자신의 곁에 있지 않은가?
‘게다가…….’
고개를 틀어 시선을 평서란에게로 향했다.
자신의 곁에서 앞으로 일생을 함께해 나갈 그녀와도 서로의 마음을 나누며 행복한 미래를 꿈꿔나갈 터다.
송운은 평서란의 손을 슬며시 꼬옥 쥐었다.
“송 소협?”
놀란 눈이 된 평서란도 이내 그의 손이 싫지 않았는지 웃으며 그의 손을 맞잡는다.
어쩐지 이 사람들과 모두 함께라면 어떠한 고난이 오더라도 다 막아낼 수 있을 것만 같다는 무언의 자신감이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