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화
송악이 결단을 내린 뒤, 날이 밝자마자 이사를 할 준비를 하라 일렀기 때문이다.
이미 정해진 것인데 꾸물거릴 필요는 없었다.
송운은 그동안 모아두었던 자금을 풀어 이곳에 남게 될 식솔들에게 퇴직금 비슷한 형식의 돈을 지급하고 있었다. 함께 북경에 가기로 한 이들은 바삐 짐을 쌌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남기로 한 사람들은 대다수 이 지역에 뿌리 깊게 자릴 잡은 이들이었다.
송운은 길게 늘어진 줄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나마, 조광이에게 맡기고도 이만큼이 더 남아서 다행이구나. 그래도 퇴직금은 넉넉히 줄 수 있겠어.’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마음 편히 발걸음을 뗄 수 없었을 터다. 자신들은 이사를 가면 그만이었지만, 그들은 평생을 일한 일자리를 잃는 셈이니.
“저는 아무래도 따라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노환이 드신 홀어머니께서 죽는다면 꼭 평여현에서 눈을 감고 싶다 하시어……. 송구합니다.”
거듭 고개를 숙이며 송구하다 말하는 이에게 송운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에 전낭(錢囊)을 쥐어주었다.
왕소희.
어린 나이에 꽤나 오랫동안 집안에서 일한 사람이었기에 거의 인생의 반을 넘게 이곳에서 보낸 아이였다. 일찍 아비를 여의고 집으로 들어와 유난히 정이 가는 식솔 중 한 명인지라 같이 가자 하고 싶었으나, 그녀의 사정 또한 무시할 수는 없는 법.
조금은 씁쓸해지는 마음을 달래며 그녀에게 말했다.
“아니다. 되레 이리 급작스레 이사를 가게 되어 미안하구나. 많은 돈은 아니나, 한동안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게다.”
그녀는 그가 쥐여준 금액을 보고는 곧 너무 큰 돈이라 여겼는지 거절하려 했다. 하나 송운은 그를 제지했고, 끝까지 돈을 챙겨주었다.
“이, 이건 너무 많습니다. 큰 공자님. 하니…….”
“거절하지 말거라. 그동안 우리 가문을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해 준 보답이다. 끝까지 책임져 주지 못한 미안함도 함께 담았으니, 거절하지 말고 받아 두거라.”
“으흑……. 공자님…….”
결국 왕소희는 어떻게든 챙겨주려는 송운의 마음 씀씀이에 참지 못하고 왈칵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녀를 달래며 보내는 송운의 마음 또한 편치는 못했다.
코끝을 찡하게 울리는 아릿한 이 기분은 그를 잠시 멈칫하게 했으나 빨리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미련을 갖기엔 이미 집은 칠 주야 후, 다른 사람에게 넘기기로 하였고 아침 일찍 북경으로 먼저 넘어간 평목단이 집을 서둘러 알아봐 주기로 되어 있었다.
‘더는 미련을 가져선 안 되겠지.’
왕소희를 비롯해 한참을 반복했을까?
그러다 보니 어느덧 밤은 깊어져만 갔고, 길었던 줄도 모두 사라졌다.
‘참으로 고요하구나.’
늘 사람으로 북적이던 집이었는데, 모두가 빠져나가고 나니 공허(空虛)하기 그지없었다.
송운은 집을 한 번 크게 돌아보았다.
집 안채부터 시작해서 어릴 적 동생들과 숨바꼭질을 하던 곳, 동생들과 함께 수련을 했던 수련장. 그리고 끼니때마다 가족들과 같이 식사를 했던 곳.
그 모든 곳이 하나라도 잊고 싶지 않다는 듯 그의 눈에 그림처럼 박혀 들어온다.
비록 지금은 화마로 곳곳이 보기 흉하게 변하긴 했으나, 집이라는 존재에서 풍기는 포근함은 여전한 것일까?
그 추억들이 모두 떠오르면서 송운의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결국, 회귀하고 나서도 이 집은 떠나게 되는구나.’
처음 돌아왔을 때, 이곳에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음에 놀랐고, 가족들의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런 집을 이젠 또 다른 이유로 떠나야 하니, 아쉬운 마음 또한 적잖아 생길 수밖에.
‘그래, 가족을 떠나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함께 가지 않느냐? 또 다른 곳에서 새로운 추억을 쌓아 가면 그만인 것이지.’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 할 때다.
그것은 지금보다 훨씬 더 크게, 멀리 날아갈 도약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시간이 되리라.
송운은 문득 떠오르는 한 구절을 조용히 곱씹었다.
‘일신 일일신 우일신(日新 日日新 又日新)이라 하였던가…….’
옛 고대 왕조인 은나라를 세운 탕왕(湯王)이 반명(盤銘)에 남긴 말로서 날로 새롭게 하여 나날이 새롭게 하며 또 날로 새롭게 하라는 뜻이었다.
그 한 구절이 송운의 마음속에 깊게 와 닿았다.
‘맞는 말이다. 어제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선 발전해야 한다. 발전이 없는 이에겐 미래가 없는 법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시작을 위해선 잠시 쉬어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터다.
심기일전(心機一轉).
그야말로 지금이 그때인 듯했다.
조용히 몸을 낮추고, 더 큰 미래를 위해 도약해야 한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이미 예정되었던 화마는 지나갔고, 앞으로의 일은 이젠 송운도 전혀 알 수 없다. 어떠한 위기가 닥쳐올지 모르기에 더욱 철저해져야 한다.
송운뿐만이 아니다.
다들 이번 사건으로 인하여 마음속 가득히 이를 갈고 있을 터다.
따로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려면 나도 어서 내 할 일을 해놔야겠군. 시간이 빠듯하겠어.’
이사를 제외하고도 자신의 말대로 기다리고 있을 천조회에게 주어야 할 것이 있었다.
서둘러 일을 마쳐야 했다.
* * *
어느덧 시간은 빠르게 흘러 약조된 칠 주야가 흘렀다.
그 시간 동안 매일 밤을 거의 새다시피 보낸 송운의 눈 밑은 거뭇거뭇해져 있었다.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한참 마당 주변을 서성이던 송운의 눈에 기다리던 천조회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저 반가워 보이는 송운과는 달리 단 며칠 만에 이삿짐이 잔뜩 쌓인 송가의 앞마당을 본 그들의 표정엔 놀란 모습이 가득했다.
“오셨습니까?”
송운의 모습을 보자마자 동그래진 눈으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조총이 먼저 나서 물었다.
“주군.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마치 피난(避難)이라도 가는 사람들 같습니다, 그래.”
그의 말에 송운이 크게 웃으며 답한다.
“하하. 피난이라……. 어쩌면 그 말도 맞는 말이 되겠군요. 어찌하다 보니 북경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많이들 놀라셨나 봅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그의 말에 잠자코 서 있던 서사가 고갤 양옆으로 저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북경으로 이사라……. 그 결정이 어쩌면 좋은 방도가 되겠군요.”
서사 역시 송운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했다.
그런 송운의 말에 가장 신나 보이는 건 적돈이었다.
“북경……. 거기 맛있는 거 많을 텐데.”
“허어, 이놈아. 북경마저도 먹을 것 타령이냐? 하여튼, 못 말릴 놈일세. 크하하!”
하나, 핀잔을 주던 우곤도 북경으로 간다는 게 싫진 않았는지 크게 파안대소했다.
북경이라니!
늘 마을의 뒷골목을 전전하며 살아왔던 그들에게 북경이라는 곳은 너무도 크게 다가왔다.
“그, 그럼 우리는 다음에 돌아오면 북경으로 가면 되겠네요?”
“형님 그럼 우리도 그럼 큰물에서 놀게 되는 겁니까? 크으! 이 얼마나 멋집니까! 그러려면 더욱더 크게 성장해야겠습니다, 그래!”
“그래. 조총이 네 말대로 천자가 계신 곳이니, 그만큼 넓고 좋은 곳이겠지!”
다들 신나서 들뜬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쉬던 서사는 홀로 중얼거렸다.
“하아……. 큰 형님까지……. 다들 철들려거든 아직 멀었구만, 멀었어.”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흘리는 서사도 한편으론 이내 본인도 꽤나 기대가 큰지 목소리는 들뜸으로 인해 떨리는 듯했다.
기뻐하는 천조회의 모습을 보는 송운의 마음마저 덩달아 기분 좋게 만들었다.
‘다행이구나. 저리 좋아하니. 이래저래 잘 되었어.’
그리고 송운은 손에 들고 있던 총 다섯 권에 달하는 두툼한 책을 그들의 앞에 내밀었다.
“그건 뭡니까?”
혹여나 먹을 것인가 싶어 자세히 들여다보던 적돈은 곧 실망하는 모습으로 돌아섰고, 서사가 대신하여 받아들었다. 그것의 존재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이건…… 무공서가 아닙니까?”
열린 책 속에는 중간중간 사람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과 송운의 글씨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세세하게 각주(脚註)까지 전부 달려있어 무공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익히기 쉽게 되어 있었다.
“맞습니다.”
“언제 이런걸…….”
“하하.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너무 부담 갖지 마시고 받아 두세요. 분명 도움이 많이 될 겁니다.”
서사는 물론 가장 놀란 것은 우곤이었다.
‘언제 이 많은 것을……?’
촤라락-
그를 놀라게 한 것은 양뿐만이 아니었다.
한 권 한 권이 전부 척 보아도 알만큼 완벽한 신공절학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일류 혹은 그에 조금 못 미치는 무공들이었다.
하나, 그 수준은 최소 자신들이 어설프게 익히고 있었던 삼류나 이류 무공에 비견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것들이었다.
게다가 한 권 한 권마다 각자의 특성을 살려 익히기 쉽도록 잘 나뉘어 있었다. 필히 잘 익히기만 한다면 지금보다 최소 몇 배, 아니 몇십 배로도 더 강해질 수 있을 터다.
‘이것만 잘 익힌다면……!’
우곤의 눈에 강한 의지가 불타올랐다.
* * *
천중도법(天重刀法), 와선쾌포전(渦旋快砲箭), 절영환신술(絶影幻神術), 창천쾌검(蒼天快劍), 속웅분쇄각(速熊粉碎脚).
총 다섯 개의 무공서.
모두 전생에 송운이 무림을 떠돌 때 우연찮게 인연이 닿아 알게 되었던 무공들이다.
직접 익히지는 않았으나, 제법 쓸 만하다고 여겼던 것들만을 떠올려 천조회 각자의 특성에 맞추어 추려낸 것이었다.
그것을 준다고 하여 아쉬워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송운은 천조회를 믿었고, 결국 그 모든 게 자신에게 든든한 힘으로 되돌아와 줄 테니 말이다.
‘허허. 생각보다 더 많이 놀란 모양이구나.’
그가 느낀 대로 여전히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우곤을 향해 송운이 말했다.
“정확히 자신의 것을 집으셨군요. 첫 번째로 천중도법은 우곤 형님을 위한 것입니다. 본디 도를 다루시니, 익히는 데 그리 어렵진 않으실 겁니다. 기존의 무공과도 크게 엇나가는 게 없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시고 익히셔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