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당연히 그리하는 게 마땅하겠지. 마음 추스를 시간도 필요할 테니 그리하도록 함세. 우리는 우선 북경으로 돌아가 보겠네. 일이 좀 진정이 되면 그때 서신 한 장 보내주게. 그때 다시 이야길 나누도록 하지.”
“고맙네, 목단이. 꼭 그리하도록 하겠네.”
* * *
그 시각.
어깨를 붕대로 칭칭 감싼 송운은 침상에 누워있어야 했다. 본인은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으나, 예령이 자신을 생각해서라도 푹 쉬라며 누워 있으라 한 것이다.
결국 지금 당장은 이러나저러나 혼자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생각보다 사건이 빠르게 터졌다. 아니, 일러도 너무 이르다. 어찌 일 년이란 시간에 가깝게 당겨졌단 말인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알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일 년을 채 채우기도 전에 벌어진 화마도, 갑자기 나타난 자신을 아는 정체 모를 존재까지. 이번에는 그나마 운이 좋은 덕에 간신히 반은 비켜나갔으나, 정말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수상한 움직임이 있었다면 먼저 낌새를 알아채고 연락을 취했어야 할 천조회 측의 연락조차 없었다.
‘비록 천조회가 만들어진 지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른 것은 아니었으나, 어느 정도는 충분할 것이라 여겼거늘.’
송운은 지끈거려오는 머리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역시 아직은 내가 원하는 정도만큼의 정보력을 얻기엔 부족한 것인가.’
상황이 이렇게 흘러간다면 이건 정말 큰 사태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송운의 머릿속을 더욱 어지럽혔다.
욱씬.
송운은 계속되는 고민 속에 무의식중 왼손을 관자놀이로 올리려다 드는 화끈거리는 통증에 문득 자신이 다친 어깨가 왼쪽임을 깨닫고 손을 내렸다.
그 고통 덕에 잠시 잊고 있었던 검은 무복의 사내가 떠올랐다.
‘역시 아직 내 무위는 한참 멀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당하기만 하지 않았던가? 아직 멀었다. 갈 길이 너무나도 멀구나.’
회귀한 뒤로는 늘 승수를 가져갔던 송운이기에 그 상황의 기억은 더욱 뼈저리게 느껴졌다. 정체 모를 검은 무복의 사내와 대면했을 때 평서란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결코 이 자리에 앉아 있지 못했을 터다.
아니, 어쩌면 이번 기회에 자신을 더욱 혹독히 수련시키라는 하늘의 계시일 지도 몰랐다.
‘그녀에겐 늘 받기만 하는구나.’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져 갈 때 즈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누구십니까.”
“저, 평서란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송운은 순간 생각하고 있던 그녀가 자신을 찾아오자 흠칫했으나, 이내 그런 기색을 지우고선 차분히 대답했다.
“아, 들어오시오. ……큭.”
반쯤 누워있던 몸을 억지로 일으키려 하자, 어김없이 통증은 이어졌고 이 틈 사이로 신음이 비집고 흘러나온다.
이를 본 평서란이 차분히 그를 말렸다.
“그냥 그대로 누워 계세요. 자칫하면 상처가 더 벌어질 거예요. 그렇게 되면 더 빨리 아물 상처도 오래가게 되겠죠.”
목소리는 나긋나긋했으나, 결국 빠르게 낫고 싶다면 움직이지 말고 있으라는 은연중에 협박(?)이었다.
‘허허……. 이거 참. 여인의 앞에서 내 꼴이 말이 아니로구나. 하기야 이미 도움을 받아버렸구나.’
하나 송운도 그녀가 자신을 걱정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는 걸 잘 알기에 이내 순순히 수긍했다.
“그럼……. 양해를 바라오.”
송운이 다시 제자리로 눕자, 그제야 평서란이 살포시 그 옆에 앉는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그래도 아까보단 나아진 듯하오. 보다시피 약도 충분히 잘 발랐고.”
평서란은 그의 붕대로 감긴 어깨를 바라보더니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제법 상처가 깊을 텐데…….’
조금 더 일찍 도착하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하나 이미 지난 일.
우선은 상처 회복이 우선이다.
한참을 말없이 송운을 쳐다보던 평서란은 그의 앞으로 무언가 들이밀었다.
“이거……. 받으세요.”
“험. 이게 뭐요. 평 소저?”
얼핏 보아도 약인 것처럼 보였으나, 송운은 왠지 모르게 드는 민망함에 헛기침을 하며 물었고 그 모습을 눈치챈 것인지 평서란이 슬쩍 웃으며 답해왔다.
“후후. 자상에 좋다는 약이라 합니다. 쭉 들이키세요. 금창약(金瘡藥)만으론 부족한 부분을 좀 더 채워줄 겁니다.”
무가에서 자란 덕인지 평서란은 평소에 외상이나 내상에 관한 약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언젠가는 꼭 필요할 것이라 여겨 배워두었던 것인데, 그것이 지금 이렇게 쓰이게 된 것이다.
‘송 소협에게 가장 먼저 사용하게 될 줄이야……. 그나마 배워두어 다행인 걸까?’
순간 씁쓸한 고소를 짓던 그녀의 뒤로 누군가 다가왔으니.
“무슨 이야길 나누기에 이리 공기가 뜨뜻미지근한 게냐?”
“오셨습니까?”
역시 몸을 일으켜 세우려는 송운을 제지한 채, 둘의 곁으로 다가온 이는 바로…….
“아, 아버지.”
평목단이었다.
“크흠. 둘 사이의 분위기가 아주 묘한 것이, 내 뭐……. 젊은 아이들 사이를 방해한 건 아닌가 싶구나. 으하하. 다시 나가줄까?”
“그…… 그런 거 아니에요.”
급하게 평서란이 부정했으나, 이미 평목단의 눈에는 장난기가 그득한 것이 그만둘 생각은 없어 보이는 듯했다. 평생 동안 딸을 키워오면서 단 한 번도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터라 그 즐거움은 배로 들었다.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찌하겠느냐? 어차피 둘이 혼인을 할 사이가 아니더냐? 너무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느니라. 그 나이 때 당연한 현상이지. 암. 그렇고말고. 나는 여느 골방의 늙은이들처럼 그리 꽉 막힌 사람이 아니란 말씀이야.”
“펴, 평 의숙부님.”
계속해서 놀려대는 평목단의 말에 둘 모두 부끄러웠는지 서로 고개를 돌린 채 말없이 허공만을 바라보자, 그 모습이 여간 귀여운 것이 아니었는지 평목단이 속으로 흐뭇해하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마침 둘 모두에게 할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리 모여 있으니 잘 되었구나.”
조금 전과는 상이(相異)한 분위기로 변한 평목단의 모습에 평서란과 송운 역시 진지한 모습으로 그를 향한다.
그러곤 이윽고 평목단의 굳게 닫혔던 입이 열렸다.
“흑야에 관한 이야기다.”
* * *
흑야.
그 한 단어는 둘 모두 긴장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특히나 오늘 흑야로 추정되는 적과 직접 맞부딪힌 그들로서는 더욱 그의 말에 집중하는 듯했다.
“본래 이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 했으나, 이번 화재 사건도 있는 데다, 이미 너희가 엮여버렸으니 말을 하는 것이 맞는 것이란 생각이 들더구나. 하여 내린 결정이니 잘 듣거라.”
‘대체 얼마나 위험한 놈들이기에 평 의숙부께서 저리도 조심을 하신단 말인가?’
송운은 속으로 드는 생각을 뒤로 한 채, 다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은 잡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물론, 악이에게도 다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언질을 주고 온 참이다. 특히 운이 너는 지난번 북경에 왔을 때 직접 마주해보지 않았더냐?”
송운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때, 놈들의 존재를 알아채 버린 송운이기에 평목단은 더더욱 이런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을 터다.
그리고 잠시 숨을 들이쉰 평목단이 입을 열었다.
“후우……. 너희도 알다시피 워낙 배일에 둘러싸인 놈들이라 전부를 알아내긴 어렵지만, 오랫동안 놈들을 조사해온 결과. 소량이지만 정보를 알아내었다.”
“대체 어떠한 놈들입니까?”
차분히 묻는 듯했으나, 송운의 목소리는 어느새 처음과는 다르게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았는데……. 꽤나 골치를 아프게 할 것 같다. 천하 곳곳에 놈들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것 같더구나. 심지어, 황궁 내부에도 침입해있는 녀석들이 있었다.”
“황궁까지 말이에요?”
평서란이 놀라는 표정으로 묻자 평목단은 무언의 긍정 표시를 보내왔다.
하나, 놀란 것은 평서란뿐만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황궁을 파고들다니……?’
알수록 점점 더 미궁에 빠져들어 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다가 점조직으로 형성되어 있어 서로가 서로에 대한 정보를 교류하는 걸 극한으로 금지하고 있으니…….”
그에 평서란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결국, 당금의 상황에선 그 꼬리를 잡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소리겠네요.”
“그런 셈이지. 게다가 간신히 잡았다 한들 심문을 하는 것도 불가하였다.”
“금제 때문입니까?”
그의 말에 곧바로 알아채고 송운이 답하자 평목단은 어찌 알았냐는 듯 의문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그에 송운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어제 새벽, 오늘 사건과는 달리 또 다른 인물이 불을 지를 도구와 함께 저희 집 근처를 배회했었습니다. 놈을 잡았지만……. 말을 꺼내기도 전에 게거품을 물며 죽어버리더군요. 아무래도 제 생각엔 흑야에 관한 생각 자체에 강력한 금제가 걸린 듯합니다.”
“허어……. 정말 놈들의 세력이 말도 아니게 확장되어 가고 있구나.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놈들이었어.”
송운의 말을 들은 평목단의 얼굴엔 더욱 그늘이 깊게 졌다. 이내 머리가 아파져 오는지 평목단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하면 놈들을 전혀 추적할 수 없다는 말씀이신 건가요?”
“아직까지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나 그러한 상황이구나. 사실 황궁 내에서도 침입한 정도가 아니라 어느 정도 영향력까지 끼치고 있다. 뭐 물론 작금까지 그 움직임은 극히 미미한 정도긴 하나……. 더는 가만히 보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만큼은 확실해 졌구나.”
송운은 생각보다 적은 정보량에 실망감이 맴돌았다. 잠시나마 보였던 희망마저 사라지는 것 같았다.
‘평 의숙부께서 직접 나섰는데도 알아낸 게 그것뿐이시라면, 정말 골치 아프게 되었군.’
턱.
그때 고개를 땅에 박고 있던 그의 어깨에 평목단의 크고도 두꺼운 손이 올라왔다.
“내, 어떠한 일이 있어도 너희 가족만은 꼭 지켜주마.”
자신을 바라보는 그 두 눈에 굳건한 의지가 가득 담겨있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어디선가 기운이 치솟는 듯한 느낌이 차오른다.
실망감에 잠시 잊고 있던 것이 그의 마음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래, 모두가 힘을 합친다면 못해낼 것이 무에 있겠는가? 이리 든든한 아군이 있지 않느냐? 이제부터 알아나가면 되는 것이거늘.’
그제야 송운 또한 고개를 당당히 들어 올렸다.
“저도 최선을 다해 돕도록 하겠습니다. 평 의숙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