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하나 좋은 일도 있었던 반면, 더 많은 고민거리도 생겼다.
‘이번 북경행은 생각보다 더 정신이 없었구나.’
길을 걷는 동안 내내 많은 생각들이 그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송운은 평가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고민에 빠졌다. 곧 자신의 집에 찾아올 화재, 흑야라는 베일에 둘러싸인 집단.
그리고 평목단이 준 가르침까지.
북경에 와서 얻은 것도 많았고, 알게 된 것도 많았다.
왠지 모르게 화재와 흑야라는 놈들은 연관성이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으나, 일단은 집으로 돌아가 차근차근 생각하기로 마음먹고 발걸음의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아직은 대비할 시간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니.’
第九章. 또 다른 인연
‘벌써 림영(臨穎)인가?’
송운은 오는 길 내내 평목단이 준 가르침을 조금씩 펼쳐나가고 있었다. 한 번의 가르침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닌 것이 알기에 더욱더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겨우 그 입구를 보았을 뿐이다.
자신을 위해서도 그 가르침에 보답하는 것 또한 빠르게 성장해나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늘 나 자신의 벽을 넘어 사방을 둘러보거라. 눈으로만 보려 하지 말고 마음으로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러고는 그들이 의미하고자 하는 모든 것들을 느껴라. 그래야만 진정으로 세상을 알고 무공을 알고 이치를 아는 것이니라.’
그의 말을 수없이 되새기고 또 되새긴다.
그리고 실천에 옮긴다.
두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세상을 느끼려 노력하고, 주변의 기와 하나가 되도록 노력한다.
‘아직은 무언가 하나 빠진 듯 애매하지만…….’
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날, 자연스럽게 그날 보았던 벽을 완벽히 넘게 될 것이다. 그동안은 송운이 기연을 얻어 천의선천기공의 도움으로 빠르게 발전하고 달려왔으나, 이제부터는 나 자신과의 싸움인 것이다. 무공 수련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깨달음도 중요한 시기였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평 의숙부님께서는 대단하시구나. 그 정도의 경지에 이른 것도 대단하시지만 그만큼 고마운 분이시다.’
만약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 자신은 아직까지도 조화경의 벽을 보지도 못한 채 홀로 끙끙 앓고만 있었을 것이다.
‘하니 이것도 또 하나의 기연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분명 벽을 스치듯 보았던 첫날에 비해 조금씩 자신이 성장하고 있음을 느끼는 송운이었다.
그렇게 이것저것 생각에 잠겨있을 때, 뒤쪽에서 한 여인이 급하게 달려오며 누군가의 도움을 요청하는 간절한 외침이 들려왔다.
하도 다급하게 부르기에 혹시 자신을 부르는가 하여 송운이 돌아보자 그 여인이 더 크게 외친다.
“저, 저기 거기 공자님! 저 좀 도와주세요! 제발요!”
누가 봐도 쫓기는 기색이 다분하여 머리는 다 풀어 헤쳐져 옷가지도 제대로 여미지 못해 정말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다급해 보였다.
‘어찌 저런 어여쁜 여인이 이리도 급박하게 쫓기고 있단 말인가?’
어찌 된 영문인지 알지 못해 잠시 고민이 들었으나, 자고로 무인이라면 곤경에 처한 이를 돕는 것이 당연한 것이 이치 아니겠는가? 송운은 고민하던 차에 그 여인에게 말을 건네었다.
“어찌 도와드리면 되겠소?”
하나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력이 엄청나게 응축된 기파(氣波파)가 송운의 코앞으로 날아왔다.
‘이, 이게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속으론 놀랐으나 송운의 육체적 반응이 더 빨랐다.
머리가 반응하기도 전에 이미 먼저 움직여 빠르게 내력을 손바닥으로 끌어올린 뒤 여인의 앞을 가로막고선 장력(掌力)을 흩어냈다.
콰아앙-!
“크윽……!”
하나 장력을 풀어 헤쳤음에도 차마 다 풀어내지 못한 장력이 남아 맨손으로 받아쳐 낸 것이다.
그 충격으로 송운이 서 있던 곳으로부터 뒤로 약 일 장(長) 정도 밀려났다.
‘엄청난 장력이구나!’
아무리 적은 양이 남았다 하더라도 약 일 장이나 밀려났다. 이미 날아오는 순간부터 느꼈으나, 맞받아치니 생각 이상으로 그 여파는 강력했다.
‘대체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기에 여인에게 이 정도의 무시무시한 장력을 내던진단 말인가?’
자신이 흩어 내버렸으니 망정이지 그걸 그대로 맞았다면 정말이지 중상을 입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느껴지는 고통에 얼얼한 손바닥을 쥐고선 슬쩍 미간을 찌푸린 송운이 대체 이게 무엇인가 싶어 앞을 향해 보았으나 이미 그 여인은 저 멀리 점이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아마도 경공을 익힌 것인지 그 속도가 몹시 빨라 송운을 한 번 더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역시 무공을 익힌 것인가?’
그리고 다시 뒤를 바라보는 순간 송운은 또다시 놀라야만 했다.
뒤를 돌아보자마자 한 젊은 사내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는 이제 이립(而立)이 좀 넘었을까?
다부진 체격에 적당히 큰 키.
거기에 새하얀 얼굴에 눈매 끝이 아래를 향하여 매우 보는 사람을 평안하게 해주는 듯한 인상이었다.
그런 그의 손에는 커다란 염주(念珠)를 쥐고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중인 듯하였다.
한데 그런 그의 인상과는 달리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매우 매서워 보인다.
‘내 착각이 아니라면, 왠지 내게 화가 난 듯해 보이는데…….’
하나, 송운의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 젊은 중이 먼저 작게 읊조렸다.
“시주께서는 저 색마의 동료이신 게요?”
목소리는 작지만, 베인 감정은 결코 쉽게 볼 수 없는 분노다. 아무것도 모르는 송운은 그저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내게 묻는 것이오?”
“…….”
중의 시선이 빠르게 송운을 지나쳐 이미 저 멀리 달아나고 있는 여인의 뒷모습으로 향했다. 이미 그의 눈에 어려 있던 분노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자세한 설명해 드리지 못해서 미안하오. 시주. 이후 인연이 있다면 또 뵙겠지요. 아미타불.”
그러곤 그 여인이 도망간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한다.
‘이 대체 어찌 된 영문이란 말인가? 도통 알 수가 없구나.’
대체 무엇 때문에 중이 여인을 쫓고 있는 것일까.
색마라는 이야기를 듣자 하니, 분명 무언가 사연이 있음인데 쉽게 그 속사정을 알 수는 없었다.
‘어여쁜 여인이 색마라…….’
송운의 입가로 잠시 묘한 웃음이 번졌다.
‘몇몇 이들은 오히려 좋다고 달려들지도 모를 일이로군.’
세상사 참으로 알 수 노릇이다.
그리 생각한 송운은 결국 마을로 발걸음을 향했다. 이곳에서 홀로 머릴 싸매고 고민한다 해봤자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은 마을로 가자.’
* * *
마을에 도착한 송운은 제일 먼저 객잔을 찾았다.
몇 날 며칠 동안 쉬지 않고 걸어온 탓에 피곤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아무리 무공을 배웠다곤 하나 송운도 결국은 사람이 아닌가?
가끔은 쉬어주는 것도 필요한 법.
그렇게 객잔을 찾아 헤매던 도중 송운은 마을 정중앙에서 무언가 익숙한 인물과 마주쳤다.
‘저 사람은……? 아까 그 중이 아닌가?’
송운은 그를 알아보았고, 그 역시 송운을 알아본 것인지 가던 길을 멈추고 멈칫했다. 그러곤 먼저 말을 걸어왔다.
“아미타불. 시주와 인연이 깊은가 봅니다. 여기서 이리 뵙는군요. 빈승(貧僧)이 아까는 정황이 없어 사과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송구합니다. 아미타불.”
“아닙니다. 분명 다급하신 일이었기에 그리하셨던 것이겠지요. 저도 얼떨결에 그리 순식간에 지나간 일인지라……. 그 여인과는 대체 무슨 일인 겁니까?”
“그것이 사실……. 후우. 그자는 여인이 아닙니다. 빈승은 본디 소림사에 몸을 담고 있는 이인데, 최근 요 일대를 어지럽히는 색마가 있어 이리 직접 잡으러 다닌 것입니다. 시주께선 언뜻 보셔서 잘 못 보셨을지 모르겠으나, 본디 그 색마는 여인들을 홀려내어 정기를 빨아 내력을 불리는 놈입니다. 그것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외모도 점점 더 여성스럽게 변한 것이지요. 아미타불, 아미타불. 모두 악업으로 쌓은 일인 게지요.”
“허어! 그런 것이었습니까?”
색마를 오롯이 여인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던 송운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 미색(美色)을 한 채 남자라니!
잠시나마 묘한 미소를 지으며 기이한 상상을 했던 자신을 떠올린 송운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게다가 놀라운 일은 더 있었다.
놀라게 할 정도의 장력을 통해, 고강한 무공을 가진 이임을 알기에 예측은 했다지만 정녕 소림사에서 직접 파송(派送)된 스님이라니.
전통과 역사, 거기에 더해 엄청난 신공을 다수로 보유한 소림은 무림의 태산북두(泰山北斗)라 불릴 만큼 거대한 집단이었다.
그들의 본산(本山)이 자리 잡은 하남에서야 더 말할 필요도 없을 터였다.
“그렇습니다. 시주께서 착각하셔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요. 이전 일은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드럽게 웃으며 말하는 중의 두 눈에 담긴 진심에 송운의 속내에서 다시 한번 감탄이 차올랐다.
‘과연 소림승…… 마음의 공부가 보통이 아니로구나.’
또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 색마를 잡기 위해 얼마나 고생하셨을지…….’
한데 그것을 본인의 실수로 모두 헛수고로 돌린 것이 아닌가?
“이거 참…… 허어,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애초에 방해를 하려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말 상상도 못 했습니다. 갑작스레 웬 여인이 뛰어오며 도움을 요청하기에……. 색마에 남자라니. 허…….”
당황한 송운이 횡설수설하자 짧게 합장하며 웃어 보인중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아미타불, 괜찮습니다. 그 또한 부처님께서 시주와 저의 인연을 묶어주시려 한 일 아니겠습니까.”
“인연이라니요?”
“하하. 옷깃만 스쳐도 인연일진데 이리 일절 안면도 모르던 사람끼리 이야기까지 나누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뜻이지요.”
그렇게 밝게 웃는 중의 모습을 보니 송운은 또 한 번 미안함이 밀려 들어온다.
“참으로 죄송합니다. 이걸 어찌해야 좋을지…….”
“아닙니다. 시주께 무언가를 원해서 말한 것이 아니니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이리 한 번 또 놓쳐버려 한동안 다시 꼬리를 드러내지 않을 테니, 그사이 제가 모르는 곳에서 다른 여 시주께서 화를 입으실까 걱정인 게지요. 아미타불.”
그렇게까지 말하는 중을 더 이상 송운은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다른 연유는 없었다.
다 잡은 악인을 놓치게 한 원인이 자신에게도 조금은 있기에 양심에 찔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