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대형, 그렇게 대놓고 산채를 만들겠다고 크게 선언하면 어떻게 합니까. 안 그래도 산세가 우스워 소탕되기 딱 좋은 곳인데. 필요한 만큼 벌 때까지라도 조금 조용히 살아야지요.”
세 갈래 길로 얇게 솟은 염소수염에, 왜소한 체격을 한 서사(鼠士)가 한숨 가득한 음성으로 말했다.
“대형. 목소리가 너무 큽니다. 누군가 혹여 훔쳐 듣기라도 했다면…….”
그리 큰 신장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단단해 보이는 체격에, 굳은 눈매와 사내다운 인상을 가진 셋째, 대오(大鰲)가 짧은 목을 움츠리며 눈알을 빠르게 굴린다.
“과연 대형! 그 포부와 기개에 저 조총(朝聰)! 또 한 번 감명했습니다.”
오 척을 조금 넘는 작은 키에, 새하얀 피부를 가진 넷째 조총이 눈망울을 반짝반짝 빛내며 외쳤다.
“와아…… 근데 밥은 언제 먹어?”
비대한 덩치에 유난히 붉은 피부를 가진 다섯째, 적돈(赤豚)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하여튼 둘째와 셋째 너희는 겁이 너무 많아 탈이다! 들키고 말고가 무슨 상관이냐! 천중산에서 함께 첫걸음을 내딛기로 한 우리 천중오제의 행사일진데! 누가 감히 앞을 가로막을 수 있단 말이더냐!”
“하아…… 산적 질 해 먹겠다고 이 산, 저 산 헤매다가 다른 산적들을 횡포에 떠밀려 이곳까지 달아난 신세 아닙니까. 게다가 산채 이름이 너무 광오(狂傲) 하면 금방 관군이 붙는다고 소호(沼湖)라고 짓기까지 하셨고요. 한데 이제와서 무슨…… 게다가 천중오제는 뭡니까, 천중오제는. 나이 먹고 낯부끄럽게.”
“천중오제가 어때서! 멋지잖아!”
“멋으로 살 거면 산적 질은 대체 왜 합니까!”
“이런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아우 녀석 같으니라고. 네 놈은 의적(義賊)도 모르는 게냐, 의적?”
“의적은 쥐뿔. 지금 우리가 남 도와줄 때입니까. 내 입 하나 먹고살기도 바쁜 판이구먼.”
“어허…… 이놈이 그래도!”
우곤과 서사, 둘의 대화에 목을 더욱 깊게 움츠린 대오가 손을 내뻗었다.
“그…… 대형, 둘째 형님, 목소리 좀 낮추심이…….”
“대형의 말씀이 맞습니다, 둘째 형님! 우리는 사나이고, 의적에는 사나이의 멋이 있는 겁니다. 모두가 우리를 존경할 거라고요! 천중오제, 별호도 아주 멋집니다. 대형!”
주먹을 꽉 움켜쥔 조총이 발뒤꿈치를 들어 올린 채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꼬르륵-!
“밥…….”
적돈의 입과, 배에서 나오는 소리는 하나로 통일되어 있었다.
혼란이다.
어느덧 엄숙한 분위기는 단숨에 내던져 버린 다섯 의형제가 우스꽝스러울 수 있는 모습을, 멀지 않은 곳에서 지켜보고 있던 송운의 입가로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정말 듣던 만큼이나 기이한 이들이로구나.’
송운에게, 인재와 보물 중 단 하나만을 쟁취할 수 있다는 전제를 두고 선택을 하라면 망설임 없이 인재를 택할 터였다.
또한 그러한 인재 중, 가장 먼저 품에 안고 싶은 이들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바로 눈앞의 천중오제를 꼽으리라 자신할 수 있었다.
‘저들이 훗날의 귀안회(鬼眼會)…….’
오십 년 후, 천하제일 정보 집단이라는 개방을 제치고 하늘 아래 가장 방대하고 넓은 시야를 보유하게 되는 자칭 고금제일의 사내들.
기이한 행동과 독특한 사건들을 통해 천중오괴(天中五怪)라 불리게 될 그들은 본래 어려서부터 빈민가와 암흑가를 거쳐 성장한, 밑바닥 인생의 인물들이었다.
또한 천중산 위에서 가장 처음 자신들의 이름을 정하였으며, 훗날 모두가 감탄할 위대한 첫걸음을 내뻗었다.
‘자서전에 써 놓았던 말 그대로로군.’
심지어 그를 책으로 출간까지 한 이들이, 바로 눈앞의 천중오제란 인물들이다.
‘그저 책으로만 보아도 재미있는 인물들이라 여겼는데, 두 눈으로 보니 더 즐겁구나.’
실상 송운이 천중오제에 대하여 아는 바라고는 글로 읽은 것과 귀동냥으로 들은 것이 전부였다. 전생에서는 단 한 번도 그들의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하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단 한 번도 의(義)를 어긴 적이 없으며, 그들을 만난 모든 이들이 천중오괴를 좋아했다 하였지.’
사람을 사람으로 안고, 마음을 마음으로 품었다.
그리하여 천하제일의 정보 집단으로서, 모두가 인정하는 진정한 대인이 되었다.
인재를 부르는 인재야말로 인재 중의 최상(最上)이니, 송운이 탐을 내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이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우선 하루의 첫날에 가장 먼저 눈에 보이는 녀석을 터는 거다. 그리고 불쌍한 사람한테 그 돈을 보내주는 거지!”
“아니, 산적한테 털린 순간부터, 그 사람이 제일 불쌍해졌거든요?”
“옳거니! 하면 곧바로 털은 돈을 돌려주면 되겠구나!”
“역시 큰 사내 대형! 저 조총……!”
“제발 목소리 좀…….”
“밥…….”
“안녕하세요.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걸음을 옮겨, 기척을 밝히며 혼란의 한가운데로 망설임 없이 뛰어든 송운이 말을 건넸다.
한참을 시끄럽게 떠들던 오인(五人)의 시선이 삽시간에 화살처럼 날아와 송운에게 꽂혔다.
“큼, 큼…….”
일단 첫 말을 건네기는 했는데, 갑작스럽게 꽂힌 수많은 시선에 묘한 부담감을 느낀 송운이 헛기침을 내뱉는다.
그런 송운을, 말없이 지켜보던 다섯 사내 중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이는 다름 아닌 대오였다.
털썩.
제 자리에 주저앉으며,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대오의 입에서 구슬픈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망했다, 망했어. 우린 망했어. 산적 질을 시작하자마자 들키다니. 이제 곧 관군이 와서 우리 모두를 잡아갈 거야. 어헝헝. 이게 모두 다 목소리 큰 대형이랑 둘째 형님 탓이오. 으헝헝.”
그러거나 말거나,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우곤이 앞으로 나서며 호방한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핫! 모두 들었다니 어쩔 수 없구나. 둘 중 하나를 택해라. 이대로 우리 천중오제의 밑에 들어와 함께 소호채에 몸담던가, 아니면 미안하지만 조용히 입 다물고 살아가시던가. 흐흐.”
살벌해 보이는 목소리와 다르게, 그리 위협적이지 않은 협박을 내뱉은 그를 보며, 헛웃음을 흘린 송운이 고개를 내저었다.
‘자서전에서도 천중산에 자리 잡은 지 며칠이 되지 않아, 산적 질은 체질에 맞지 않아 그만뒀다고 하였던가?’
기이하지만, 꽤나 밝은 성정을 가지고 있는 다섯 사내에게는 분명 남의 것을 빼앗는 짓이란 쉽지 않은 일이었을 터였다. 지금 송운을 향해 보이는 태도를 보니, 더욱더 확신할 수 있었다.
“거 그냥 바보 넷 보았다고 생각하고, 모른 척 가시면 되오.”
서사가 손을 빠르게 내저으며 송운을 향해 말했다.
“후후, 둘째 녀석. 그래도 양심은 있어 이 대형은 바보의 숫자에서 빼놓았구나.”
우곤이 괜히 뿌듯한 웃음을 보이자, 입가를 실룩이는 웃음을 감춘 서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편하신 대로 생각하시우.”
“……혹시 먹을 것 좀 가지고 있어?”
“아아, 잠시. 내 이야기 좀 들어주시오.”
그렇게, 또다시 시작되려는 다섯 사람만의 세계를 빠르게 흩은 송운이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다섯 분에게 말을 건넨 것은 달리 이유가 있어서요.”
“달리 이유?”
바닥에 엎어져,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고 있던 대오의 눈이 반짝 빛을 되찾았다.
“설마 산적질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첫 손님이 되려는 이유 따위는 아닐 테고, 무슨 꿍꿍이지?”
서사가 묻는다.
“뭐 이유가 있겠느냐. 다 큰 사람을 알아본 것이지. 원래 사람이란 게, 큰 인물을 보면 어떻게든 가까이하고 싶은 거란다.”
“과연 대형! 목소리만으로 사람을 이끄시는군요. 존경합니다!”
“거, 두 사람 다 병입니다. 병. 종류는 조금 다르지만 어휴…….”
잠시 듣고만 있던 송운이, 살짝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주억였다.
“아니, 두 분의 말이 어느 정도는 맞습니다. 저는 이곳에 계신 다섯 분과 인연을 맺어보고 싶군요.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는지요?”
정중하게 물으며, 작은 웃음을 보인 송운이 손을 내민다.
그에 한숨을 내쉰 서사가 고개를 내저으며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새 미친놈의 등장인가…….”
* * *
왁자지껄한 다섯 사내를 동봉하여, 아랫마을로 내려 온 송운의 걸음은 곧바로 객잔을 향했다.
“서로 인연을 맺은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자네와 우린 좋은 사이가 될 것이라 이 우모는 믿어 의심치 않네. 크하하.”
“밥 주는 사람…… 고마운 사람…….”
우곤의 말을, 붉은 얼굴이 달뜬 적돈이 받는다.
“……밥이나 먹으면서 이야기하잔 말에 이리 쉽게 따라오다니.”
아직 송운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은 서사가 한숨을 내쉬며 말문을 덧붙였다.
아쉽게도, 그의 입가에 흐르는 군침마저 모두 감추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한동안 고생이 많으셨나 봅니다.”
며칠은 굶주린 듯한 그들의 모습을 보며, 귀안회가 세워지기 전까지 그들의 역경기(逆境記)를 읽었던 때의 감정을 떠올린 송운의 눈에 작은 연민이 깃들었다.
훗날에야 천하 전체에 이름을 떨치는 대단한 인물들이 된다지만, 삼십 년 후인, 그들의 나이 지천명(知天命)을 넘어서기 전까지는 무림의 그 누구에 못지않게 박복하게 지내 온 이들이었다.
무공이 잘난 것도 아니고, 가진 것이 많은 것도 아니기에 여기서 치이고, 저기서 치이고, 남는 것 하나 없이 강호를 떠돌았다 하였으니 그 고생이 얼마나 심했겠는가?
어쩌면 그들에게 있어서도 이 인연이 다행일지도 몰랐다.
‘적어도 이들이 가야 할 방향은 확실히 잡아줄 수 있지 않은가?’
괜한 곳에서 피를 보거나, 의 없는 이에게 팽(烹)당하는 일 따위는 겪지 않아도 된다. 어쩌면 그러한 시련이 있었기에 이들이 훗날 귀안회를 세울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나 달리 생각하자면 그들이 가야 할 길을 올바르게 알고, 방향을 명확히 잡아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더 빨리 귀안회를 만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믿자.’
조금은 부족해 보이지만, 훗날 강호에서 가장 큰 인물 중 하나가 되는 이들을, 그들이 가진 인덕(人德)과 신의를 송운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