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
‘어마어마한 실력이구나. 자칫하면 그대로 목을 내줄 뻔한 건 나였어.’
여인의 몸으로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인 평목단조차 인정하는 무공을 갖춘 평서란이다.
한데 그녀가 온 힘을 다해 싸워야 할 만큼 적의 실력도 만만치 않았다.
‘과연, 십대 마왕의 반열에 오른 자인가?’
만만하게 볼 상대는 역시 아니란 소리다.
하나, 놀란 건 평서란 만이 아니었다.
잔지괴왕도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제기랄. 계집이라 하여 별것 아니라 생각하였거늘! 설마하니 내 무공과 맞먹을 줄이야.’
처음과는 확연히 다르게 그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단 몇 수만이 오갔을 뿐이었다.
하나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상대를 파악할 수 있었고,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무작정 달려든다고 하여 될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서로 기 싸움을 벌이며 빈틈을 노리고 있을 때쯤.
수풀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명의 시선이 모두 그곳으로 향했다.
* * *
바스락.
평서란의 목덜미에 순간 좋지 않은 예감과 함께 서늘한 기운이 들어선다.
‘설마……?’
자연스럽게 옷을 털어내며 잔지괴왕을 향해 다짜고짜 핀잔을 늘여 놓았다.
“이놈아, 이런 곳에서 아직도 애를 먹고 있는 것이냐? 쯧쯧. 그러니 네가 평생 가야 만년 꼴등이나 하는 게야.”
약간 왜소한 체격에 키는 육 척이나 될까?
퀭해 보이는 눈매에, 나이가 꽤나 들어 보이는 노인의 주변으로 소름 끼치는 음기(淫氣)가 가득 들러붙어 있었다.
그녀의 예감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들어맞았고, 잔지괴왕이 새로이 나타난 아군인 노괴(老怪)를 향해 옷깃을 들추며 투덜거렸다.
“쳇, 결국 납시셨구만. 저 계집년이 생각보다 보통이 아니란 말이요! 이것 보십쇼. 내 옷깃이 잘려 나갔단 말입니다. 끄응.”
“호오? 저 계집이 말이더냐?”
신기하듯 쳐다보던 노괴는 이내 그것보단 다른 곳에 마음이 간다는 듯, 평서란을 향해 음심 가득한 눈빛을 쏘아 보낸다.
‘칼을 쓰는 계집년이 생긴 것은 곱게도 생겼구나. 흐응. 벗겨놓으면 제법 볼만 하겠어. 성격도 제법 괄괄한 듯하고……. 데리고 놀 맛이 나겠으나, 시간이 없다는 것이 한이 되겠구나. 끌끌.’
진득이 자신의 몸을 위아래로 즐겁게 훑어보는 그 눈이 평서란에겐 소름 끼치게 다가왔으나, 그보다 더 먼저 드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기분 나쁜 놈이 한 명 더 늘었구나. 이리된다면……. 승산이 일 할로 줄어버린다.’
“자, 더 이상 어린아이 장난은 집어치우고 서둘러 일을 마치자꾸나. 네놈 기다리다 천마(天魔)께서 목이 빠지시겠다. 이놈아.”
딱!
손에 들고 있던 괴이한 모습을 한 지팡이로 잔지괴왕의 머리를 때린 그에게 한소리를 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그 노괴는 평서란을 향해 달려들었다.
파바바밧-!
섬광처럼 날아드는 그의 지팡이는 평서란의 이목을 어지럽혔고, 평서란은 단 한 번의 공격도 가해보지 못한 채 피하기에 급급해졌다.
“흡……!”
“클클. 확실히, 저놈이 애를 먹인 만큼의 값은 하는구나. 하나, 그게 너의 한계니라. 쯔쯧. 시간만 많이 있었다면 내 친히 네년과의 동침(同寢)을 허락했을 터나……. 이 늙은이에게는 아쉽게도 시간이 없구나. 이쯤에서 장난은 그만하도록 하자꾸나.”
스르릉.
정말 아쉬워 보이는 듯 입맛을 다시던 노괴가 지팡이의 끝을 잡아 뽑아내자, 차가운 금속의 소리를 내며 둥근 모양의 뾰족한 날이 달린 창으로 돌변했다.
놀랄 틈새도 없이 그녀가 숨 고를 틈도 주지 않겠다는 기세로 섬광처럼 치고 들어왔고, 이윽고 잔지괴왕도 뒤지지 않겠다는 양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 모습에 서둘러 검을 들어 올린 그녀는 막아보려 했으나, 엄청난 마기가 터져 나옴과 동시에 눈이 저절로 감겼다.
콰아앙-!
“크헉!”
‘뭐, 뭐지?’
평서란은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도 검에 가해져야 할 충격이 없자 질끈 감겼던 두 눈을 떴다.
눈을 뜬 그녀는 놀라움에 동공이 커졌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자신을 향해 일격을 날려 오던 두 명의 마인이 모두 오 장이 넘는 거리로 튕겨 나간 것이다.
그리고 평서란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소? 평 소저?”
자신을 등 뒤로 하고 있었지만,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돌아보지 않아도 그가 누군지 단숨에 알 수 있었다.
“송 소협……? 어떻게 이곳에……?”
송운.
그가 돌아온 것이다.
“회포는 나중에 풀도록 하지.”
부드럽게 웃음 지은 송운이 그녀를 향해 말했다.
이제부터는 이 대 이의 싸움이었다.
* * *
“……잔지괴왕에 이어 음혼마왕(淫魂魔王)까지인가?”
송운이 조용히 읊조렸다.
둘 다 전생의 마교대전에서 한 번쯤 얼굴을 본 적이 있는 자들이었다. 직접 대적해 본 적은 없었으나, 스치듯 지나간 악연이 아니던가?
전생의 송운이었다면 숨을 죽인 채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고, 조화경의 경지에 도달했다.
굳이 도망갈 필요는 없었다.
아니 죽여야 한다.
그래야만 미래에 있을 마교대전에서 하나의 적이라도 줄일 수 있을 터다. 마교대전을 자력으로 막지 못한다면 이렇게 마주친 이상 살려둘 필요는 없다.
‘어쩔 수 없군. 게다가…… 그들이 죽이려고 했던 것이 평 소저라면 더더욱.’
송운의 마음이 정해지면서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
그런 그를 앞에 두고 나이는 들었으나 감각이 예민한 음혼마왕이 송운이 읊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본 노괴를 아느냐?”
하나 그 사내는 말 없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아무런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기에 오히려 그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답답함에 마음이 조급해져 온다.
그가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불과 반 각 전까진.
한데, 애송이 따위가 십대 마왕에 들어 있는 자신과 잔지괴왕의 공격을 일격에 막아 냈다. 막아 낸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들의 이름을 알고 있기까지 하질 않은가?
“형님. 저 핏덩이가 지금 우리를 노려보고 있지 않수? 치지 않고 뭘 그리 망설이고 있는 거요?”
“조용히 하거라.”
“쳇, 만날 이런 식이지.”
여전히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는 아둔한 잔지괴왕을 한심한 듯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송운에게로 그의 시선이 향했다. 막내인 잔지괴왕이야 이미 많이 노출되었으니 그렇다 한들 자신의 이름은 잘 아는 이가 없다.
게다가 내력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잘 갈무리하여 상대방으로 하여금 알아챌 수 없도록 꽁꽁 감추고 있거나 아니면 정말로 내력이 없는 자. 둘 중의 하나겠지만 당금의 상황으로 판단하건대 결코 후자는 아니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은 그의 본능이 직감적으로 위험한 인물이라는 신호를 주고 있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난다면?
가뜩이나 땅에 떨어진 마교의 위신이 저 극한의 나락까지 추락할 것이다. 그건 머지않은 미래를 계획하고 있는 마교에게 너무도 큰 타격이 되어 돌아올 터.
‘물러설 수 없다.’
마음을 다잡은 음혼마왕은 이내 자세를 취했다.
“말이 필요 없다면 더 이야길 나눌 필요가 없구나. 오거라.”
“이노옴!”
음혼마왕의 말을 끝으로 재개된 싸움은 송운이 압도적이었다.
아니, 싸움이라 부르기도 민망해질 정도였다.
송운은 굳이 검을 뽑을 필요도 없었다.
퍼벅!
송운의 묵직한 내공이 실린 주먹이 그의 말에 발끈하여 달려오던 잔지괴왕의 복부에 정확히 맞아 들어갔고 급하게 독문 무공인 괴혈마검(怪血魔劍)을 펼치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커허억!”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지자 그 모습을 본 음혼마왕이 소리쳤다.
“잔지괴왕!”
‘저 멍청한 녀석이!’
평소 욱하는 성격에 적의 도발을 참지 못하고 무식하게 달려든 탓이었다.
하나 그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평서란이 자신의 앞길을 막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나?’
한 년이라도 없애야 한다.
음혼마왕의 창끝에 붉은 마기가 어리기 시작했고, 이내 그 끈적끈적한 마기가 평서란을 향한다.
카앙!
‘어딜!’
송운의 협공에 힘입은 평서란의 검이 더욱 빨라졌고 순간 몸에 일은 반동을 이용해 그의 창을 멀리 쳐내었다.
송운도 송운이나 평서란 또한 고수다.
도중에 음혼마왕이 끼면서 머릿수로 밀린 것뿐, 결코 쉽게 당해줄 상대가 아니었다.
콰직!
그 순간.
송운의 일격에 몸이 떨어져 나간 잔지괴왕의 머리통이 그의 발에 의해 박살이 나며 사방으로 피와 뇌수를 흩뿌리며 명을 다했다.
송운이 나타난 지 일각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더 이상 마왕들에게 유리한 싸움이 아니었다.
설상가상 잔지괴왕이 송운에게 목숨을 잃고 난 후, 사방을 돌아봤을 때 뒤에서 싸우고 있던 마두들 또한 이미 밀릴 대로 밀려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선 버티고 있어봤자 소용이 없다.
으득.
‘분하나 지금은 물러가마. 개죽음이 될 뿐이니……!’
“후퇴하라!”
* * *
단 한 명의 새로운 등장으로 완벽하게 승산을 움켜쥐었다.
“이겼다!”
모두의 입에선 환호성이 퍼져 오른다.
음혼마왕이 남은 마두들을 이끌고 저 멀리 도망가는 모습을 확인한 송운이 그제야 평서란의 곁으로 다가왔다.
“어디 다친 곳은 없소?”
다정다감한 말투로 자신에게 걸어오는 송운의 모습에 평서란은 마음이 놓였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그가 돌아온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있는 곳으로.
휘청.
평서란은 간신히 힘을 주고 있던 다리에 힘이 순간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
그리고 넘어지려 하는 그녀의 허리를 송운이 부드럽게 감싸온다.
‘어쩐지 어디서 본 것만 같은 상황인데…….’
이러한 상황에서도 웃음이 났는지 고개를 슬쩍 돌리는 평서란을 향해 송운이 걱정이 잔뜩 배인 목소리로 물어왔다.
“어디 다치기라도 한 것이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이번엔……. 제가 도움을 받았네요. 고마워요 송 소협.”
“음, 이걸로 지난번 그대의 도움을 받은 건 갚은 셈이 되는구려.”
“그렇게 되나요? 후후.”
말은 농담처럼 주고받았으나, 사실이다.
그가 없었다면 필히 큰 상처를 입었거나, 회복 불능한 상태에 빠졌을 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