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전생-64화 (64/275)

제64화

송운은 책상 앞에 앉아 눈을 감았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가을이라……. 그때까지면 충분할까?’

약혼식은 그의 기우(杞憂)와는 달리, 기한이 밀린 상황이다.

아니, 어차피 고민한다 한들 바뀔 결정은 아니었다.

‘곧바로 치르자 하실 줄 알았거늘.’

약혼식이 밀린 것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오히려 다행이라 여겼다.

어차피 둘의 인연은 질긴 넝쿨처럼 얽혀있다.

이미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고,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질 않은가?

초조할 필요는 없었다.

송운은 가만히 앉아 머릿속에 평서란을 떠올렸다.

‘믿고 기다려 줄 것이다.’

그녀라면 충분히 그리해줄 것이다. 자신이 아는 평서란은 그만큼 현명하고 강한 여인이다.

잠시간 떨어져 지낸다 한들 참고 견뎌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은 비록 학문 또한 공부하고 있으나 같은 무인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그 누구보다 송운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해줄 수 있는 이가 바로 평서란이었다.

‘너무도 쉽게 무너졌다.’

송운은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찌릿.

그와 동시에 아직 채 다 아물지 못한 어깨의 상처가 아려오는 듯했다.

그 정도로 결코 가볍지 않은 상처다.

평서란이 제때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목숨까지 잃어버릴 판국이었다.

결코, 방심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나약했던 것뿐.

적은 그만큼 강하다.

‘한데, 난 아직 그 존재조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날 마주친 이는 흑야의 수많은 저력(底力) 중 한 명일 것이다. 아니, 그 검은 무복의 사내보다 더 강한 고수들이 가득할지도 모른다.

그런 적들이 자신이 누군지 알고 있다.

적을 알지도 못하는 판국에, 적은 자신에 대한 정보를 쥐고 있다.

그만큼 위험한 것은 없었다.

그 생각은 이내 송운의 간담(肝膽)을 서늘하게 만들었고, 송운의 마음을 더욱 빠르게 재촉시켰다.

‘날 더 강하게 만들어야만 해.’

자신이 무너지면 가족의 평화가 위협받는다.

멀리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미 이번의 결과가 이를 대변해주고 있질 않은가?

아무리 천조회와 양조광이 뒤를 받쳐준다 한들, 자신이 강하지 못하다면 그조차 무너져 내릴 것이다.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다.’

두 번으로 이어지면 그것은 실수가 아닌 실패가 된다.

그리고 그 실패는 최악의 결과를 가져올 터.

‘지금에 안주해선 안 된다. 적어도 그녀에게까지 짐이 될 수 없지 않은가? 아무래도…… 더는 미루어선 안 되겠다.’

송운의 두 눈이 어둠 속에서 날카롭게 빛났다.

* * *

다음 날 아침.

길고 긴 겨울의 밤이 지나고, 송운은 가족들을 포함해 평목단과 평서란까지 모두 한자리에 불렀다.

“다름이 아니라…….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급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송운의 한마디가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래, 할 말이 있으니 이리 모두를 불렀을 터. 편히 말해 보거라.”

“……폐관수련에 들고자 합니다.”

“?!”

그들에겐 너무도 갑작스러운 송운의 발언에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다만 그 뜻을 알지 못하는 송하만이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

누구 하나도 반문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말없이 턱을 쓰다듬고 있던 송악이었다.

“으음, 폐관수련이라……. 급작스레 결정한 연유가 무엇인지 물어도 되겠느냐?”

“지금보다 강해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겁니다.”

송악이 바라본 아들의 모습은 굳건해 보였다.

둘의 눈동자가 마주쳤으나 흔들림이 없다.

이는, 이미 그 결정을 굳혔다는 뜻일 터.

송악은 아들의 그 눈빛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평소의 그였다면 한 번이라도 말려보려 했을 테지만, 이번만은 상황이 달랐다. 무언가 모르긴 몰라도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송악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네 뜻이 그러한 것이라면…….’

송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래. 이미 네 결정은 확고한 듯하구나. 말린다고 될 일은 아니겠지. 그리하도록 하거라.”

이내 기다렸다는 듯 예령도, 평목단도 모두 수긍하는 반응을 보였다.

“아비가 허락한다고 하는데, 내가 무어라 할 게 뭐 있겠느냐? 다만, 반드시 강해져서 돌아오거라.”

그리고 그 순간, 평서란과 눈이 마주쳤다.

송운의 예상처럼 별다른 말은 없었다.

그저 그를 향해 미소 지어줄 뿐.

‘고맙소. 평 소저.’

이로써 가족들의 허락을 모두 받아낸 셈이었다.

* * *

허락이 떨어진 송운은 서둘러 폐관수련에 들어갈 준비를 시작했다. 막상 준비하다 보니 생각보다 그리 챙길 건 없었다.

다만, 절대 빠뜨리면 안 되는 것이 있었으니.

‘음, 역시 벽곡단은 필히 챙겨가야겠지.’

송운은 폐관수련에 들어가면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상황이기에, 제법 많은 양을 준비했다. 아무것도 없는 동굴 속에서 유일하게 많은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는 수단이었기에 벽곡단은 당연히 필수였다.

한참을 이것저것 챙기는 송운의 뒤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거, 설마 다 챙겨 가시려고요?”

평서란이었다.

평소와 똑같이 검푸른 무복을 차려입은 평서란은, 다른 여인들처럼 분칠하며 치장을 하진 않았으나 그의 눈에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아름다웠다. 더욱이 그녀에게서 늘 맡을 수 있는 살구 향은 그의 마음을 더욱 설레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그런 그를 뒤로한 채 그녀는 족히 한 가마니는 되어 보이는 양에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그것이……. 하하. 좀 과했소? 얼마나 필요할지 감이 오질 않아 넉넉히 준비한다는 것이…….”

사그락.

송운도 민망했는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슬그머니 조금 퍼낸다. 그 모습에 평서란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풋.”

‘가끔 이런 의외의 귀여운 면이 있으시다니까.’

“그 정도 양이면 일 년은 족히 넘게 드시겠어요. 얼마나 그 안에서 계시려고요.”

평소와 다르게 살짝 새침한 그녀의 말투에, 송운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게 할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크흠. 평 소저 혹여……. 내가 보고 싶어질까 걱정이라도 되는 것이오?”

“당연히…….”

‘보고 싶지 않겠어요?’

“당연히?”

“아, 아니에요. 그것보다 지난번의 상처는 다 나으셨나요?”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오는 송운의 얼굴을 뒤로 한 채, 순간 평서란은 자신도 모르게 목구멍까지 차오른 그 말을 애써 삼키며 말을 돌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본심을 그대로 드러낼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아직은 그를 향한 마음을 전부 다 들키고 싶진 않았다.

그런 마음은 약혼식을 올린 뒤 나누어도 충분할 터다. 아니, 사실 그것보단 그 마음을 들키는 순간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을 놓아버린 채 그를 보내기 싫어질 것만 같았다.

송가가 모두 북경으로 온다는 소식에 송운을 매일같이 볼 수는 없더라도 전보단 더 자주 볼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부풀어 올라있던 평서란이었다.

한데, 그런 그녀의 생각은 한순간에 깨져버렸다.

송운이 북경으로 올라오기 무섭게 바로 다음 날 폐관수련에 들어가겠다며 선언해버린 것이다. 그는 허락해 달라 말하였으나, 실상 그건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그런 송운이 야속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같은 무인으로서 그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평서란은 흔들리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조금만 더 참으면 돼. 지아비가 될 사람의 앞날을 방해할 셈이야? 지금까지도 잘 참아왔어. 서란아.’

평서란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때, 송운이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평 소저 덕분에 이젠 거의 다 나은 것 같소. 그 약. 참으로 잘 들더군. 흉이 조금 크게 남긴 하였지만……. 뭐, 사내놈이 이 정도의 흉터는 가지고 있어도 나쁠 건 없지 않겠소?”

‘바보 같은 사람.’

웃으며 어깨를 내보이는 그의 모습에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버렸다.

‘참지 못했어.’

처음이었다.

검을 손에 쥐면서 단 한 번도 이성을 놓아본 적이 없는 그녀다.

검을 쓸 때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배웠다.

한데 눈앞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송운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터져나가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다.

그때 깨달았다.

정말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을 넘어서 사랑하고 있다는 걸.

그랬기에 두 번 다신 그가 다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앞으론 제발 몸조심하세요.”

“하여 이리 폐관수련에 들어가려는 것이 아니겠소?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그대에게 걱정 끼치는 일은 앞으로 하지 않을 테니.”

화악.

좀 전과는 달리 사뭇 진지하게 다가오는 송운의 모습에 평서란은 얼굴이 달아올랐는지 화끈함이 느껴졌다.

하나, 왠지 모르게 그 느낌이 싫진 않았다.

그랬기에 더더욱 확답을 받고 싶었다.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그 말……. 약조하실 수 있으신가요?”

“내, 꼭. 약조하리다.”

송운은 그런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앞으론 내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 그리고 내가 그대를 지켜줄 수 있도록 꼭 더 강해져서 돌아오겠소. 평 소저.”

“송 소협…….”

잠시 머뭇거리던 송운이 이내 조금씩 그녀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온다. 점점 송운의 얼굴이 그녀의 얼굴에 가까워져 왔고, 평서란의 눈이 자연스럽게 스르륵 감겼다.

그리고 그 붉은 앵두와 거친 입술이 포개어지는 순간, 익숙한 살구향이 그의 코끝을 간질여왔다.

둘의 첫 입맞춤이었다.

* * *

짹짹.

정겨운 새소리에 눈을 뜬 송운은 어젯밤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조심스레 입술을 만지자 아직도 그녀의 부드러운 촉감이 남아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린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내가 꿈을 꿨나?’

재차 생각을 곱씹었으나, 아니었다.

‘허허…….’

송운은 몹시 들뜬 기분으로 짐을 챙겼다.

얼마 되지 않는 짐을 들고 방문을 나섰을 때, 온 가족들이 자신을 배웅하러 나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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