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화
‘평 의숙부님인 듯한데…….’
요 며칠 통 얼굴을 보지 못했기에 반가운 마음에 잠시 인사라도 할까 했으나,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은 게 느껴지면서 곧 다가가려던 발걸음을 멈췄다.
‘아무래도 황궁 일이다 보니 그런 것이겠지.’
황궁의 무인들로 보이는 이들과 함께 잔뜩 굳은 채로 멀리서 지나가는 그의 모습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향시가 시작될 터라 더 이상 지체할 수도 없었다.
워낙 엄격한 시험인데다 천자께서 직접 보살피는 수도에서 치러지는 시험이다.
조금이라도 늦는다면 입장 자체가 불가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송운은 시험에 집중하기로 마음먹고 다시 발길을 재촉했다.
* * *
시험장 앞에는 어마어마한 인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일전의 원시를 볼 때와는 또 다른 인파에 그가 혀를 내두를 만큼 북적인다.
하나 그 모습만큼은 원시와 다를 바 없다.
가족 혹은 지인들의 배웅과 격려.
이것은 어느 시험장에서든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그런 걸 보고 나니 양조광의 빈자리가 조금 허전해져 오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번은 정말 혼자이구나.’
송운은 조금은 씁쓸한 마음도 들었으나, 지금은 그런 감상에 젖어있을 때가 아니다.
삼 년에 단 한 번 치를 수 있는 시험.
그동안 공부해온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하는 날이 바로 오늘이다.
그만큼 나라의 큰 대사(大事)라고도 볼 수 있는 오늘은 이곳에 온 모든 이들의 마음을 하나로 통일해 주고 있을 터.
잠시간의 방심은 혹독한 결과를 가져다줄 것이 뻔하였다.
‘이 시험을 치르는 인원이 일 만에서 이만 명 정도 된다고 하니, 북경의 모든 사람이 이곳으로 몰리기라도 한 것마냥 붐비는구나.’
눈으로 얼추 보더라도 수천 명은 되어 보이는 것을 보아 경쟁률 또한 만만치 않으리라.
‘그렇다고 해서 기죽지 말자. 어차피 다 똑같은 사람이 아니더냐.’
송운은 그렇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대문으로 다가갔다. 입장 증을 받기 전 신체검사를 받고 통과를 하여야만 지나갈 수 있는 첫 번째 문이었다.
원시 때도 하였던 절차지만 유독 더 엄격한 것이 이것, 향시다. 이미 한 번 겪어 본 일이지만 이번은 또 다른 긴장감을 들게 했다.
“다음.”
“안녕하십니까.”
송운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이미 조금씩 지친 기색이 보이는 시험관을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
하나 그는 그런 자그만 인사조차도 답하기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으며 서둘러 신체검사를 행한다.
‘하기야, 이런 인사를 오늘 하루 수천 번은 넘게 받고, 또 받아야 할 테니 그럴 만도 할 테지.’
송운 본인도 이해한다는 듯 별말 없이 통과라는 말을 듣고 입장 증을 받은 후 조용히 나왔다.
‘오천칠백칠십 번이라…….’
그는 조용히 입장 증에 적힌 자신의 번호를 되새기며 다음 문으로 걸어갔다. 혹여나 앞에서 걸리지 않은 물건은 없는지 다시 한번 소지품 검사를 받는 절차였다.
무사히 두 가지 관문을 통과한 송운은 드디어 세 번째 용문(龍門)을 지나 시험장 내부에 들어섰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장원은 벽돌로 된 칸막이와 흙 위에 판자 몇 개를 올린 독방들로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그야말로 감옥이 따로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이미 많은 수험생이 들어갔는지 사분지 일 정도는 사람들로 차 있었기에 송운 또한 잠시 숨 돌릴 틈도 없이 지시에 따라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약 칠 주야간 이곳에서 시험을 치르게 되겠지.’
어쩌면 그건 정말로 사람을 피 말리게 하는 방식이었으나, 약 한 달여 동안 심사가 끝나기 전까진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되는 시험 담당자들에 비하면 되레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도 드는 송운이었다.
‘게다가 첫 번째 시험이 끝나면 잠시간 바깥으로 나갈 수 있으니…….’
잠시 후 독방에 들어간 송운은 그야말로 그 안의 세상은 온전히 자신과 시험지. 그리고 시험 문제만이 존재하고 있는 내부.
자리를 잡고 지그시 눈을 감은 송운은 운기조식 자세를 취하며 그동안 공부한 것들을 모두 머릿속에 한 번씩 그려나갔다.
* * *
데앵-
뜨거운 가을 햇볕 아래 드디어 첫 번째 시험의 시작을 알리는 징 소리와 함께 베일에 감추어져 있던 시험 문제가 공개되었다.
시험 문제는 총 세 가지.
그중 가장 난해하다고 볼 수 있는 문제는 가장 마지막이었다.
삼(三). 중용(中庸)에 대하여 논하라.
‘중용이라…….’
이는 송운뿐만이 아닌 다른 수험생들도 예상했던 문제였을 터다.
하나 생각보다 시험장에서 마주치게 된 중용은 유독 그 무게가 묵직하게 다가왔다.
‘딱히 어느 장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닌 그저 중용에 대하여 논하라면…….’
송운은 조용히 붓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런 그의 손이 잠시 멈칫하는 듯하더니 막힘없이 그 붓의 끝을 종이 위를 쓸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송운의 성정을 닮은 조용하면서도 깊은 그 손짓으로 시작된 그의 붓 길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고 마치 하늘로 날아갈 듯이 훨훨 날갯짓을 치며 뻗어나갔다.
고요한 적막 속에 시작된 첫 번째 시험은 정신없이 흘러가 어느새 두 번째 시험, 세 번째 시험까지 막힘없이 진행되었다. 많은 이들이 시험에 지쳐 갔고 점점 피폐해져 가는 것은 말로 할 것도 없었다.
칠 주야 후.
많은 수험생이 더 잘하지 못하였음에 좌절하기도 하고 마치 정말 병든 닭이 된 것마냥 모두 힘이 없는 모습이었다.
수많은 인파가 바닷물이 들어왔다 빠지듯 빠져나가자 시험장 내부는 그야말로 텅텅 비어버렸다.
“후우…….”
송운은 그에 조금은 허탈하면서도 후련한 기분이 들었는지 하늘을 향해 숨을 한번 크게 들이셨다 내뱉었다. 물론 그의 상태는 다른 이들에 비하면 훨씬 나은 편이었다. 매일같이 운기조식을 통해 심신을 안정시켰기 때문이다. 게다가 꾸준히 닦아놓은 체력이 있었기에 생각보다 수월하게 끝낼 수 있었다.
시험도 전반적으로 어렵진 않았다.
첫날 중용에 관한 내용을 제외하고는 모두 제시된 주제가 명확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중용에 관한 답이 합격의 여부를 좌우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잘했다. 운아. 이 정도면 선방(善防)한 셈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격려시켰다.
굳이 장원이나 방안, 탐화가 아니어도 좋다.
‘기왕이면 상위권이었으면 좋겠지만…….’
그저 합격에 모든 의의를 둘 것이다.
* * *
거의 마지막으로 시험장에서 빠져나온 덕에 조용히 홀로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던 송운을 누군가 기다리고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간의 조금씩 축적된 피로감과 긴장감이 모두 눈 녹듯 사라질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반가운 사람.
평서란, 바로 그녀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러면서도 송운은 순간 어안이 벙벙하여 의아한 표정으로 평서란에게 물었다.
“……평 소저? 이곳까진 어인 일로…….”
하나 그의 반응과는 달리 평서란은 당연한 듯 당당히 말을 이어나간다.
“제가 이곳까지 발걸음 한 이유가 무에 있겠어요. 송 소협께서 시험이 끝나면 맞아줄 가족이 이곳엔 없지 않습니까? 하여 홀로 나오시는 것보단 누군가가 마중 나오는 것이 좋을까 하여 나온 거랍니다. 혹여 홀로 보낼 시간을 방해한 것이라면…….”
“아니오. 아니오. 그렇지 않아도 홀로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니 적적해지려던 참이었소.”
“며칠 만에 얼굴이 많이 수척해지신 듯합니다. 오늘은 제가 살 테니 맛있는 것 먹으러 가요. 부담 갖지 마시고 저만 믿고 따라오세요.”
약간은 들떠 보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내동 경직되어 있던 송운의 입가에도 그제야 미소가 살며시 피어올랐다.
며칠 후.
드디어 시험 결과가 나왔다.
북경의 중심에 붙은 방문(榜文) 앞에는 수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다. 사람들은 기대에 찬 눈으로 결과를 보러 나왔고 송운 역시 같은 마음임은 분명했다.
그의 이름을 찾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제일 위쪽 두 번째에 그의 이름이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방안으로 붙으셨네요. 축하드려요 송 소협.”
그 결과를 함께 보러 나온 평서란이 먼저 그의 합격에 축하의 말을 건네어왔다.
“고맙구려.”
‘허허……. 방안이라니.’
원시에 이은 두 번째 성과였다.
비록 장원은 아니었으나, 생각지도 못했던 결과에 송운은 기분이 묘해짐을 느꼈다.
‘가족들이 또 한 번 기뻐할 일이 생겼구나.’
방문에 이름이 걸린 사람들의 얼굴엔 기쁨의 눈물이 흘렀고 걸리지 못한 사람들은 안타까움과 절규의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송운이 있었다.
“우선 집으로 돌아가 아버님께 먼저 서신으로 소식을 보내는 것이 좋겠네요. 집으로 돌아가요.”
* * *
평가로 돌아와 가장 먼저 소식을 접한 평목단은 마치 자기 자식의 일인마냥 기뻐하고 축하해 주었다.
“으하하! 방안이라. 우리 사위가 또 한 번 일을 냈구나. 악이 녀석이 몹시 좋아하겠어!”
“그러게 말입니다. 아버지께서 무척 좋아하실 듯합니다.”
“그래그래. 평생을 학문에 뜻을 두고 산 친구니, 자식이 거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아마 속으로 좋아 날뛰겠구나!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해. 하면 집으로는 언제 출발할 예정이냐?”
평목단의 질문에 평서란도 귀를 기울인다.
“아무래도 가족과 떨어져 보낸 시간이 오래되긴 하여 조만간 가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흐음……. 그래도 기왕 여기까지 온 것, 연회를 열어 줄 터이니 조금만 더 있다 가는 것은 어떻겠느냐? 내 미래의 사위인데 나도 축하 정도는 해주고 싶구나.”
그렇게까지 말하는 평목단을 어찌 뿌리칠까?
더군다나 나라에서 열릴 예부상서(禮部尙書)의 연회도 참석해야 한다.
이미 약 염일(念日, 초하룻날부터 스무 번째 되는 날) 정도 되는 시간을 이곳에 머무른 송운이다. 그동안의 고마움도 있는 데다 조금 더 있다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곧 마음을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