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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전생-34화 (34/275)

제34화

“음…… 내 얼굴에 뭐가 묻었소?”

“예?”

“워낙 자세히도 보시기에…….”

“아…….”

그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얼굴을 너무 빤히 보고 말았다. 뒤늦게야 사실을 깨달은 평서란이 얼굴을 붉히며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그, 그저…… 제 약혼자가 어떤 분이신가 하여…….”

“아…….”

그 솔직한 이야기에, 송운의 얼굴도 함께 붉어졌다.

말을 내뱉은 평서란의 얼굴 역시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두 사람 사이를 가라앉힌 것은, 문틈 사이로 스며든 차가운 바람이었다.

“아…….”

바람이 볼을 적시자, 정신이 깨어난다.

“이, 일단 식사를 드는 게 좋지 않겠소? 이러다 음식이 다 식겠소.”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함께 밥술을 떠올린다.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는 듯한 동작을 하는 두 사람 사이로 때아닌 춘풍(春風)이 흘러갔다.

* * *

번쩍-

송운은 새벽같이 눈을 뜨자마자 어제의 일이 기억났다.

서란의 그 곱고 청초한 얼굴이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괜스레 얼굴이 붉어지며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미묘하게 빠르게 뛰는 게 느껴진다.

지난 몇 년간 기억 속으로만 떠올렸던 그녀를 드디어 어제야 다시 만난 것이다.

그 느낌이 너무도 생생하여 그의 마음을 마치 봄날의 비처럼 조금씩 내려 적신다.

‘이럴 때가 아니지. 마음을 좀 가라앉혀야겠다.’

송운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준비해온 무복으로 옷을 탈의했다. 어제 미리 한 총관에게 언질을 주어 방 옆에 있는 연무장을 써도 된다는 승낙을 받았기 때문이다.

연무장으로 나간 송운은 우선 가볍게 몸을 푼 다음 운기조식 자세를 취했고, 그렇게 한참을 수련에 매진하고 있을 때쯤이었을까?

누군가 그의 곁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짐에 자연스레 그곳으로 시선을 돌아갔다.

그 순간, 두 남녀의 눈이 마주친다.

“아, 혹여 수련에 방해가 된 것은 아닐는지요. 엿보러 온 것은 아니었는데……. 다만 이곳에 계신다고 한 총관께서 알려주시어서…….”

평서란은 속으로 아차 했다.

무인들에게 있어서 수련하는 장면은 같은 문파가 아닌 경우엔 허락을 받지 않은 이상은 서로 함부로 훔쳐보지 않는 것이 예의다.

처음부터 몰래 지켜보려 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북경 구경을 하러 가자는 말을 한시라도 빨리 전하기 위해 직접 온 것이었는데 그의 수련하는 모습에 잠시 숨을 죽이고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도 집중하는 탓에 쉽사리 말을 걸었다간 방해가 되어버릴 것 같아 끝날 때까지 기다리려 한 것뿐.

한데 하필 그 순간 눈이 마주쳐 버렸다.

“아, 아니오. 괜찮소. 어차피 한집 안에 있다 보면 한 번쯤은 다 보게 되는 것이니.”

조금 당황하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꺼낸 그 말은 되레 평서란의 얼굴을 붉게 물들이는 꼴이 되어버렸다.

하나 그런 모습도 잠시.

무언가 골똘히 고민하는 듯하더니 평서란이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에 보인 그의 무공은 단순히 호신용 정도의 무공이 아니었다. 겉으로 보기엔 잘 티가 나지 않지만 내기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그녀라면 보는 관점이 달라진다.

그리 오래 지켜본 것도 아니건만 그의 몸동작은 잘 벼려진 검처럼 날카로우면서도 익숙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전체적으로 몸 안에서 흐르는 내기의 움직임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동작끼리 연결되는 부분이 막힘없이 자연스럽다. 기와 육체가 마치 하나가 된 듯 따르니……. 송 소협은 벌써 심기일체(心氣一體)의 경지란 말인가?’

하루 이틀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무위가 아니라는 소리다. 결국 그녀는 끓어오르는 머릿속의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송운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다.

“한데 제가 멀리서 언뜻 보아도 무공 실력이 보통이 아닌 것 같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무공을 어디서 배우셨는지 여쭈어보아도 괜찮을지요……?”

송운은 슬쩍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역시 궁금하겠지.’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았다면 어쩌면 당연한 반응.

그런 그녀의 모습이 싫진 않았다.

오히려 무공에 관해 얘기할 때 눈이 초롱초롱해지는 그 모습이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여인이라 하여도 무관 집안의 여식.

어쩔 수 없는 무관의 피가 끓어오르는 것일까?

조금 전의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비해 그녀의 눈은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확실히 학사 집안의 학문을 닦는 이가 수준급의 무공을 연마한다는 건 그녀의 눈엔 신기하게 보일 법했을 것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의식에는 학사는 무공에 관심이 없는 법이니…….

물론 그렇다고 학사라고 하여도 어느 정도 무술을 배울 순 있다. 하나 무공을 정식으로 배운 사람이 잘 없기 때문에 그만큼 더 궁금증이 증폭되었을 터.

송운은 순간 고민했다.

사실대로 말하느냐, 아니면 거짓을 섞느냐.

하나 이내 그의 고민은 사그라졌다.

어차피 결혼하고 살다 보면 언젠가는 드러날 일.

굳이 거짓말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독학이라오.”

“예? 독학이요?”

그의 말에 깜짝 놀란 토끼처럼 눈이 동그래져 답해오는 평서란의 모습에 송운은 다시 한번 차분히 대답해 주었다.

“그렇소. 따로 스승님이 계신 것은 아니고, 책을 보고 홀로 독학한 것이오.”

이미 진실을 말하는 그의 말에는 막힘이 없었고 그런 그의 담담함 속에 평서란은 속으로 한 번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찌하면 독학으로 저 정도 무위에 오를 수 있다는 말인가?’

처음엔 그저 그가 연무장에 있다는 말에 학사로서 건강을 챙기기 위해 어느 정도 운동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한데 멀리서부터 지켜본 그의 모습은 결코 그런 수준의 것이 아니지 않은가?

대답을 들은 평서란이 사색에 잠겨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어색해진 분위기를 돌리기 위해 송운이 먼저 말을 다시 꺼냈다.

“한데 아직 아침을 먹기엔 시간이 조금 남은 것으로 알고 있소만. 이곳까진 무슨 일로……?”

송운이 무척이나 궁금하다는 어투로 평서란에게 묻자 잠시 깜박했다는 듯 손뼉을 살짝 치더니 이내 대답한다.

“아, 그렇지요. 오늘 아버지께서 송 소협께 북경을 구경시켜주시기로 하시지 않았습니까. 한데 아버지께서 일이 바쁘게 되셔서 제가 대신 안내해 드리기로 부탁을 받았기에……. 혹여 싫으시다면…….”

평서란이 살포시 고개를 돌리며 말끝을 흐리자 송운이 고개를 저으며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 리 있겠소? 평 소저가 함께해준다면야 나야 고맙기 그지없는 일 아니오. 한데 지금 내 꼴이 이러하구려.”

송운은 수련하는 동안 땀으로 흠뻑 젖어버린 자신의 몸을 멋쩍은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평서란은 그런 송운의 모습을 보며 그제야 긴장이 조금 풀렸는지 미소를 지었다.

“후후. 예. 천천히 마무리 지으시고 오세요. 설마하니 그 정도 시간도 드리지 않겠습니까? 그럼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 * *

평서란이 떠난 후 곧바로 거처로 돌아온 송운은 손발이, 아니 정확하게는 마음이 몹시 바빠졌다.

평서란을 기다리게 하기 싫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더 빨리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까.

평소보다 더 빠르게 목욕을 마친 그는 갈아입을 옷을 보던 차에 물 밀려오듯 드는 후회와 허탈감을 감출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괜찮은 옷 몇 벌 정도는 들고 올 것을…….’

생각해보니 자신이 들고 온 짐은 정말로 별것 없었다.

먹과 벼루, 붓.

그리고 수련복 두 벌과 집에서 나설 때 입고 왔던 학사복 두 벌.

아무리 뒤져봐도 정말 그것들뿐이었던 것이다.

그나마도 학사복은 꽤나 긴 여행길에 모두 더러워져 빨래해야 할 상황이었다.

‘평생 여인과 함께 무언가를 해보려 생각한 적이 없으니…….’

아니 실상 집이었다고 한들 달라질 상황은 아닌 듯했다. 자신의 옷장에 무슨 옷이 있는지 정도는 송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 난감한 심경(心境)에 빠져있던 송운은 고민 끝에 옷 한 벌을 골라 들었다.

‘하아……. 어쩔 수 없지 않은가. 탓하려거든 날 탓해야지.’

그 시각 평서란의 거처.

그녀 또한 자신의 옷장을 열심히 뒤지고 있었다.

한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예쁜 옷이라곤 눈에 띄질 않는다. 있는 옷이라곤 잔뜩 개어있는 무복뿐. 딱히 이렇다 할 여인의 외출복 한 벌이 없다.

그나마 예쁘다고 생각되는 옷은 이미 오래전 입었던 옷이라 작아진 지 오래.

‘대체 난 외출복 한 벌도 없이 어찌 살아온 거지?’

물론 그녀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어릴 적이야 어머니가 살아 계셨기에 예쁜 옷도 입히고 하셨으나, 돌아가시고 난 후엔 정말 영락없는 사내아이처럼 살아온 그녀다.

어차피 태어났을 때부터 짝은 정해져 있었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론 마음의 벗이라고는 무공뿐이었으니 다른 또래 여아들처럼 몸을 치장하고 하는 것보다야 당연히 수련을 하는 시간이 더 좋았기에 신경을 쓴 적이 없었던 것뿐이었다.

그랬던 것이 결국 지금의 이 사달이 나게 될 줄이야……. 그녀의 고운 얼굴엔 곤혹스러운 표정이 잔뜩 떠올랐다.

“하아……. 그나마 괜찮은 옷은 이건가.”

결국 평서란이 마지못해 손끝에 걸린 옷을 집어 들었다.

* * *

약속 시간에 맞춰 먼저 도착한 것은 송운이었다.

그래봤자 촌각의 차이로 평서란이 도착했다.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는 순간 둘은 웃음을 간신히 참아내야만 했다.

‘푸흣.’

‘허허…….’

평소에 웃음이 그다지 많지 않은 평서란이지만 서로의 모습을 보니 도무지 웃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송운을 보면 마음이 편해지면서 남들 앞에선 하지 않고 억누르던 행동들이 너무도 자연스레 터져 나왔다.

“아, 이게……. 사실 먼 길을 다니기엔 짐이 너무 많기에 좀 줄이려다 보니 옷이…….”

“아닙니다. 저도 똑같은 신세인걸요. 어찌 송 소협의 탓을 하겠습니까? 그런 걱정일랑 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그 둘이 웃은 이유는 단 하나.

둘 다 입은 옷이 무복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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