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그사이를 틈타 몸에 허점이 생긴 송운의 어깨를 그의 검이 스친 것이다.
뚝. 뚝.
꽤나 깊게 스치고 지나간 날카로운 예기는 그의 검을 타고 흐르는 붉은 피, 동시에 송운의 어깨에서도 살점이 떨어져 나오며 피가 치솟아 올랐다.
푸슉-!
“으…… 크헉!”
자상(刺傷)이 남은 자리엔 타오르는 듯한 고통이 밀려 들어왔고, 이를 악다문 송운의 입가를 비집고 끝내 신음이 터져 나왔다.
오랜만에 맛보는 상처의 고통은 송운을 더욱 괴롭게 했고, 그렇게 간두지세(竿頭之勢)의 순간.
카앙-!
“?!”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검은 머리칼의 인영은 단숨에 그런 검은 무복의 검을 쳐내면서 동시에 그를 멀리 날려 보내버린 것이다.
순간 날려 온 코끝을 감싸는 부드러운 그 향은 송운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었고, 정신을 차리고 향한 그곳엔 검은 무복을 날려버리고 싸늘한 분위기를 온몸으로 풍겨내고 있는 단 한 사람이 보였다.
그에게 익숙한.
너무도 잘 아는 이었다.
‘평…… 소저……?’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에 순간 착각할 뻔했으나, 재차 보아도 그녀였다.
하나 놀란 건 송운만이 아니었다.
흑령 또한 놀라고 있었다.
누군지 몰라서가 아니었다.
그도 이미 익히 알고 있는 존재였다.
다만 왜 이곳에 나타난 것인지, 그리고 자신을 단 한 번의 손속으로 이만큼이나 날려버린 그녀의 무위에 놀라고 있었다.
‘평서란이 이 정도의 무위를 가지고 있었단 말인가? 크윽.’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엄청난 기운이 그녀의 온몸을 감싸며 피어오르더니 주변의 흙들과 돌덩어리들이 그에 응답이라도 하는 듯 요동치고 있었다.
“감히…….”
분노로 가득 차 보이는 듯한 그녀의 모습은 그 어떠한 쇠보다 더 단단하고 차가웠고…… 날카로웠다.
이제야 왜 그녀가 전생에 철혈무후란 별호가 붙었는지, 어찌 구주칠대무신의 자리에 올라갔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순간이었다.
그녀 한 명으로 인해 순식간에 판국이 뒤바뀐 것이다.
‘이대로 있으면 내가 진다.’
흑령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송운 하나만으로는 충분히 승산이 있었을 터나, 아무리 그가 부상을 입었다 한들 저 정도의 위력을 내뿜는 평서란이 가세(加勢)한다면 결과는 보지 않아도 이미 뻔했다.
‘아쉽게 되었군. 운이 좋구나. 오늘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지.’
파밧-!
“어딜!”
흑령은 입맛을 다시더니 이내 빠르게 도주하기 시작했고 평서란이 급히 쫓으려 했으나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이후였다.
이 이상 쫓는 걸 포기한 평서란은 서둘러 송운의 곁으로 다가왔다.
“괜찮아요? 송 소협?”
조금 전까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지고 걱정이 한가득 밴 목소리에 송운은 괜찮다며 고개를 주억였다.
“어깨 정도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대신 집 쪽을 향해 바라보자, 평서란이 금세 알아들었는지 답했다.
“집은 걱정하지 말아요. 아버지와 집안 식솔들도 여럿 같이 와서 진화를 돕고 있으니 곧 꺼질 거예요.”
그녀의 말대로 아까에 비해 거대하게 피어오르던 연기가 서서히 사그라지고 있었다.
‘아…… 다행이다.’
그와 동시에 송운도 조금 안심이 되었는지 계속해서 쥐고 있던 긴장의 끈이 풀어지면서 간신히 버티고 있던 몸이 흔들렸다.
온 힘을 쏟아부은 데다 베인 상처에서 피를 꽤 흘렸기에 몸의 상태가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휘청.
“송 소협!”
그 모습에 놀란 평서란이 그를 받쳐 세웠다.
펄럭.
순간 그녀의 품에 안기듯 넘어졌고 펄럭이는 무복을 타고 그녀의 살결에서부터 느껴지는 부드럽고 달콤한 살구 향이 그의 후각을 은은히 자극시켰다.
화악-
이내 송운의 얼굴이 붉게 달구어졌고 순간 놀라 잡은 평서란도 역시 잡고 난 후에야 부끄러웠는지 얼굴이 발개지더니 휙 하니 고개를 돌렸다.
“아, 고, 고맙소.”
송운도 민망했는지 고맙다는 말과 동시에 평서란의 품에서 황급히 떨어져 나왔다.
“……별말씀을요.”
“일단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소.”
어찌 되었건 덕분에 큰 재화(災禍)는 비껴간 셈이었다.
第五章. 흑야의 존재
“아버지! 어머니!”
집으로 돌아온 송운이 가장 먼저 찾은 건 가족들의 안위였다.
불은 모두 진압된 상태였지만 화마가 지나간 곳은 어김없이 곳곳이 그 뼈대가 드러나 있었고 일부는 그 뼈대마저도 잿더미로 변해 무너진 채, 흉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기에 송운의 발걸음을 더욱 재촉시켰다.
그렇게 한참을 들어갔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송운은 가족들을 모두 찾을 수 있었다. 시야가 넓어진 송운의 눈에 저 멀리 모여 있는 가족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가족 중 가장 먼저 송운을 쳐다본 건, 송하였다.
그러곤 곧바로 뛰어와 냉큼 그의 품에 안겼다.
“큰오빠!”
“하야.”
폭 안기며 들어오는 송하의 모습을 보며 송운이 가장 먼저 살펴본 곳은 바로 그녀의 얼굴이었다.
전생에선 유일하게 송하만이 살아남았으나 얼굴에 큰 흉을 지고 살았기에 혹여나 시간이 엇나가면서 흉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하아……. 다행이다.’
다행히 송운의 걱정과는 달리 외관상으로 보이는 상처 등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야,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응 난 괜찮은데……. 집…… 집이……. 사람들이…… 흑.”
커가면서 점점 맹랑한 구석은 있으나, 아직은 어린아이인 송하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화마에 놀랐을 만했다. 송운은 그런 송하를 토닥거리며 뒤에 다가오는 송악에게 물었다.
“아버지, 괜찮으십니까?”
얼굴엔 하얀 피부와 상반되는 거뭇거뭇한 재가 여기저기 묻어 있었으나, 괜찮다는 듯 그를 안심시켰다.
“그래, 다행히 평가 식구들이 도와준 덕에 빠르게 진압할 수 있었다.”
그때였다.
“한데 운이 너…… 이게 웬 상처인 거니?”
예령이 송운의 왼쪽 어깨를 바라보며 놀람과 동시에 걱정스러움이 가득 배인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급한 마음에 자신이 다쳤다는 건 새카맣게 잊고 있었던 송운이다. 아차, 하는 마음에 서둘러 손으로 가렸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밝은 하늘색이었던 옷깃은 흘린 피로 잔뜩 적셔져 그 색을 잃은 지 오래였고 잘려 나간 그 사이로 보이는 상처는 꽤나 깊어 보였기 때문이다.
“아……. 조금 일이 생겼었습니다. 가볍게 베인 상처니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냥 가볍지 않은 상처였으나, 가뜩이나 화재로 인해 놀란 어머니에게 자신까지 걱정 끼쳐드리기 싫은 마음에 웃으며 답했다.
하나 그런다고 그냥 넘어갈 예령이 아니었다.
“가볍게 베인 상처인데 어찌 이리 피를 흘렸단 말이야? 어서 이리 오렴. 치료부터 해야겠구나.”
“아직은 집이 어수선합니다. 그것부터 우선…….”
계속해서 치료를 미루려는 송운을 향해 어느새 다가온 평목단이 일침(一針)을 놓았다.
“걱정 말고 치료부터 받거라. 네 몸이 성치 않으면 네 부모님이 걱정하시지 않겠느냐? 이미 불은 다 꺼졌고, 남은 건 뒷수습뿐이니 네 몸부터 추스르는 게 맞지, 싶구나.”
“아, 평 의숙부님. 오셨습니까.”
가족들을 먼저 챙기느라 그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송운은 그제야 인사를 드렸다.
“그래. 오래간만이로구나.”
오랜만이라며 말하는 평목단의 표정도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애초에 약혼식을 앞두고 그들을 놀라게 할 셈으로 조금 일찍 방문했던 참이었다. 한데 도착했을 땐 이미 불은 꺼지고 있었고 놀란 마음에 서둘러 불을 끄는데 모두 합심하여 도운 것이다.
어찌 되었건 친우이자 앞으로 미래의 사돈지간이 될 집안에 급작스럽게 불이 났다는 상황 자체에서 당혹스러운 것은 평목단도 매한가지일 터.
그런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도움을 준 평가 사람들에게 참으로 고마웠다.
송운은 평목단을 향해 고개 숙이며 말했다.
“평 의숙부님. 그리고 평 소저. 모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큰 화를 면했습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니, 너무 고마워하지 않아도 된다.”
“우선 운이 너는 이곳은 신경 쓰지 말고 들어가 치료부터 받도록 해라.”
“……예 알겠습니다.”
당장 일손에 보탬이 되어드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어른들이 모두 나서서 치료받으라 하는데 더 이상 송운이 내뺄 수도 없는 노릇.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아버지.”
결국 치료를 위해 먼저 방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송운을 보내놓고 접견실에 모인 세 사람은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 이야길 나누고 있었다.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의논을 하기 위함이었다.
“상황이 참으로 곤란하게 되어버렸군. 미안하이.”
“아닐세. 자네야말로 이렇게 될 줄 알았겠는가?”
계속된 송악의 사과에 평목단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화재였다.
그가 사과할 일이 아니란 뜻이었다.
하나 송악은 괜스레 이곳까지 온 친우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더구나 그가 없었다면 불을 끄는데 배로 시간이 걸렸을 터.
그렇게 되었다면 화마로 인한 피해는 이 정도 선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걸 잘 알았기에 그에게 더욱 미안하고 고마울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망설이던 송악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일세, 아무래도 약혼식을 조금 뒤로 미뤄야 할 것 같네. 집안이 이 지경이 되어버렸으니……. 집안이 정리될 때까지만 조금 미루었으면 하네.”
송악의 말이 맞았다.
완전히 다 타버린 것은 아니었으나, 집안을 화마가 휩쓸어버렸다. 그런 상황에 좋은 날인 약혼식을 겹쳐서 치르기엔 뭔가 시기가 좋질 못했다. 게다가 아무리 빨리 화마를 잡았다고 한들 입은 피해가 절대 적진 않았다.
가족들은 물론 모두 무사했다.
중요한 물건들이 있는 곳도 대다수 피해갔다.
하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송가에서 일을 돕던 식솔 중에서는 상당수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존재했고, 그중엔 심하게는 숨을 거둔 이도 있었다.
오랫동안 송가를 위해 일해 주었던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만큼의 최선을 다해 위로와 애도를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송악의 말에 평목단 또한 고개를 주억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