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화
‘평가로 가자.’
생각보다 평가를 찾아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황제의 검이라 불리는 만큼이나 백성들에게도 넉넉한 인심(人心)을 쏟은 덕에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북경에서 평가는 유명했기 때문이다.
“저곳이 평가입니다.”
마지막으로 길을 물은 이가 친절하게 답변하고 떠난 후 송운은 그가 가리킨 집 앞에 서서 우두커니 대문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큰 집 크기에 잠시 놀랐으나 누군가가 말을 걸어오는 덕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곳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 내 이리 정신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닌데 미안합니다. 이곳이 평가가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무슨 용건으로 찾아오셨는지요?”
“아, 그 부분은 미리 전갈을 넣었습니다. 송운이라 전하면 아실 겁니다.”
하나 그 문지기는 송운이라는 말에 먼저 반응했다.
그가 도착하기 오래전 평목단이 가솔들에게 미리 언질을 해두었기 때문이었다.
“아! 운 공자님이 맞으십니까? 어서 이리 안으로 드시지요. 주인어른께서 오랫동안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가 반가이 아는 척을 하며 앞장서서 들어가자 송운이 그를 뒤따랐다.
안으로 들어서니 밖에서 본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웅장했다.
‘과연 황제의 검이 머무는 집답게 정말 크구나. 이 대단한 집안이 천년만년 유지되었다면 우리 송하도 그 고생까진 하지 않았을 텐데…….’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별생각이 없었는데, 막상 평가의 권세를 직접 눈으로 보니 더욱더 아쉬운 건 사실이다.
하나 이미 지난 일.
지금은 전생이 아니라 현생이다.
과거엔 실수했을지언정 앞으론 자신이 곁에서 지켜주면 되는 것이다. 한데, 그것까지 생각하고 나니 문득 기억 저편에 감춰진 희미한 사실이 하나 떠올랐다.
바로 몇 년 뒤에 있을 평가의 몰락(沒落).
다행히 그때 탈출한 약혼녀는 갈고닦아두었던 실력을 발판삼아 무림의 고수가 되어 다시 가문을 일으키지만, 그건 시간이 한참이나 흐른 뒤였다.
그야말로 고생 끝에 다시 얻은 명예이다.
거기까지 생각을 해놓고 보니 무언가 두 가지 사건에 묘하게 공통점이 생긴다.
이 년 후.
송운의 미간에 내 천자가 슬쩍 새겨졌다.
‘집에 화마가 이는 것도 평가가 몰락하는 것도 모두 이 년 뒤다. 그렇다면…….’
어쩌면 이건 화재만 막아야 할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직감(直感)이 강하게 그의 육감을 자극시킨다.
‘생각보다 큰 사태일 수도 있겠어. 앞으로 남은 시간은 이 년이다. 그 안에 모든 걸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에 굳은 결심을 한 것인지 송운의 입가가 무겁게 억눌렸다.
* * *
“으하하하. 이게 누군가? 내 미래의 사위가 아닌가! 그렇지 않아도 언제 도착하나 매일같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느라 고생했구나.”
여전히 쾌활한 웃음 내뱉으며 자신을 한가득 반기는 이.
바로 평목단이었다.
“예. 평 의숙부님.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그럼! 그렇다마다. 악이와 제수씨. 그리고 조카들 모두 잘 지내고 있고?”
“예, 건강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으하하! 이거 이거 못 본 사이 이젠 남자가 다 되었구나. 아주 훌륭하게 자랐어. 우리 서란이를 마음 놓고 맡겨도 될 만큼 말이야.”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해주려는 듯 오 년 전 어깻죽지에나 닿아있던 송운이 그 커다랗던 평목단과 같은 눈높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 반면 갑자기 튀어나온 서란의 이름에 약간 헛기침을 하고 있는 송운을 인자하게 바라보더니 평목단이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은 꽤 늦었으니 푹 쉬도록 하고 내일부터 천천히 북경을 소개해주도록 하마. 어차피 하루 만에 돌아볼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니 말이다. 한 총관 방으로 안내해 주게. 내 곧 황궁으로 다시 가봐야 할 일이 있어서…….”
조금은 미안한 표정으로 곁에 서 있던 한 총관을 쳐다보자 그가 슬쩍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걱정하지 마시지요. 주인 어르신. 제가 알아서 잘 모시겠습니다.”
“그럼 잘 좀 부탁 하네 한 총관. 내일 보자꾸나. 운아.”
미안한 표정이 가득 담긴 평목단이 자리를 비우고 나자 한 총관이라 불린 이가 송운을 안내했다.
“우선 앞으로 머무르게 되실 방부터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절 따라오시지요.”
안내된 방은 생각보다 크고 깔끔했다.
‘혼자 머물 방치고는 너무 크긴 한데…….’
곳곳에 낯익은 새 책도 제법 쌓여있는 것이 향시를 준비하는 자신에게 맞추어 신경을 많이 쓴 듯해 보였다. 방이 좀 과하게 큰 면도 있어 거절하고 싶었으나 준비해 준 사람에게 실례되는 일이라는 걸 알기에 더 이상 말은 꺼내지 않았다.
“목욕을 하시려거든 미리 시녀들을 불러주시면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그럼 저녁 식사 시간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때까지 편히 쉬십시오.”
말을 마치고 총관이 물러가자 송운은 그제야 짐을 풀기 시작했다. 짐이라고 해봤자 애초에 무겁게 싸 들고 온 짐이 아니었기에 소소한 짐을 푸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한쪽에 들고 온 짐을 모두 풀고 커다란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니 연무장이 펼쳐져 있다.
‘생각보다 크기가 작은데?’
분명 집 안으로 들어올 때 보았던 연무장은 훨씬 크고 넓었다. 반면 자신이 있는 방 바로 옆에 붙어있는 연무장은 그것에 비해 확연히 작다.
‘아마도 개인 연무장 정도 되는 것 같구나.’
무관이 사는 집이니 충분히 있을 수 있을 것이라 여긴 송운은 이윽고 방문을 나와 곁에 지나가던 시녀에게 말을 걸었다.
“이보게. 목욕물을 좀 받아주겠는가? 식사 전에 미리 씻는 것이 나을 듯하여…….”
그러자 그의 말에 시녀가 당연하다는 듯이 당황하지 않은 채 차분히 대답한다.
“아 예. 조금만 기다려주시지요. 공자님. 곧 준비해드리겠습니다.”
* * *
하얀 김이 솔솔 올라오는 목욕물에 몸을 담근 송운은 그제야 그동안 알게 모르게 쌓여온 여행의 피로가 풀리는 듯했다.
‘그래도 나름 심법을 돌리며 피로를 풀었다고 생각했거늘…….’
그것과는 또 다른 식의 피로가 쌓였던 모양이다.
그렇게 개운히 목욕을 끝낸 송운이 다음으로 향한 곳은 저녁 식사를 위한 자리였다.
“오셨습니까?”
그곳에는 한 총관이 자신을 맞이했다.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그의 의도를 알아챈 것인지 한 총관이 답했다.
“주인어른께서는 황가에서 일이 조금 늦게 끝나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먼저 드시면 될 듯합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리 알겠습니다.”
식사 자리는 조촐했다.
말 그대로 자신 혼자만 덩그러니 놓인 상황.
분명 밥상 위에는 한 명분의 자리가 하나 더 마련되어있었으나, 의심조차 하지 않는 송운이다.
‘그러고 보니 평 의숙모께서는 오래전에 돌아가셨다고 했던가…….’
자신이 듣기론 서란에겐 따로 형제가 있는 것도 아니라 들었다.
외동딸에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단출한 가족.
늘 동생들 덕에, 아니 대다수 송하 덕분에 시끌벅적한 자신의 집과는 조금 색다른 분위기에 어색하기도 했으나 회귀 전에는 실상 익숙하던 일이 아니던가.
‘새삼 그때의 기억이 상당히 오래전 일 같구나.’
그래서인지 송운은 분위기에 금세 적응하고서는 곱게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을 얹으려던 순간이었다.
“어찌 혼자 밥을 들려 하십니까?”
뒤에서 들려온 음성은 어찌나 고운지 여전히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듯 맑고 청아하여 그의 마음속까지 맑아지는 기분이 들 정도로 고왔다.
이 집안에 여자들이라곤 시녀들 뿐.
그리고 단 한 명의 딸이자, 안주인 노릇을 대신하고 있는 여인.
그 이름이 송운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평서란.’
송운은 집어 들었던 숟가락을 놓은 채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꽤나 낯익은 듯하면서도, 어딘지 신비롭기도 한 여인이 고운 자태를 뽐내며 서 있었다.
“평 소저.”
“그간 잘 지내셨나요, 송 소협.”
“물론…….”
작게 웃으며, 짧게 답한 송운의 눈이 작은 떨림을 비추었다.
‘여전히 아름답구나.’
전생에 일평생 여인과의 인연이 깊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다른 마음의 문제인지는 몰라도 평서란의 앞에만 서면 떨림을 감출 수가 없다.
다행인 점을 뽑자면 일전, 처음에 비하자면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다는 사실일 터다.
“평 소저도 잘 지내셨소?”
덕분인지, 초면에 비해서는 제법 말문이 트였다.
“예. 보이시는 대로.”
평서란이 웃으며 답하자, 막 피어난 수련(睡蓮)과 같은 청초함이 방안을 가득 메운다. 애써 다잡은 송운의 마음이 단숨에 한껏 부풀어 올랐다.
“괜찮으시면 함께 들어도 될는지요?”
“물론이오. 내 어찌 마다할 수 있겠소.”
거부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어딘지 모르게 거칠어진 콧김과 함께, 붉어진 얼굴로 답하는 송운을 바라보며 작게 웃은 평서란이 자리에 앉았다.
“후후…… 소식은 들었습니다. 이번에 향시를 보러 오셨다고요?”
“덕분에 시험을 치르기 전 마음 편히 준비를 할 수 있어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송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아무쪼록 내 집이라고 생각하시고 마음 편히 쉬시다 가셨으면 좋겠어요.”
“그저 말만이라도 고맙소.”
송운이 평서란의 행동 하나, 표정 하나를 무엇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직시하며 답한다.
어수룩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평서란의 눈에는 차라리 그런 송운의 직설적인 모습이 솔직하게만 보였다.
‘적어도 믿을 수 있는 사내 아닌가.’
무관인 평목단의 밑에서 자란 탓에, 평서란에게 있어 사내를 평가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의(信義)였다.
믿음 없는 관계는, 그저 부질없는 심력 소모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 있어, 눈앞의 송운이 남은 평생을 함께할지도 모르는 인생의 반려자로 낙점되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있어 기분 나쁜 일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한 생각을 하며, 웃음 짓는 평서란을 향해 고개를 갸웃거린 송운이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