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
저녁을 먹고 난 후에는 마지막으로 자기 전 책을 읽고 내공심법을 돌렸다.
단지 하나가 더 추가된 것뿐이거늘, 생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일을 하려니 어쩐지 피로가 더 쌓이는 것 같았다.
그나마 지금은 대별 상가와 거래를 트면서 신경 쓸 거리가 조금 줄긴 했지만.
그렇게 한 일 년을 정신없이 바쁘게 살다 보니 어느덧 곧 약혼식을 치를 날이 코앞에 다가온 것이다.
‘벌써 날이 이렇게 흘렀던가?’
송운은 북경에서 보냈던 날을 회상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평서란의 얼굴이 떠올랐고 그녀와 함께 보낸 시간이 그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아니, 사실 그 시간을 제외하고도 그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해 보였다.
두근두근.
하루 동안 쌓였던 피로를 모두 풀어줄 것 같은 기분 좋아지는 두근거림.
“흠흠.”
괜스레 아무도 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민망해졌는지 헛기침을 하던 송운은 이내 곧 약혼식이란 생각을 하니 기대감도 있었지만 조금씩 걱정스러운 마음도 들기 시작했다.
‘약혼식이라.’
그동안은 그저 멀찍이 떨어져 보였는데, 막상 눈앞에 닥쳤다고 말하니 이제야 현실감이 느껴진 것일까?
이번에 약혼식을 치르고 나면 결혼식은 다음 회시에 합격한 이후가 될 터다.
‘아니. 어쩌면 아버지와 평 의숙부님 성격이시라면…….’
그런 것 상관없이 바로 날을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하실 분들이니.’
왠지 두 분이 신나서 얘기하는 장면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듯했다.
‘큼.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그렇게 나름의 상상에 나래를 펼치던 송운의 방문에 누군가의 기척이 들려왔다.
“주군. 저 대오입니다.”
‘대오? 이 시간에 웬일이지?’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잠시 갸웃거리던 송운은 들어오라 말했다.
한데, 그의 뒤에는 기절한 듯한 인영이 대오의 손에 들려있었다.
“대체 누구……?!”
의아한 표정에서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변한 송운의 시선의 끝에는 조총의 손에 들린 무언가가 있었다.
성냥과 무언가 한가득 담긴 병.
얼핏 흘러나오는 향을 맡아보니 기름 냄새인 듯했다.
“주군이 생각하시는 그것, 아무래도 맞는 것 같습니다. 잠시 정찰을 도는 도중 수상한 움직임이 보이기에 다가가 보았더니 이런 걸 들고 주변을 훑고 있었습니다. 하여 기절시켜 데려온 것인데…….”
탁.
송운은 순간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은 어지러움이 느껴지면서 중심을 잃은 몸을 벽을 잡으며 간신히 바로 세울 수 있었다.
“주군!”
송운은 자신을 급히 부축하려던 조총을 괜찮다며 손으로 제지시킨다.
아직은 이른 시기.
최소한 일 년의 시간이 더 남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지금까진 모든 것이 그래왔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한데 대체 왜……?’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전생과 전혀 다른 전개는 없었다. 하여 그것만큼은 강력하게 믿고 있었던 송운이다.
‘전혀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했던 부분에서 오히려 큰 오차가 생겼어.’
송운의 꽉 쥔 두 주먹에선 핏물이 타고 흘러내린다.
무언가 어긋난 듯한 기분과 함께 음습한 기운이 그의 온몸을 감싸고돌았다.
만일 서둘러 이 정도까지 구축을 해두지 않았더라면 분명 무엇이든 일이 터졌을 터.
송운은 조총을 물리며 우선 그를 포박해 두라 일렀다.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어.’
第四章. 봉화(逢禍)
전날 새벽.
자칫하면 가족들을 모두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송운은 분노했다.
여태껏 계획대로 차곡차곡 구축해두지 않았더라면, 쥐도 새도 모르게 간밤에 집에 불이 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떻게 다시 만난 가족이던가?
그런 가족의 평화를 깨려 한 그자를 용서할 수 없었다. 송운은 이른 아침 다른 것은 모두 제쳐둔 채 그를 가둬둔 곳으로 향했다. 집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시간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셨습니까? 주군.”
도착하니 서사가 그를 맞이하자, 송운은 분노로 떨리던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천천히 입을 떼었다.
그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괜한 곳에 분출할 분노는 아니었다.
송운이 화를 내야 할 곳은 따로 있었다.
“놈은, 어디 있습니까?”
“따라오시지요.”
서사를 따라간 곳에는 어제 그 녀석이 의자에 포박된 채로 입마저 봉인된 채 겁에 질린 눈빛을 하고 있었다.
‘방화를 저지르려 한 놈치고는 나약해 보이는군.’
하나 그렇다고 해서 만만하게 볼 생각은 없었다.
겉만 봐서는 사람을 판단할 수 없는 법.
송운은 자신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땅바닥만 쳐다보고 있는 놈의 입을 풀어주며 물었다. 자결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막아둔 것이었으나, 대답을 듣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배후(背後)가 누구인지 알아내야만 했다.
그래야만 더 확실히 적을 막아 낼 수 있을 터.
“누구더냐.”
“무, 뭐가 말이요.”
다짜고짜 거두절미하고 물어오는 송운의 질문에 놈의 목소리는 상당히 떨리고 있었다.
“두 번 묻지 않겠다. 지금 실토한다면 네놈 목숨 정도는 살려주도록 하지. 누가 보낸 것이냐.”
“저, 정말이오?”
송운의 말을 듣고 잠시 머뭇거리는 듯했으나,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말은 역시나 달콤했는지 금세 입을 뗐다.
하나, 그것도 잠시.
“놈들은……. 끄르륵…… 커헉!”
“제길……!”
놈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급작스레 게거품을 물며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금제(禁制).
아마도 녀석을 죽인 건 어떠한 강력한 금제였을 것이다.
퍽-!
쩌저적.
송운은 굳어진 얼굴로 답답한 마음에 애꿎은 벽을 내리쳤고, 그 힘을 이기지 못했는지 그대로 금이 가버렸다.
‘대체 어떤 놈들이기에 이름을 꺼내기도 전에 죽어버릴 만큼 저리 강력한 금제를 걸었단 말인가?’
하나 이미 유일하게 알고 있던 녀석은 죽어버렸고, 더는 알 수 있는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게 의문만을 남긴 채 죽어버린 녀석을 뒤로한 채 밖으로 나온 송운은 곧장 집으로 향했다. 분명 배후에 있는 녀석들은 일이 성사되지 않았음을 알아챘을 테고 또 다른 일을 벌일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 집을 비우는 것은 위험했다.
아무리 천조회가 지키고 있다고 한들 말이다.
그때.
타다닥-
다급히 발걸음을 옮기던 송운이 무언가 빠르게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뭐지?’
불길한 기운이 몸을 감싸자 그 기척을 향해 달려갔다.
하나, 금세 사라진 기척은 송운을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조금 전까지 이 근처에 있었다. 분명 아직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했을 터.’
송운은 본인도 기척을 최대한 줄인 채 빠르게 움직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무복에 검은 두건을 찬 중년인과 마주칠 수 있었다.
‘아까 그 기척을 낸 놈이로구나!’
아주 잠시간의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고 서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송운은 느낄 수 있었다.
‘꽤나 높은 경지에 이른 고수다.’
누군가 자신을 알아채고 기척을 지울 만큼의 고수라면 송운에게도 상당히 까다로운 존재일 터.
“……송운인가.”
* * *
검은 무복 사내는 꽤나 조용히 이름을 읊었지만 그것은 그대로 송운의 귀를 타고 들어갔다.
하나 도통 감이 오질 않는다.
‘누구지? 대체 누구길래 날 안단 말이냐?’
자신은 상대방을 모르는데 상대방은 자신을 안다.
어쩌면 위험한 상황이 될지도 모르는, 아니 이미 위험한 상황이었다.
무턱대고 공격을 가하기엔 너무도 위험이 컸다.
송운은 침착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물었다.
“나를 아는가?”
“……여기서 만나는 건 계획에 없던 상황인데……. 너는 늘 나의 생각을 벗어나는군. 귀찮게 되었어.”
계속해서 알 수 없는 말만을 중얼거리는 검은 무복이었으나,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누군지는 모르나 적임은 확실해졌다.
하나, 송운이 뭐라 행동을 하기도 전에 또다시 무언가 읊조리며 검은 무복의 사내가 갑작스레 칼을 뽑아 달려들었다.
“넌 그분의 계획에 크게 방해가 된다. 이 자리에서 죽여주마.”
쐐애액-!
파밧!
송운은 미쳐 급하게 다가오는 탓에 허리춤에 메인 검을 뽑기도 전에 몸을 날려 피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그대로 땅에 구른 송운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목 근처를 쓸고 지나간 날카로운 쇳덩어리의 시린 느낌은 송운을 싸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생각보다 더 강하다.’
공격할 틈을 갖기도 전에 이윽고 상대측에서 먼저 두 번째 공격이 날아왔고, 송운을 계속해서 방어진을 펼치게 만들었다.
콰과과광-!
정신없이 사방으로 쏟아지는 검격들 사이사이로 간신히 피하고 있는 송운이 당연히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론 안 된다. 모든 걸 쏟아부어야 해!’
단순히 자신이 가진 내공만으로는 상대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송운은 자신이 끌어올릴 수 있는 선천지기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것만 같다는 직감이 그를 강렬하게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래봤자 넌 날 이기지 못한다. 편히 죽어라.”
하나 그럴 일말의 기회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맹렬하게 퍼붓는 검은 무복의 사내는 표정 하나 변함없이 처음과 일정한 속도 간격으로 치고 들어왔고, 순간 피하지 못해 그의 검격을 맞받아친 결과.
쌔애액-
쩌엉-!
“크윽!”
송운이 조금 더 밀리는 느낌이 강했다.
아니 분명히 밀리고 있었다.
‘이대로 무너지면 안 된다. 조금만…… 조금만 더!’
채챙! 챙!
한참을 손속을 주고받았을까?
쏟아지는 공격에 받아치기 급급하던 송운의 오감에 무언가 타오르는 냄새와 소리는 그를 돌아보게 만들었고, 역시나 집 쪽으로 향한 송운의 시선의 끝에는 거대한 검은 구름처럼 보이는 매캐한 연기가 집안 곳곳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젠장! 가족들이……!’
마치 어두운 악귀처럼 보이는 그것들은 송운의 목덜미를 싸늘하게 만들었다.
쉽게 꺼질 것 같은 불이 아니었다.
아찔한 기분에 몸이 굳으며 눈앞이 하얗게 변했을 때 즈음.
무언가 서늘한 감각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서걱.
“적과 싸움을 할 때 한눈을 파는 건 그만큼 자신감이 넘친다는 것인가? 아니면 날 그 정도로 우습게 보았다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