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화
비가 온 뒤 땅은 더욱 단단해진다.
실패는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할 것이며, 자신의 모습을 다시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랬기에 그의 말이 결코 틀린 것은 아니었다.
“주군…….”
그의 말에 감복한 것인지 그를 부르는 천조회의 목소리가 어느새 촉촉이 젖어있었다.
‘방심은 고수도 싸움에 패하게 만들 정도로 위험한 것이라는 걸 내가 잠시 잊고 지냈구나.’
송운 또한 할 말은 없었다.
그동안은 별다른 탈 없이 무난하게 성장해 나가고 있었기에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면도 없잖아 있었다.
하나, 이제부턴 그럴 일은 없을 터다.
조금 더 철저하게 다져나갈 것이다.
조금 더 은밀하게 움직일 것이다.
그래야만 이번에 한 실수를 다시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천조회는 지금보다도 더 어둠 속으로 융화되듯 숨어 들어가야 한다. 그 누구도 우릴 알지 못하게, 하나 우리는 하늘 아래 살아 움직이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해 더 잘 알아야 한다.
그것이 새로이 마음먹은 송운의 생각이었다.
“해서 이번에 저희끼리 하나의 결단을 내렸습니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서사의 목소리에 송운은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주군께는 송구한 말씀이오나……. 한동안 곁을 좀 떠나 있어도 되겠습니까? 아니, 그런 저희를 믿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들 나름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이번 일을 겪고 나서 이대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내려진 결정이었다.
다만, 그러기엔 송운의 허가가 필요했다.
천조회는 그가 만들어내었고 그를 위해 존재할 테니.
그의 말은 곧 법이었다.
그리고 곧.
송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마간의 시간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일 년. 딱 일 년이면 충분합니다. 그 안에 지금과는 달라진 모습으로 꼭 주군의 곁으로 돌아오겠습니다.”
굳은 의지로 가득한 답을 들은 송운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제는 송운이 답해야 할 차례였다.
천조회 모두의 시선이 가슴을 졸이며 송운에게로 향한 때.
그의 입이 열렸다.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이미 그대들을 믿고 있는데 불허(不許)할 이유가 무에 있겠습니까? 일 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
서사는 마음속으로 감탄을 외쳤다.
‘참으로 대단한 그릇이다. 사람을 품을 줄 알며, 어찌 다루어야 하는지. 그 모든 것을 한 곳에 다 담은 분이다. 우리가 모시기엔 정말 분에 넘치는 사람이로다!’
자고로 진정한 군자(君子)는 덕을 행할 줄 아는 이라고 하였던가?
송운은 그가 봐왔던 여느 사람들과는 달랐다.
잘난 사람은 잘난 값을 했고, 아는 만큼 서로를 불신한다. 한데, 그는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는 자신들을 한없이 믿어준다.
아니, 애초부터 그들을 먼저 믿어준 것이 송운이었다.
그랬기에 자신들에게 다가왔고, 손을 내밀어 주었다.
‘이분을 모시게 된 건 어쩌면 정말 큰 복일지도 모르겠구나.’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천조회 모두가 그에게 감복하고 있을 때.
송운이 끝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다만, 곧바로 떠나지 마시고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딱, 칠 주야만 기다려 주시면 됩니다.”
급작스런 그의 요청에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으나, 송운은 그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그때 뵙겠다는 말만을 남겼다.
* * *
양조광의 집.
‘이대로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게 되었구나.’
양쪽 손으로 머리를 둘러 싸맨 양조광은 빠르게 머릴 굴렸다.
심란함이 그의 마음속을 가득 헤집어 놓고 있었다.
송가가 불에 모두 타 없어질 뻔했다.
거짓말처럼 송운이 준비하자는 말을 한 지 일 년 만에 일이 벌어졌다.
‘적들이 먼저 우릴 치기 전에 미리 움직여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이번처럼 또 눈 뜨고 코 베일 상황은 또다시 곁으로 소리소문없이 다가올 테고, 위기는 언제든 들이닥치게 될 터다.
지금처럼 이 정도면 되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과 태도로는 분명 놈들에게 틈을 내어주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작금의 세상은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방식에 철저히 길들여져 있고, 약한 놈은 반드시 잡아먹힌다. 강해져야만 한다.’
탁.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양조광은 굳은 결의를 마쳤는지, 펼쳐두었던 책을 닫으며 몸을 일으켰고 어디론가 발걸음을 향했다.
* * *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양조광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송악의 거처였다. 그가 하고자 하는 일에 앞서 송가의 가장 웃어른이자 자신의 스승님인 그의 허락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똑똑.
“스승님, 저 조광입니다.”
하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안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설마, 이 시간에 계시지 않는단 말인가?’
“스승님. 안에 안 계십니까?”
걱정되는 마음에 양조광이 조금 더 목소리를 높여 부르자, 그제야 안에서 응답이 들려온다.
“들어오너라.”
방 안으로 들어가자 평소에 맡아오던 차향이 아닌, 독한 주향이 그의 코를 찔렀고 그 뒤로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송악의 모습이 보였다. 평소 술보단 늘 차를 가까이하던 그가 술을 마시는 걸 보면 아마 그도 속이, 속이 아닌 게 분명했다.
“제가 한잔 따라드려도 되겠습니까?”
송악이 그에 고개를 끄덕거리자, 양조광이 그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스승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어떤 일로 이리 입에 대지 않으시던 술을 드셨습니까.”
“그래……. 나는 멀쩡하구나. 그저……. 조금 답답한 마음에 한 잔만 입에 댄다는 것이 이리 마셨구나.”
“그래도 몸이 괜찮으시다니 다행입니다.”
다행이라는 양조광의 말에 송악의 입가엔 씁쓸한 미소가 걸린다.
“과연 이것이 다행인지 모르겠구나. 쓸데없는 나의 굳은 심지 때문에, 미움을 사 주변 모두에게 해를 끼친 것은 아닌지 나 스스로가 원망스러울 지경이니…….”
송악 본인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권력을 쥐고 욕망을 가진 이들에게 자신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라는 것을. 그들은 올바른 말을 하고 같이 더러워지지 않으려는 자를 경계한다.
가진 것을 빼앗기기 싫어하며 자신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는 자를 배척한다.
그것이 그들이 아는 섭리(攝理)고 진리(眞理)다.
게다가 몇 년 전에 있었던 새 현령에게 대했던 모습까지 모두 떠올라 혹여 그가 악심을 품고 행한 일은 아닌 것인지 그 모든 것들이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었다.
‘내가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하나 이내 쓸데없는 말을 늘여놨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말했다.
“아니다. 아니야. 내가 술이 좀 되긴 했나 보구나. 술 취한 늙은이의 주책없는 말이니 마음에 담아두지 않아도 된다. 아니, 잊어버리거라.”
“스승님…….”
더는 말없이 술잔만 연거푸 들이키는 송악을 향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던 양조광이 그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스승님의 그 올곧은 마음이 없으셨다면 저는 진작 악의 길로 빠졌을 겁니다. 어릴 적 가문이 망해야만 했던, 아버지와 할아버지께서 죽임을 당해야 하는 이유를 알았을 때, 죽으려 하던 저에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너무도 깨끗하여 시기하는 자들이 많아 그리된 것이라고. 제 부친은 결코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셨다고. 옳은 길을 걸은 것뿐이라 하셨지요. 스승님께서는 옳은 일을 하신 것뿐입니다. 운 공자님도, 후 공자님도. 그리고 송하 아가씨께서도. 모두 스승님을 닮아 바르게 잘 자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양조광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악은 술잔을 따르려던 손을 멈춘 채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제야 양조광의 눈을 제대로 쳐다본다.
“허허……. 네가 많이 자라긴 했구나. 널 처음 보았을 땐 제 어미의 품에서 벗어나지도 못하는 갓난아기였거늘……. 세월이 언제 이리 흘러간 것인지. 내가 너에게 위로를 받고 있다니……. 그래 네 말이 맞구나. 이리 내가 흔들리면 아니 되겠지.”
“하여 스승님께…… 청하고 싶은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무엇이더냐? 말해 보거라.”
“운 공자님들 도와 사업을 하나 해보려 합니다. 하여, 잠시 집을 떠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음……. 사업이라…….”
송악은 적당히 자란 턱의 수염을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그의 말을 곱씹었다.
‘이제 슬슬 조광이도 둥지를 떠나 더 큰 날개를 펼칠 때가 온 것이로구나.’
아니, 애초부터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은 양조광이다.
자신은 그저 세상을 피해 숨어야만 했던 양조광 모자를 받아준 것이었을 뿐.
붙잡을 수 있는 권한은 그에게 없었다.
게다가 더욱이 집안을 위해 나서겠다는 아이를 붙잡을 연유는 없지 않은가?
얼마 지나지 않아 송악의 허락이 떨어졌다.
“내 어찌 감히 네 앞길을 막을 수 있겠느냐?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거라.”
그의 말에 감복하였는지 양조광이 송악을 향해 삼배지례(三拜之禮)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반드시 성공하여 부끄럽지 않은 제자가 되어 돌아오겠습니다.”
떠나는 길 미리 스승을 향해 예를 차린 것이다.
늘 그런 허례허식(虛禮虛飾)따위 하지 않아도 된다며 거부하던 송악도 오늘만큼은 그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그래그래.’
창밖으로 떠오른 밤하늘이 참으로 맑았다.
* * *
그날 저녁.
망가져 버린 집안을 수습하느라 정신없는 하루를 보낸 송운이 방문 앞에 도착했을 때, 익숙한 누군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양조광이었다.
그는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말했다.
“운 공자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당연하지. 무슨 일이야?”
송운은 몹시 피곤했으나 흔쾌히 응했다.
“조용히 이야길 나눠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양조광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고, 송운은 곧바로 알아들었다.
사방에는 듣는 귀가 많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하였다.
결코 바깥으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되는 이야기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낀 송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우선 방으로 들어가자.”
주변에 있던 시녀들까지 모두 물린 송운은 단둘만의 공간을 만들었다.
다시 한번 주변의 기척을 모두 확인한 송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말해도 될 듯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