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어느덧 주변엔 빈 병이 쌓였고, 송운에 비해 상대적으로 술이 약한 장명도는 이미 반쯤 취기가 오른 상태였다.
‘이 친구, 내가 악인이라도 되었으면 어쩌려고…….’
걱정이 조금 되기도 하나, 한편으론 오랜만에 만난 친우와 대화하는 이 시간이 너무도 즐거웠다.
“이보게 친구. 집이 어딘가? 술은 이만하고 집으로 가는 게 좋겠네.”
“그럴까? 날 따라오게!”
송운은 돈을 계산한 뒤 반쯤 취한 장명도를 한쪽 어깨에 걸치고 객잔을 나왔다.
“또 오세요!”
어린 점소이의 배웅과 함께.
* * *
송운은 생각보다 쉽게 친해진 장명도와 함께 그의 집 앞으로 향했다. 취기가 좀 오른 그가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길을 설명하는 것을 열심히 듣는 척하며 스스로 길을 찾아서 걸었다.
‘이 친구야. 날세. 나야……. 지금의 자네는 날 모르겠지만, 하나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구만. 고맙네……. 참으로 고마워. 그리고 미안하네……. 내 이번엔 자네를 꼭 내 손으로 구하고 말 것이야.’
송운의 가슴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을까?
어느덧 그의 집 앞에 도착한 둘은 장명도가 먼저 문을 두드렸다.
“뉘십니까?”
“아저씨. 접니다. 명도예요. 딸꾹.”
끼이익-
급히 문이 열리며 나온 사람은 바로 임 씨 아저씨라 불렸던 임재덕(任在德) 총관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작은 체구에 지천명은 넘어 보이는 듯하나 아직 불혹밖에 되지 않은 조금은 안쓰러운 안면을 가졌다. 하나 본디 사람 자체가 성실하고 힘도 제법 센 편이었다. 회원장가에 없어선 안 될 만큼 그 충심(忠心)이 가득하여 집안 대소사에 관여하는 사람.
‘참 오랜만입니다. 임 씨 아저씨.’
그런 송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가장 먼저 장명도의 상태부터 살핀다.
“큰 공자님. 오늘은 어쩐 일로 이리 술에 취해서 오셨습니까? 이분은 또 누구십니까?”
“내, 오늘부터 친구를 하기로, 한 송운이라는 친굽니다. 하하. 마음이 참 잘 맞아 기분이 좋기에 좀, 많이 마셨습니다. 아버지께선, 주무십니까?”
말을 최대한 차분히 말하려는 그의 뜻을 알아듣고선 임 총관이 답했다.
“벌써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친구분께서도 들어오시지요.”
“예, 그럼 실례 좀 하겠습니다.”
송운은 들어가는 동안 집 안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이곳도 여전하구나.’
하긴 변했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시간을 거스른 것은 오롯이 송운 자신뿐이었으니…….
앞서가는 임 총관은 모르겠지만 송운은 이미 다 익숙한 길이기에 사방을 둘러보며 따라가도 충분했다.
그렇게 임 총관이 장명도를 침상 위에 뉘어 놓고 나서야 송운이 잠시 숨을 돌리자 임 총관이 먼저 감사의 말을 전했다.
“큰 공자님을 모셔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거 술도 잘못하는 것 같은 친구가 어찌 그리 술을 마시는지……. 참으로 붙임성이 좋은 친구더군요.”
“허허, 그러게 말입니다. 소인도 저리 많이 드시는 건 자주 뵙지 못하는 모습인데. 모쪼록 이곳까지 데려다주셨으니 따로 방을 하나 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그곳에서 주무시고 가도록 하시지요. 소인은 임재덕이라 합니다. 회원장가의 총관을 맡고 있지요. 편히 임 총관이라 불러주시면 됩니다. 한데……. 다만 공자님께서는 어디서 오셨는지 여쭈어보아도 되겠습니까?”
날카로운 임재덕의 눈빛에 송운이 고개를 주억였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저는 하남성 평여현에 있는 송씨 가문의 장남 송운이라 합니다. 제가 민폐를 끼치는 건 아닌지…….”
“평여의 송씨 가문이라면……. 명망 있는 학사 가문이 아닙니까? 허어. 이런 귀한 손님이 오시다니. 아닙니다. 민폐라니요? 큰공자님께 참으로 좋은 인연이 닿았군요. 공자님 집처럼 편히 쉬시다 가십시오.”
아무래도 총관직에 있다 보니 주변의 가문들에는 빠삭하리라. 전생에는 어차피 제 발로 나온 집인지라 자신의 집안을 밝히지 않았으나, 이번엔 밝히는 것이 좋겠다고 여겨 밝힌 것인데 역시나 그는 알고 있는 듯했다.
“하하……. 예, 그럼 실례 좀 하겠습니다.”
임 총관이 안내해 준 방에 들어간 송운은 간단한 짐을 풀었다.
그러곤 침상에 누운 채 생각에 잠겼다.
‘이제 이 친구에게 위기를 어찌 알린다……. 그것이 또 고민이로구나.’
송운은 한참 동안을 고민하다 잠이 들었다.
第十三章. 악연(惡緣)
따사로운 아침 햇살에 눈이 부셔 잠에서 깬 송운은 간만에 단잠에 놀랐다.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잠에 들다니. 음, 역시 오랜만에 마신 술 때문인가?’
그동안 은근히 알게 모르게 쌓인 피로도 한몫했을 터다. 운기조식을 돌릴 틈도 없이 집에 와서도 동생들과 놀아준다고 일찍 깨서 온종일 돌아다닌 셈이니.
그러곤 바로 다음 날 이곳으로 출발했으니, 피곤할 법도 했다.
사실 오랫동안이라고 해봤자 벌써 진초가 아닌가.
‘그래도 그다지 나쁘진 않구나.’
송운은 대강 옷을 추스른 뒤 방 밖으로 나왔다.
“간밤에 편안히 주무셨습니까?”
가장 먼저 자신을 반겨 준 것은 임 총관이었다.
“예, 임 씨 아……. 임 총관님. 잘 주무셨습니까?”
“물론이지요. 큰 공자님께서는 아직 일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식사는 어찌하실는지요?”
“으음, 명도가 깨면 함께 하도록 하겠습니다. 신경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제 할 일을 하는 것뿐이지요. 그럼 편히 쉬고 계시지요.”
그 말을 끝내고 임 총관이 물러가자 송운은 방으로 다시 들어왔다.
‘어차피 아직 명도는 자고 있으니, 그사이 조사를 좀 다녀볼까.’
그렇게 생각한 송운은 우선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이야기를 꺼내어 풀어보았다.
‘본디 어떠한 사건이건 모두 이유가 있는 법이다.’
처음에 알려졌던 이야기는 장명도의 가문은 급작스럽게 마교(魔敎)의 끄나풀로 몰려 멸문(滅門)을 당하게 되었다.
한데 그건 진실이 아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밝혀지지만, 그것은 마교의 은밀한 계획 속에서 벌어진 음계(陰計)였고 이를 알 턱이 없던 구파일방은 오해를 한 것이다.
후일에 구파일방은 서둘러 사과를 하였으나, 이미 사과를 받을 회원장가는 멸문당한 지 오래.
사과한다고 하여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니 그야말로 분통 터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면 우선 마교부터 파보아야겠구나.’
송운은 우선 임 총관에게 양해를 구한 뒤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런 그가 가장 먼저 발걸음을 향한 곳은 허름한 뒷골목이었다. 거지들부터 시작해서 온갖 사회의 하층민들이 모여 사는 이곳에 하오문과 연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터다.
송운은 전생의 기억을 되짚으며 찾아 나갔다.
그때 당시의 암호(暗號)도 기억해내야만 했기 때문에 최대한 동원할 수 있는 기억은 다 동원시켰다.
어려운 듯하면서도 가장 손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 바로 하오문(下午門)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로 평소에는 도둑질, 매춘 등에 종사하는 최하층에 존재하는 문파다. 하나 그만큼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은밀하고 빠르게 유통되는 정보력을 무시할 수가 없기 때문에 찾아 나선 것이다.
비록 정파와 사파의 모든 무림으로부터 배척받는 존재들이었지만 개방의 정보력과 비견될 정도의 어둠 속에서의 정보력은 그들의 생존 수단 중 하나였다.
송운은 길거리에서 지루한 듯 턱을 괴고 있던 한 늙은 퇴기(退妓)에게 다가갔다.
“하늘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법이지.”
그들만의 은밀한 암호였다.
* * *
그의 암호가 맞은 것일까? 귀찮은 듯 대답하는 노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얼마나 알아보고 왔수?”
노파의 반응을 보니 알맞게 찾아온 듯했다.
‘맞았구나.’
송운은 곧바로 답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소.”
“저 골목을 틀어서 다섯 걸음 더.”
송운은 퇴기의 옆에 동전 열 냥을 내려놓고 곧바로 퇴기가 알려준 방향으로 향했다.
그 끝엔 한 낡고 허름한 책방이 보였다.
‘역시 정보를 파는 곳은 따로 있다 이거군.’
송운은 망설임 없이 문을 두드렸다.
똑똑-
“누구시오?”
“밤손님이오. 들어가도 되겠소?”
“들어오시오.”
누가 보아도 평범한 책방으로 보이는 이곳.
하나 이게 다가 아닐 터.
송운을 맞이한 수염을 잔뜩 기른 사내는 퉁명스럽게 말을 던졌다.
“우선 안으로 따라오시지요.”
역시나 책방 안쪽에 나 있던 문 안으로 한 번 더 들어가자 한참을 들어가니 겉모습과는 달리 깨끗한 내부가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는 한 중년의 남성이 앉아 있었다.
“간단명료하게 묻지. 최근 들어 중원 바깥쪽 세력이나 마교 쪽의 준동(蠢動)이 있었는지 그것만 알면 된다. 기한은 이틀을 주지.”
그런 송운의 말에 그도 더 이상 들을 필요 없다는 걸 알기에 바로 돈을 요구해왔다.
“은자 열 냥.”
은자 열 냥이라면 꽤나 큰돈이었다.
하나 송운은 마다하지 않고 탁자에 돈을 올려놓는다.
탁.
그만큼 어렵고 중한 정보라는 걸 알고 있었고 친구를 위한 일이다. 살리고자 마음먹었으니 어떻게든 살려낼 것이다. 또한 정보를 사는 데 있어서 급한 쪽은 늘 필요한 사람 쪽이다. 이 세계에선 흥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틀 뒤, 오초(午初). 일하 객잔 안 구석진 자리에서 보도록 하겠소.”
거래를 끝내고 난 뒤 더 이상 볼일은 없었기에 송운은 재빨리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쪽에 대한 정보는 이틀 뒤면 알아서 알아 올 테니.
‘그다음으로는……. 역시 직접 내 발로 뛰어야겠지.’
곧바로 밖으로 나온 송운이 그다음으로 향한 곳은 회원장가 집 바깥쪽이었다.
혹여나 스쳐 지나간 자리에 남아 있을 마기를 추적해보기 위함이었다. 가장 급한 것이 정보였다면 이젠 자신의 발로 직접 뛰는 것밖엔 남지 않은 것이다.
송운은 차분하게 벽을 하나 짚어나가며 혹시나 있을 마기를 느끼기 위해 온 신경을 손끝에 집중시켰다.
하나 몇 번을 둘러보아도 그런 것은 존재하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