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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전생-28화 (28/275)

제28화

어쩌면 몇십 년 동안 속으로 꾹꾹 눌러 쌓아두었던 화풀이를 애꿎은 도적놈들에게 한 것일지도 몰랐다.

하나 그는 그것만으로는 분풀이가 되질 않았는지 연신 손을 오므렸다 펴며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온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을까?

그의 눈이 번뜩이며 사방을 쓱 훑더니 이내 조용히 혼잣말을 지껄였다.

“아니지. 아니야. 무턱대고 나왔다간 또다시 놈들이 대거 쫓아올지도 모르지. 으흐흐흐……. 몇십 년도 참아낸 내가 아니던가? 자칫하다간 분노에 눈이 멀어 일을 그르칠지 모른다. 혹시 모르니 며칠만 더 조용히 지내봐야겠다.”

그렇게 마음먹은 그는 잔혹하게 살해당한 사체들만을 남긴 채 빠르게 사라졌다.

* * *

송가네 뒤뜰은 오늘도 어김없이 시끌벅적했다.

질풍신공을 얻은 송 씨 삼 남매가 더욱더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을 얻었으니, 그만큼 더 열심히 하는 것이 맞는 것일 터.’

처음 질풍신공을 얻었을 때처럼 마냥 다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기존에 없던 무공이다 보니 송운 스스로가 다듬어야 하는 부분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나, 송운은 그조차도 기뻐했다.

무공의 진전에 있어서는 무인들의 최고의 열락(悅樂) 중 하나가 아니던가?

또한 송운은 자신만 익히는 것에 멈추지 않고 송후와 송하에게도 전했다. 특히나 송하 같은 경우는 무공에 대한 관심과 이해도가 남달랐기에 어쩌면 정말 호신용을 벗어나 무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판단 아래 이루어진 결과였다. 어차피 무공에 발을 들인 이상 남들보다 뛰어난 것이 더 나을 테니.

그렇다면 하나라도 더 가르치고 이끌어 주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리라.

역시나 송하는 예상대로 빠르게 따라왔고 송후도 조금 더디긴 하나 잘 따라오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예전과 수련이 달라진 건 딱히 없었다.

다만 질풍각을 익힐 때와는 달리 손에 검이 들렸다는 것 정도의 차이일 뿐.

첫날 구해다 준 검을 받으며 송하가 제일 기뻐했다.

다만 진검이 아닌 목검이란 한계가 있긴 했지만…….

검이라는 것이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되레 사용하는 이에게 날을 세울 수가 있으니, 그것을 대신할 목검을 구해다 준 것이다.

“우와, 운이 오빠. 우리 정말 검도 익히는 거야?”

“그래. 오늘부턴 검법도 가르쳐주마. 하나, 목검이라 가벼이 여기면 아니 된다. 늘 진검처럼 조심히 다뤄야 할 것이야.”

“웅웅! 걱정 마 오빠!”

비록 목검이긴 하나 그 무게가 제법 묵직할 법도 하거늘, 요리조리 돌려보며 눈을 빛내는 송하를 보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녀석, 제법 맹랑한 구석이 있다니까.’

처음 구해올 당시에도, 송후보단 송하가 더 반응이 좋을 것이라 여기긴 했으나 한 치의 어긋남도 없으니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했다.

하나 그러면 어떠하고 저러면 어떠하랴?

그저 동생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 마냥 행복한 송운이다.

“후야, 거기서 자세를 조금 더 비틀어야 한다. 허리의 탄력을 이용해서…….”

“이, 이렇게 말입니까?”

어느덧 나이가 지학에 가까워져 가는 송후는 이젠 제법 어린 남아가 아닌 소년의 티가 났다.

여인처럼 희고 곱던 피부는 어느덧 햇볕에 적당히 그을려 건강해 보였고, 체격은 자신보다는 못하였으나 지속된 무공수련 덕분인지 어깨는 벌어지고 키까지 한층 성장한 모습이다.

거기에 여전히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총명한 눈빛과 점점 뚜렷해지는 이목구비는 한층 그를 빛나게 해주고 있었다.

‘잘 크고 있구나.’

하루가 달리 자라는 동생들의 성장은 송운에게도 흐뭇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신기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강호를 떠돌며, 온갖 마인들과 대적하던 그 시절보다 오히려 훨씬 더 즐겁고 평온했다.

그저 이런 소소한 일상들이 그에겐 힘이오, 행복이리라.

‘이렇게만 자라다오. 너희들의 행복은 내가 지켜주마.’

* * *

그렇게 별 탈 없이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즈음이었다.

식구들이 오순도순 모여 식사하는 자리에서 송악이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으음……. 운아.”

“예, 아버지. 말씀하시지요.”

“너에게 부탁이 하나 있구나.”

송운은 사뭇 진지하면서도 편히 말하는 송악을 보니, 슬며시 웃음이 흘러나온다. 이젠 정말 아버지와의 사이가 많이 호전되었다는 것이 온몸으로 실감이 날 정도였다.

아버지의 부탁.

예부터 성인들께서도 늘 강조하였듯 자식 된 도리로서 당연히 들어야 마땅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버지께서 웬 부탁이시지?’

하나 그러면서도 평생 부탁이라는 걸 모르던 아버지가 말하니 조금은 신기하기도, 궁금하기도 한 모양이다.

송운이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 부탁인데, 당연히 들어드려야지요. 무슨 일이십니까?”

“다름이 아니고, 크흠. 정확히는 조광이의 부탁인데…….”

망설임 없는 송운의 대답에 조금 망설이는 듯해 보였으나, 이내 말을 이어 나간다.

“조광이의 어머니가 매우 아프다고 하신다. 하여 본집에 좀 다녀와야 하는데……. 보표 하나 구하기도 마뜩잖은 상황일 게다.”

아버지의 부탁이라 하였거늘, 급작스레 나온 양조광의 어머니 이야기에 송운은 놀랐다.

“예? 어디가 얼마나 안 좋으시답니까?”

“그러잖아도 몸이 허하여 늘 몸져누워 계시던 것이 급작스레 악화된 모양이다.”

아침에 만났을 때도 멀쩡해 보였던 양조광이다.

다만 평소보다 조금 안색이 좋지 못했다는 정도가 다였거늘…….

양조광의 어머니가 아프시다니?

제법 친해졌다고 생각했건만.

여태 그런 사정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찌 된 녀석이 된통 티도 내질 않는 것이야.’

서운한 마음과 걱정스러운 마음이 겹치며 조금 화도 났으나, 사정이라는 것은 들어보아야 아는 것이다. 하여 송운은 아버지 송악이 하는 말을 꿋꿋이 들어 나갔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내 제자이자 너의 동문이 아니냐? 하니 제법 무공을 익힌 네가 도와주는 것이 어떠하겠느냐?”

“제 동문의 일이 아닙니까? 돕는 게 당연하지요.”

“그래. 내 역시 네가 알았다 할 줄 알았다. 그럼 당장 갈 채비를 하는 게 좋겠구나. 가는 길에 걸리는 시간도 제법 있을 터이니.”

“예, 아버지.”

그때였다.

“오빠, 나도 갈래!”

그 옆에서 듣고 있던 송하가 깡충깡충 뛰며 자신도 데려가라며 재촉한 것이다.

하나, 이번 여정은 단순한 여행도 아닐뿐더러 아직 어린 송하가 따라가기엔 무리였다.

두 부자 모두 같은 생각이었는지 동시에 반대를 외쳤다.

“안 된다.”

“아니 된다.”

“힝. 나도 무공 배웠는데……. 큰 오빠랑 같이 가고 싶단 말이야. 방해하지 않을게에. 웅?”

“그래도 안 된다. 하야는 아직 어리니 되레 위험해질 수 있음이야.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위험하다. 더 나이가 들고 무공 실력이 늘면 그때 오빠와 함께 구경 다니자꾸나.”

“같이 가고 싶은데……. 아빠아아.”

송운이 반대하자 이번에는 아버지인 송악의 다리에 매달리며 초롱초롱 눈을 빛낸다.

그 눈이 마치 길 잃은 사슴의 그것과도 같아 보는 순간 마음이 흔들릴 뻔하였으나, 이내 마음을 다잡고 딱 잘라낸다.

아무리 자식에게 약한 그일지라도 이것은 절대 허락할 수 없는 듯했다.

송악은 눈을 치켜세우며 단단히 못을 박았다.

“이번 일은 무슨 애교를 부리건 아니 된다 하였다.”

“치이……. 알았어. 대신 오빠 정말 다음에 내가 더 크면 같이 구경 다니는 거다?”

마지막 애교마저 먹히질 않자 여전히 입은 비죽 나왔으나, 더 이상 떼를 써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고집을 꺾었다.

아무래도 지난번 가족여행 이후로 바깥세상을 나갈 일이 없어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송운은 그런 송하가 조금은 안쓰럽기도 하였으나,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어찌 될지 모르는 세상이 아니던가?

이제 고작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송하다.

그런 어린아이를 바깥의 여정에 대동(帶同)하기엔 아무래도 조금 무리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래그래. 그러도록 하자.”

그렇게 같이 가겠다는 송하를 간신히 말린 채, 한참을 달래준 송운은 서둘러 짐을 싸기 시작했다. 급작스레 상태가 악화된 것이라면 한시가 급한 일임에 틀림이 없을 터.

지체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아버지.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운이 너도 몸조심하도록 하거라.”

* * *

“으흐흐흐.”

축축하고 음산한 기운이 맴도는 한 동굴 속.

그 짙고 끈적끈적한 어둠 속에서 누군가 부리부리한 눈을 빛내며 음흉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광탑귀마.

다름 아닌 얼마 전 피를 뿌리며 악랄한 살인을 한 장본인이었다.

‘피를 본 지 보름하고도 이틀이 더 흘렀다. 한데도 이놈들은 코빼기 하나 보이지 않는구나.’

그날은 오랜만의 먹잇감에 몹시 흥분한 것도 있었다.

하나, 정파 놈들에게 몇십 년을 쫓긴 그다.

자신을 향해 달려든 한 입 거리도 되지 않는 녀석들을 향해 독무 무공인 파적마권(破赤魔拳)까지 사용하며 죽인 것은 단순히 이성을 잃고 저지른 일이 아니었다.

그 흔적을 완벽하게 지우는 것도 가능한 그다.

한데 그런 그가 자신의 독문 무공을 사용한 것도 모자라 살인의 흔적을 감추지 않았다?

그것은 대놓고 내가 여기 나타났으니, 날 찾아와보라는 소리와도 같았다.

일종의 도박 아닌 도박을 한 것이다.

‘그런데도 쥐새끼 한 마리 나타나지 않은 것을 보면…….’

절념(絶念).

이제는 자신을 쫓는 것을 절념한 것이리라.

아니, 완전히 잊힌 것일 터였다.

그에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이제 더는 숨지 않아도 된다!’

귀적삼은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흥분과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 숫자가 어찌나 많은지 사방팔방에 널린 개방의 거지 놈들의 이목을 피해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지도 못한 채 산 세월이 자그마치 이십 년이다. 그렇게 깊은 산 속에 숨어 살면서도 단 하루도 마음 편히 눈을 감고 잠들어본 적이 없었던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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