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화
이번엔 반대로 서사가 아무 말을 하지 못하자 다시 송운이 말을 이었다.
“원하신다면 삼고초려가 아닌, 오고초려, 십고초려까지도 해드리겠습니다.”
잠시 끊겼던 말은 지금껏 부드러웠던 음성에서 진중하게 바뀌며 다시 이어왔다.
그러곤 서사의 눈과 똑바로 마주 보며 말한다.
“결코 스스로를 쉽게 보지 마십시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스스로 존경하면 다른 사람도 그대를 존경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제가 보기엔 필히 당신들은 먼 훗날 그 누구보다 더 대단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한데 어찌 남보다 스스로를 그리 낮게 평하신단 말입니까?”
이제야 비로소 서사는 송운의 진심이 보이는 듯했다. 알 듯 모를 듯하던 그 모든 것들이 그의 진실된 눈과 목소리. 그리고 말속에서 느껴지니 문득 목구멍 끝까지 울컥함이 차오르면서 가슴엔 뜨거운 무언가 솟아오르는 느낌이 그의 온몸을 감쌌다.
“……. 대형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서사는 울음을 삼키는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남기며, 눈물 한 방울을 떨군 채 방에서 물러났다.
第十五章. 천조회(天鳥會)
“크하하하! 난 처음부터 이 친구와 함께 하고 싶었대도! 적어도 다른 건 몰라도 내 아우들을 모은 것처럼,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자신 있는 사람이 바로 이 우모일세. 한데 친구 자네는 이런 내가 평생 믿고 따라도 될 존재 같으이.”
다시 한자리에 모인 여섯 명.
우곤이 송운을 보자마자 호탕하게 웃으며 말한다.
하나, 그 눈빛만큼은 진실되어 있다.
그런 우곤의 모습을 보며 송운 또한 미소 지으며 답했다.
“그리 높이 평가해 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러곤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던 서사가 입을 열었다.
“자, 이리 다들 모였으니……, 이제는 속 시원하게 자세히 말을 해보세요. 우리가 무엇을 어찌하면 되는 겁니까?”
서사가 꺼낸 그 한마디는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들이 이 자리에 오기 전부터 가장 궁금하게 여겼던 것이기 때문이다.
작금 그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여러분이 하실 일은…….”
이번엔 송운에게로 시선이 한데 모인다.
그렇게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귀를 쫑긋 세우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천하(天下)를 뒤덮는 눈과 귀가 되어주세요.”
* * *
송운의 말에 천중오제의 표정이 각기 표현할 수 있는 최대의 허탈한 표정이 되었다.
이미 한 번 했던 말이었기 때문이리라.
하나 그 허탈감도 잠시, 송운을 믿고 다시 기다린다. 자신들이 본 송운이라면 결코 이걸로 말을 끝내진 않을 터.
그리고 그들의 믿음에 배신하지 않는다는 듯 송운이 말을 이어나갔다.
“일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최고의 정보 조직을 만들 겁니다. 같은 시대,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이라면 그 누구도 천중오제의 눈과 귀를 피해가지 못하는 그런 정보 조직을 말입니다.”
먼저 말을 꺼냈던 서사는 조용히 그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리며 답했다.
“하면……. 우리는 하늘을 나는 새가 되어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천조율(天鳥率)었다.
이내 다시 다섯 형제들이 모두 입을 모아 동시에 말했다.
“우리는 하늘을 나는 새가 되어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송운은 생각지도 못했던 그들의 합창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동이 밀려 들어왔다.
그러곤 한 명 한 명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우곤 형님. 서사 형님. 대오 형님. 조총 형님. 그리고 막내 적돈까지. 다들……. 절 따라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도 이제부턴 친구가 아니라 송 공자라 하며 따르겠소. 따르는 자의 도리가 아닌 듯하니.”
“아닙니다. 그리하지 않으셔도…….”
“그게,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소.”
천조회가 창조(創造)되는 순간이었다.
* * *
천조회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된 이들은 천중오제만큼이나 멋있다며 다들 좋아했다.
그중 특히 우곤이 가장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단순했다.
“이름이 매우 있어 보이지 않느냐 얘들아! 크하하하!”
“형님이 멋지다면 당연히 멋진 것이지요!”
“하아……. 그 성격은 어딜 가질 않는구만.”
“그, 그래도 멋진 것 같아요. 형님.”
막내 적돈의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의 입은 쉴 새 없이 먹을 것이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에 또 한 번 모두가 크게 웃는다.
이로써 송운의 준비는 이제 끝났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이제 천조회를 키워, 이 년 안에 북경까지 닿는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참으로 기쁜 날입니다.”
송운의 입가에도 미소가 가득 번졌다.
* * *
바닥에는 붉은 융단이 깔려 있으며, 그 길을 따라 나아가면 끝에는 백 개의 계단이 자리하고 있다. 그 높은 계단을 따라 시선을 올리면 나타나는 것은 황제도 감탄할 황금침상(黃金寢牀)이다.
그러한 황금침상 위로, 왕후장상이 부럽지 않은 자태로 몸을 누인 사내가 있었다.
눈앞에는 산해진미가 가득한 상이 차려져 있으며, 넓은 침상 주변으로는 반쯤은 벌거벗은 미녀들이 그의 주위를 맴돌며 웃음을 흘리고 입술을 맞댄다.
사내에게는 부족한 것이 하나 없어 보였다.
아니, 실제로 그는 모든 것을 가졌다.
또한 가장 높은 곳에 섰다.
삼십 년 전, 홀로 강호에 나타나 당시 천하십대고수라 불리던 이들을 모두 무릎 꿇린 이후, 천하제일의 칭호를 거머쥐었다.
명예가 잇따랐으며, 온갖 금은보화와 산해진미, 세상의 모든 것이 그의 발아래에 섰다.
천하의 주인이라는 황제는 아니지만, 황제 버금가는 권력을 한 손에 모두 거머쥐었다.
일무신(一武神) 독고백(獨孤白).
작금의 강호 최정상에 군림하는 유일무이한 절대자의 이름이었다.
“……지루해.”
붉은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음성에, 그의 곁에서 웃음을 흘리던 미녀들의 표정이 굳었다.
세간인들은 그의 무위를 칭송하고, 그의 업적을 존경한다.
하나 독고백이 가진 공포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른다. 그저 가장 높은 성인 무신성(武神城)을 세우고 그 안에 홀로 잠적한 기인 정도로 여기는 것이다.
하나 실상은 달랐다.
독고백은 누구보다도 권태로웠으며, 하기에 누구보다도 두려운 존재였다.
그 누구도 맞서지 못할 절대자의 자리에 오른 이의 고독(孤獨)이 광기(狂氣)로 변하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정도는 더욱 지독해져 가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주변인들을 향해 손을 내뻗지는 않았지만, 바깥세상에 무슨 술수를 부리고 있다는 것쯤은 주변에 자리한 여인들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언제, 어느 때 그 화살이 자신들에게 올지 모른다. 상상만으로 끔찍한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큰일이야.”
독고백의 읊조림은, 무거웠다.
또한 소름이 돋았다.
원한다면 천하를 들었다, 놓았다 할 수 있는 이의 읊조림이다.
무겁지 않을 도리가 없다.
심지어 그가 ‘큰일’이라고 지칭한 것은 바로 본인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 역시 자신이 고독에 미쳐 조금씩 광기의 화신(化身)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다. 그를 막아야 한다는 마음과 아무려면 어쩌냐는 마음의 갈등 속에서 그의 눈이 흔들릴 때였다.
“……흑령(黑令)입니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허공에서부터 뚝 덜어진 흑의 무복의 사내가 나타나 오체투지를 했다. 흔들리던 독고백의 눈이 검은빛으로 물들고, 시선의 끝자락에는 기대가 피어오른다.
“무슨 일이지?”
“……지시하신 일 중 또 한 가지, 실패했습니다.”
“…….”
답이 없는 독고백의 입가로, 긴 미소가 그려졌다.
“실패?”
“죄송합니다.”
그를 보지 못한 체, 고개를 숙인 흑령의 몸이 작게 떨렸다. 여인들만큼은 아니지만, 그 역시 독고백이 가진 광기를 안다.
그 여파가 어디로 튈지는 감히 상상도 못 하는 것이 당연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장가의 장손이 갑작스럽게 각성(覺醒)이라도 하였나? 그럴 수도 있지. 녀석은 꽤나 재능이 있는 아이거든. 쿡쿡. 제법 재미있어졌잖아.”
즐거움이 묻어나는 그의 목소리가 뜻하는 바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하기에 더욱 몸을 크게 떤 흑령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장명도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예측 외의 변수가…….”
“변수?”
독고백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일전에 보고드린 바 있던 송가의 송운이라는 자가 끼어들었습니다.”
“송운? 평 가의 장녀와 결혼한다는 그 얼간이?”
“예.”
“호오…….”
장명도의 각성이 아니라기에, 조금은 실망한 기색을 내비치려던 독고백의 눈에 다시금 짙은 빛이 반짝였다.
‘분명 가능성이 없는 녀석이었는데?’
일반적으로만 따지자면 나쁘지 않은 재능을 타고난 인재이나, 그가 원하는 영웅의 기준에는 한참은 못 미치는 운명을 타고난 이다.
차라리 신경이 쓰이는 쪽을 뽑자면, 약혼녀인 평서란 측이었다.
그녀는 아주 흥미롭다.
또한 달콤한 꿀과 같다.
적당한 자극과 당근을 함께 쥐여준다면 아주 흥미로운 상대로 성장해줄 수도 있을 것이라 크게 기대하고 있을 정도였다.
‘천기(天氣)는 거짓을 말하지 않아. 한데 그가 변수가 되다니…….’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권좌(權座)에 가만히 누워, 떠오르는 밤하늘만 보아도 세상의 모든 일을 알 수 있던 그에게 있어 이보다 더한 흥밋거리는 다시없다고 말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재미있네.”
고심 끝에, 결론을 내린 독고백의 입가로 긴 미소가 그려졌다.
“송운이라고 했나? 그 아이에 대해 따로 알고 있는 바가 있나?”
“……학사 가문 출신이란 것과 생각 외의 무공을 가지고 있다는 것 말고는 아직 없습니다.”
“자세히 알아봐. 기대하고 있을 테니까.”
송가에 대한 작업은, 여태껏 단 한 번도 내려온 적이 없던 명이다. 평여현 인근에 뿌려둔 시선도 얼마 없다. 갑작스럽다고 볼 수 있는 독고백의 말이었지만, 흑령은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원한다면 따를 뿐.
천하에 있어, 독고백의 결정을 반대할 수 있는 이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나타날 때만큼이나 조용히 사라진 흑령의 빈자리를 바라보던 독고백의 붉은 입술 위로 붉은 과일이 얹어진다. 그를 자연스럽게 받아먹으며, 초승달을 닮은 얇고 진한 눈웃음을 그린 독고백이 입가를 가리며 키득거리는 웃음을 토했다.
“송운.”
다시 되뇌는 그 이름은, 독고백의 뇌리를 가득 메어 염원(念願)에 맞닿는다.
“부디…… 내게 새로운 흥미를 안겨주길 바랄게.”
거대한 대전 내부로, 독고백의 작은 웃음소리가 넓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