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과연 평 의숙부시구나. 한눈에 내 모든 걸 알아보다니……! 내 기마저 놓치지 않고 보셨구나. 역시나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이 아니었어.’
그러곤 이내 평목단이 말을 이어 나갔다.
“하나, 아직 부족한 것이 있구나.”
송운은 그의 마지막 말에 다시 바짝 긴장감이 들었다.
“분명 네 무공 속에는 무공 본래의 강한 힘도 존재하면서 내기의 흐름도 자연스럽다. 한데 아직 주변의 모든 것들과 조화롭지가 않구나. 너의 몸속 안에서만 하나의 소우주(小宇宙)를 이루고 있는 느낌이다.”
그런 그의 말에 송운은 더욱 귀를 열고 눈을 반짝거린다. 송운의 본능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건 분명 조화경으로 가는 길의 열쇠일 것이라고.
하나하나 듣고 몸과 마음에 새겨야 하는 것이라고.
“내 동작을 잘 보거라.”
그러곤 이내 평목단이 검을 들더니 기수식을 취하고선 이내 동작을 천천히 이어 나갔다.
“나 자신에게 의지가 있듯, 주변의 내기에도 의지가 있으며…….”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변의 내기가 강하게 그를 향해 요동친다.
검 끝과 그의 동작이 하나같이 여겨지면서도 주변에 떠도는 기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며 그 힘이 더욱 극대화된다.
“주변 만물 어디에도 의지가 존재한다. 하다못해 주변에 널려 있는 풀조차 그들은 그들만의 의지를 지닌 것이다. 이미 운이 너는 나만이 아는 지경은 모두 본 것이니, 늘 나 자신의 벽을 넘어 사방을 둘러보거라. 눈으로만 보려 하지 말고 마음으로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러고는 그들이 의미하고자 하는 모든 것들을 느껴라. 그래야만 진정으로 세상을 알고 무공을 알고 이치를 아는 것이니라.”
그 말을 끝으로 그의 동작은 멈추었으나, 송운의 머릿속에는 무언가로 가득 찬 기분이 들었다.
‘세상은 나 혼자 따로 보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모여 있는 그 모든 것들이 나와 함께인 것이로구나.’
그와 동시에 자연스레 스르륵 감긴 송운의 눈앞에는 거대한 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것이……. 조화경이란 것인가?’
그동안은 보이지 않던 것이 가르침을 받고 드디어 조화경의 벽이란 것을 직접 보게 된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금이 가던 도중 송운의 눈이 번쩍 뜨였다.
순간 겪었던 그 느낌은 마치 직접 겪은 것인 마냥 생생했다. 다만 알 듯 말 듯 한 애매모호한 느낌에 그친 것에 대한 아쉬움은 감출 수 없었다.
하나 마음을 다시 굳게 다진다.
‘벽을 무너뜨리진 못했으나, 그 벽을 내가 볼 수 있게 되었구나. 그래 그것만 해도 얼마나 큰 진전이더냐? 아쉬워 말자. 앞으로 내겐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은가.’
그런 송운을 지켜보며 평목단은 또다시 한번 놀랐다.
‘아쉽게도 역시 단숨에 벽을 넘지는 못했구나. 하나 이것만으로도 대단하다. 조금씩 시간이 흘러가면서 분명 저 벽은 완전히 무너져 내릴 터. 그 어린 나이에 벌써 조화경의 빛을 보았구나!’
그는 자신의 딸인 평서란이 다시없을 무재라 생각해왔다.
한데 그런 무재가 바로 자신의 곁에 한 명 더 있었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사위가 될 이.
이는 필히 하늘이 내린 복이리라.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 은공(恩功)을 어찌 해야 할지…….”
“으하하! 내 딸만 행복하게 해준다면 내 그보다 더한 값진 것은 없을 것이야. 문무겸비의 사위라니. 이 얼마나 큰 복이란 말이냐? 내가 사위 하나는 제대로 점찍어 두었구나!”
기뻐하는 평목단의 모습을 보니 송운 또한 마음이 즐거워졌다. 좋은 일이 함께 오니 이 어찌 좋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게 또 하루가 흘러가고 있었다.
* * *
달포 동안 있었던 평가를 뒤로 한 채 아쉬운 마음은 접고 드디어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떠나야 하는 날의 아침이 밝았다.
전날 미리 평목단에게 찾아가 말을 해두었기 때문이다. 짐을 챙기던 도중 그녀가 주었던 부적이 보였다. 그리고 어제저녁의 일이 갑자기 떠오르면서 송운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전날 저녁.
“평 의숙부님. 이젠 슬슬 고향 집으로 내려갈까 합니다.”
“흐음.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던가?”
“예. 집에 계신 부모님과 동생들이 걱정되기도 하고, 절 걱정 하고 계실 겁니다.”
“하기야, 이렇게 오랫동안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는 것은 너도 이번이 처음일 테니……. 내가 붙잡는다고 하여 더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지. 어찌 천륜을 한낮 인간이 헤집어 놓을 수 있겠느냐. 게다가 악이 그놈이라면 겉으로 티는 안내도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것은 뻔하니. 그래. 그럼 언제 가려 하느냐?”
“내일 날이 밝으면 곧바로 떠나려 합니다.”
“그렇구나.”
조금 서운한 표정이 평목단의 얼굴에 선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인 걸 알기에 이 이상 잡으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평서란의 눈빛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내일이면 너무 빠르지 않은가. 어찌 이리 야속하시단 말이냐.’
내일 하루는 자신과 보내고 그다음 날 가는 건 어떻겠냐고 말을 꺼내고 싶었으나, 차마 말하지 못했다.
송운이 꼬박꼬박 서신을 보내고 있는 것도, 그가 가족들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도 은연중에 모두 티가 났기 때문이다.
‘그래. 어차피 우리는 이어질 인연. 때가 되면 다시 보게 될 테니.’
“그러도록 하세요. 하면 저희 집에서 주무시는 건 오늘 밤이 마지막이겠군요.”
“허어. 이런 이런. 서란이가 많이 아쉬운 모양이구나.”
“아, 아닙니다. 아버지. 그럼 전 이만……. 먼저 방에 들어가 볼게요.”
“녀석도 참. 운이 네가 이해하거라. 하하.”
송운은 그런 그녀를 잡지 못했고 그렇게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방으로 돌아가 다시 짐을 싸고 있었다.
똑똑-
“누구십니까.”
“접니다. 송 소협. 잠시 나오실 수 있으신가요?”
“물론이오. 잠시만 기다리겠소?”
“예.”
잠시 후 나간 송운은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그곳은 다름 아닌 뒤뜰에 있는 연무장이었다.
“아까는 먼저 가버려서 죄송해요. ……갑자기 떠나신다고 하여 조금 놀랐습니다.”
“아, 그것이……. 미안하오. 그러려 한 것은 아니었는데.”
“후후. 알고 있습니다. 저도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렇소? 한데 이 시간엔 무슨 일이오?”
“이것을 전해 드리려고요.”
그녀가 뒤에서 조심스레 꺼낸 것은 하얀색 천에 둘둘 말려있는 검이었다.
“이건……?”
“보시다시피 검입니다. 송 소협께선 아직 딱히 검을 가지고 계신 게 아닌 듯하여 특별히 대장장이에게 직접 부탁한 것이에요. 마음에 드실진 모르겠지만, 어서 열어보세요.”
송운은 당황과 미안함이 동시에 들었다.
자신은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걸 내가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소. 난 아무것도 준비한 것이 없소만…….”
“저는 괜찮습니다. 송 소협께선 그저 기쁘게 받아주시면 됩니다.”
이제야 송운은 평서란이 왜 먼저 자리를 비웠는지 알 것 같았다. 내일 아침 일찍 떠난다고 하니 미리 맡겨둔 검을 찾아오기 위해서였을 터다.
송운이 미안함에 그저 머뭇거리자 서란이 재촉한다.
“어서 펼쳐보시지 않고 뭐 하세요?”
그녀의 말에 결국 그것을 받아든 송운은 잘 감싸진 천을 벗겨냈다.
그러자 짙은 녹(綠) 빛을 띤 난(蘭)의 문양이 새겨진 검파(劍把)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 거기서 다가 아니었다.
검초(劍鞘) 속에 감춰진 녀석이 진짜였다.
스르릉-
맑은 소리를 내며 드러난 검의 모습.
송운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길고 매끄러우면서도 날래게 잘 벼려진 검신(劍身)은 은은하게 빛나는 예기까지 더해져 더할 나위 없이 좋아 보이는 명검(名劍)이었다. 비록 무림에 이름난 검은 아니었으나, 그만을 위해 만들어진 검이기에 그 어떠한 것보다 송운에겐 보검이 되는 셈이다.
“참으로 멋지구려.”
송운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 보였다.
또한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느껴졌다.
“송 소협께서 본디 학문을 공부하시는 학사이시다 보니, 그에 걸맞게 검파에 난을 새겨 봤습니다. 왠지 어울리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일까?
‘마음에 들어 보여 다행이야.’
송운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자 평서란도 만족했는지 그녀의 입가엔 미소가 슬쩍 걸린다.
“자고로 검에는 이름이 있어야 한다 하던데……. 송 소협께서 직접 지어주시는 건 어떠하실는지요?”
“음, 내가 지어도 되는 것이오?”
“그럼요. 이젠 송 소협의 검이 아닙니까?”
그런 평서란의 말에 송운이 잠시 고민 하는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난초가 새겨진 어두운 밤하늘 속, 별처럼 빛나는 검이로구나.’
“빛날 환(奐)자에 별 성(星)자를 따와서 환성이라 하겠소.”
우우웅-
송운이 그의 이름을 부르자 검이 마치 자신의 이름을 알아듣겠다는 듯 예기를 뿜으며 반응하는 것 같았다.
“후후. 빛나는 별이라. 참 좋은 이름이네요. 이름처럼 멋진 검이 되길 바라겠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고맙소. 이 검으로 더 열심히 수련하여 그대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소. 그리고…… 내 이 검을 들 때마다 그대 생각이 날 듯하오.”
순간 송운의 말에 평서란의 얼굴이 붉어진다.
하나 어두운 밤하늘에 가려진 그녀의 얼굴은 송운이 볼 수 없었다.
“저도 다음의 만남까지 더 열심히 발전하도록 할게요.”
그렇게 전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동안 어느새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
* * *
“오랫동안 신세만 지다 가는 것 같습니다.”
“신세라니? 되레 우리가 고맙구나. 가는 길 조심히 가고, 도착하거든 서신이라도 한 통 보내주거라.”
“걱정마십시오. 평 의숙부님. 가장 빠른 서신으로 보내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한 총관님 그동안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다음에 뵐 때까지 몸 건강히 지내십시오. 그리고 평 소저. 조만간 있을 약혼식에서 보도록 하오.”
“조심히 가세요. 송 소협.”
더 이상 둘은 서로의 이별에 아쉽지 않았다.
다음의 만남엔 얼마나 더 서로가 발전해 있을지의 기대와 설렘을 가진 채 그렇게 다음의 만남을 기약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구나.’
송운의 발걸음은 올 때보다 훨씬 더 가벼워졌다.
그렇게 평가의 배웅을 받은 송운은 또다시 여정에 올랐다.
가는 길은 왔던 길보다 오히려 짐이 늘었다.
심장 부근에는 그녀에게 받은 부적이, 그리고 허리춤에는 검이.
마음속에는 많은 것들이 남았기에 혼자 가는 길이었으나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