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녀석. 무공 익힌 걸 저리 뽐낼 줄이야……. 허허.’
그런 송하의 모습을 바라보며 송운도 어이없게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는 도중 은근슬쩍 광대 패의 표정을 살펴보니 얼굴이 아주 새파랗게 질려 기겁하고 있었다. 설마하니 저런 꼬마 여자애가 고난도의 것을 두 번이나 성공할 줄은 꿈에도 몰랐으리라.
그에 반해 지켜보던 구경꾼들의 환호성 소리는 더 커져만 갔다.
* * *
광대 패 놀음 구경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기분이 몹시 좋은지 아까 선물로 받아온 당과를 연신 입속에서 오물거리는 송하를 보고 송운이 먼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야, 아까는 정황이 없어 내가 말을 하진 못하였으나, 아까 보니 너무 조심성 없이 다루더구나. 위험한 물건을 다룰 때는 늘 조심해야 한다. 기분 내는 것은 물론 좋으나 그러다 몸이라도 상하면 어찌한단 말이냐? 그리되면 부모님께서도 이 오빠들도 걱정하지 않겠느냐.”
그리 크게 위험한 것은 아니었으나, 오빠로서 동생을 향한 잔걱정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야단을 내면서도 송하가 기죽지 않도록 조심히 말했지만…….
그런 송운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송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웅. 미안해 오빠. 다음부터는 더 조심하도록 할게! 헤헤.”
다행히 기가 죽거나 삐지는 모습 대신 웃으며 대답해오는 송하였다.
‘여하튼 미워할 수 없는 귀여운 녀석들이로구나. 허허.’
앞으로 뛰어가는 송하와 그 뒤를 조금 더 빨리 걸어가며 따라가는 송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송운의 머릿속엔 문득 이 년 뒤 있을 화재에 대해 떠올렸다.
전생에서 가장 후회되었던 일이다.
화마로 인한 가족의 몰살.
그리고 송하의 어여쁜 얼굴의 반과 여인으로서의 삶을 앗아간 그것을 막아야 한다.
송운은 두 주먹을 꽈악 쥐며 이를 악다물었다.
그러자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인물이 있었다.
‘하면 이제 슬슬 그를 찾아보아야 할 때인가…….’
송운의 입가에 어딘지 알 수 없는 씁쓸함이 잔뜩 베인 고소가 그려졌다.
第十二章. 인연(因緣)
깊은 저녁.
송운이 홀로 사색에 잠겼다.
그가 처음 화재 사건에 대해 들었을 때, 그와 함께 떠올렸던 인물이 있었다.
“장명도(張蓂禱)…….”
송운이 그의 이름을 조용히 읊었다.
전생의 기억대로라면 그는 일 년 뒤 큰 화를 당할 것이다. 송운이 집을 나간 후 길거릴 배회하다 알게 된 친구였는데, 한동안 몹시 절친하게 지냈던 사람이다.
당시 장명도의 집안도 무인의 집안인데다 무재가 뛰어나 훗날 엄청난 고수가 될 것이라 주변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었다.
한데 그 모든 것들을 집어 던져버렸다.
장명도에게 있어서는 안 될 참혹한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때의 일로 안타깝게도 약관에 스승과 부모를 모두 잃고 복수에 눈이 멀어 스스로 검귀(劍鬼)가 된 인물.
‘그때 내가 홀로 나서는 너를 끝내 잡았더라면……. 끝끝내 보내지 않았더라면…….’
“후우.”
송운의 두 눈이 감기면서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 뒤로 한참 동안 소식이 없다가 이립이 되기도 전 검귀로서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길 전해 들었다.
젊은 나이에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져버린 너무도 안타까운 꽃.
비록 오래된 일이지만, 송운에게는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소중한 인연임은 분명했다. 그것이 화재 이전에 그가 막아야 할 또 하나의 사건이었다.
‘내가 그를 도와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움직인다면 아직 그에게 있었던 비극 자체를 막을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남아 있다. 아마 송운의 곁에 남았다면 평생을 함께 보낼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을, 복수에 눈이 멀지만 않았더라면 무림의 또 한 명의 떠오르는 이가 되어 명성을 떨쳤을 이다.
마침 그 친구의 집도 평여현으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송운의 감았던 눈이 떠졌다.
날이 밝는 대로 부모님의 거처로 찾아간 송운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 아버지. 며칠 바람도 쐴 겸 하여 집을 좀 비울 듯싶습니다. 그리 길진 않게 다녀올 터이니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 송운을 예령과 송악은 막지 않았다.
비록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진 않았으나, 시험을 보느라 그동안 정신없었을 아들이 잠시 심신을 다지며 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였는지 흔쾌히 허락한 것이다.
“그래. 그동안 고생하였으니, 잠시 마음 편히 여행을 다녀오는 것도 나쁘진 않겠구나. 그러도록 하거라.”
“너무 먼 곳까지는 가지 말고……. 늘 몸조심하여야 해. 알겠지?”
“예. 부모님께 걱정 끼칠 일 없게 하겠습니다.”
* * *
그길로 곧바로 송운이 향한 곳은 안휘성(安徽省) 위쪽에 위치한 회원(懷遠)현이었다. 지체할 시간 따위 없었기에 최대한의 속도로 달려갔다.
도착하니 그때의 기억이 조금씩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비록 약관에 이곳을 떠난 데다 시간이 오래 흐르긴 하였으나, 어찌 이곳을 잊을까?
집을 떠나온 이후 정처 없이 떠돌던 그의 두 번째 고향이 되었던 곳이다.
길도 그의 기억 속 모습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이로구나.’
송운은 벌써부터 설렜다.
두 번 다신 볼 수 없다고 여겼던 것들을 하나둘씩 다시 찾고 볼 수 있게 되었다.
회귀한 후 여태껏 그랬듯 그 친구 역시 그러리라.
익숙한 길을 따라 도착한 그 길의 끝에는 친구의 집이 보였다. 잠깐 옛 추억에 젖어있던 송운은 집의 대문이 열리며 누군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바로 장명도였다.
‘어딜 혼자 가는 것이지?’
송운은 곧바로 그의 뒤를 따랐다.
물론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알아채지 못하도록.
그리고 조금씩 가다 보니 그가 가려는 곳을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객잔에 가려나 보구나.’
아직은 땅거미가 완전히 지지 않은 시각이다.
그런 그가 홀로 객잔을 가려는 이유는 송운이 생각하기엔 단 하나였다.
‘또 홀로 술을 마시러 가는군. 거 친구. 술 좋아하는 건 여전하구만.’
송운은 작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전생에도 종종 술 한잔하는 게 어떻겠냐며 자신을 끌고 가곤 했다.
‘그래. 오랜만의 만남에 술로 친해지는 것도 나쁘진 않겠구나.’
그렇지 않아도 막상 오긴 왔으나, 어찌 그에게 말을 걸어야 할지 막막해했던 송운이다. 한데 이 무슨 우연의 일치인지 도착하자마자 그가 객잔으로 향한다.
되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그를 뒤따랐다.
* * *
송운은 혹여나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할까 걱정이 되어 그가 들어간 지 약 일각(一刻)이 흐른 뒤 자연스럽게 객잔으로 따라 들어갔다.
“어서 옵쇼!”
송운이 들어가자마자 어린 점소이가 활기차게 그를 맞이한다.
하나 그 역시도 반가운 얼굴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었다. 또래 아이 중에서도 조금 왜소한 체격을 가진 녀석이 또 성격은 좋아서 얼마나 싹싹한지 올 때마다 형님, 형님 거리며 잘 따랐던 기억이 송운의 머릿속을 스친다. 눈치도 빨라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귀신같이 먼저 알아채고 필요한 것을 가져다주기도 했던 아이.
‘허허. 이 녀석도 여전하구나.’
송운은 우선 자리를 잡기 전에 친구를 찾았다.
‘문 옆에서 가장 먼 구석진 자리.’
단 한 번에 어딜 앉았는지 찾아낼 수 있을 만큼 익숙한 사람. 그는 역시나 이미 간단하게 만두 하나에 술 한잔을 걸치고 있었다.
송운이 조심히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말을 건다.
“크흠. 거……. 옆자리에 같이 좀 앉아도 되겠소이까?”
“그러도록 하시오. 뭐 내가 이곳을 전세 낸 것도 아닌데 어찌 막겠소. 하하.”
역시나 송운의 예상대로 그는 호쾌하게 허락했다.
‘여전히 호걸(豪放)한 친구로구나. 그래. 본디 이 친군 낯도 잘 안 가리고 성격이 참 좋았었지.’
송운이 미소를 지으며 앉았다.
“여기 화주(火酒) 하나 주시게.”
송운이 술을 시키려 하자 장명도가 이를 막는다.
“같이 술 한잔하려던 것이 아니었소? 어차피 나 혼자 이 술 다 못 마실 듯하니 같이 마시는 건 어떻소?”
“허어. 내 그리 해도 되겠소이까? 그렇다면 나야 나쁠 게 없지. 여기 대신 소면 하나만 가져다주시게.”
“예이!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잠시 후 뜨끈한 국물에 잘 말아진 소면 한 그릇이 그의 앞에 놓였다.
노란색 고명과 잘게 썰린 파가 함께 색의 조화를 이루며 적당히 잘 익혀진 면. 송운은 곧바로 젓가락을 들고 한 입 크게 불어 입으로 넣는다.
후루룩-
‘그때의 맛 그대로다.’
뜨거운 김이 나는데도 쉼 없이 잘도 먹는 송운을 잠시 쳐다보더니 장명도가 먼저 말을 건넨다.
“배가 많이 고팠나 보오. 참 맛나게도 드시는구려. 내 분명 밥을 먹고 왔는데, 그쪽 먹는 모습을 보니 내가 다 배가 고파지려고 하오. 하하.”
스스럼없는 그의 모습에 속에서 무언가 울컥하니 차올랐으나, 먹던 소면으로 입으로 삼키듯 먹으며 꾹꾹 눌러 담는다.
탁.
그렇게 마지막 국물 한 방울까지 깔끔하게 비워낸 송운이 그에 답했다.
“내 점심부터 굶었더니 배가 참으로 고프지 뭐요? 하하. 그쪽 배에게 사과라도 해야 할 듯하오.”
송운이 소면을 먹는 그사이 홀로 조금 술이 들어갔는지 장명도의 입에선 술술 말이 나오기 시작한다.
“무슨 사과까지요. 한데 이 근처에서는 못 보던 얼굴인데 어디에서 오셨소?”
장명도가 먼저 그에게 물어온다.
하긴 이 마을에서 태어나 쭉 살아왔으니, 모르는 얼굴이라면 궁금하기도 할 터. 송운은 이때다 싶어 재빨리 대답했다.
“바로 알아보시는구려. 사실 이쪽 마을 사람은 아니고 저기 윗동네 하남성에서 왔소. 마음이 적적하여 잠시 바람을 쐬러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잠시 배를 채우기 위해 들른 곳인데, 이리 호탕한 친구를 만나게 되어 참으로 반갑소. 이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하는 것이 어떠하오? 보아하니 나와 비슷한 연배인 듯한데…….”
송운이 자연스레 말을 꺼내자 그도 입을 연다.
“나는 회원장가(懷遠張家)의 장남 장명도라 하오. 올해로 약관이 되었지. 그쪽은?”
“하하. 이것 참 인연은 인연인가 보오. 나는 송씨 가문의 장남 송운이라 하오. 나도 올해로 약관이 되었소.”
“같은 나이로군. 그럼 기왕 송 소협 말대로 이것도 인연인 듯한데, 친구가 되는 것은 어떻소?”
“그것 괜찮은 제안이로군. 하면 친구 된 기념으로 한잔 받으시게.”
송운이 술병을 들며 권했고, 장명도 또한 흔쾌히 술잔을 들며 받았다.
그렇게 한참을 둘이서 주거니 받거니 하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