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바로 송운이었다.
이것저것 다 해봐도 도통 벽이 뚫릴 길이 보이질 않으니, 이제는 잠을 굳이 줄이려 하지 않아도 답답함에 잠조차 오지 않는 것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따로따로 볼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합쳐서 읊어보는 건 어떠할는지…….’
많은 시행착오 끝에 발상을 달리하면 무언가 보이는 것이 있지 않겠냐는 것이 송운의 판단이었다.
어차피 초절정의 벽에 막힌 지는 벌써 한참이 흘렀다.
무엇이든 해보자는 판단을 내린 그에게 주저할 이유는 없었다.
송운은 천천히 질풍보와 질풍각.
그리고 천의선천기공의 구결을 읊어나갔다.
“풍무유강(風蕪柔强), 속완조행(速緩調行)…….”
그것들을 얼마나 번복하며 읽어나갔을까?
하나, 아무리 읽어도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무언가 벽을 뚫어줄 그런 속 시원한 것 말이다.
전번의 천의선천기공의 대오각성으로 인해 조금은 이 방법에 기대를 했건만,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니 송운은 이내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저 반짝 떠오른 생각에 해본 것이니 안 될 것이란 생각을 가지곤 있었으나, 실망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듯했다.
‘으음, 이것도 아닌 건가…….’
하기야 애초에 그 시초를 달리하니 아무리 같이 읊어댄다 한들 변하는 건 없으리라.
‘뭔가 보일 듯 말 듯 한 것이 참으로 애매하구나.’
송운은 그 이상한 느낌에 놓지도 못한 채 계속해서 구결을 읊었고, 더 이상 수도 셀 수 없을 만큼에 이르렀을 때 즈음이었다.
‘뭐, 뭐지?’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을 연계해 나가던 차, 가슴 속 저 먼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듯한 느낌이 차올랐다.
그러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았던 무언가가 그의 머릿속에 빠르게 나열되어 가기 시작한다.
반짝거리며 눈앞을 빙빙 맴돌던 그 모든 것들이 하나같이 저 멀리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처럼 송운의 머릿속을 가득히 수놓아 나간다.
‘성좌(星座)…… 인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스르륵 감은 채, 단순히 육안(肉眼)의 것을 벗어나 머릿속에서 떠다니는 것들을 심안(心眼) 보고 있으니 마음이 평안해지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어느 하나가 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채 서로가 서로를 허용하며 빈 공간(空間) 속에서 하나의 점으로 나열되더니 한 겹의 공간이 더 생기면서 점들이 서로 단 하나의 선으로 연계되어 나간다.
하나둘씩 선을 그어가며 그 커다랗던 빈 공간을 채워나가던 점들은 마침내 커다란 무언가를 이루어놓았다.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성좌와도 같았으나, 그것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송운은 깨달을 수 있었다.
‘……아! 모든 것이 합하여 유(有)에서 무(無)로 돌아가 또 다른 유를 창조(創造)해 내었구나!’
단순한 초식의 벽을 넘어선 순간이었다.
갇혀있던 개별(個別)체들의 벽이 부서지면서 초식이 무너지고 하나하나의 몸체가 합하여 커다란 성(星)을 이룬 것이다.
그것이 바로 천의선천기공의 숨어 있는 또 다른 효능이었다.
하나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을 이어놓는 것.
그것은 새로운 무공의 창조였다.
송운은 그대로 눈을 감은 채 질풍각을 떠올렸다.
아니, 이제 와선 질풍각이라 부르기도 뭐한 상황이다.
초식이 따로 존재하지 않고, 점과 점이 이어져 모든 움직임이 하나의 선이 되니 그의 모든 동작이 무공으로 승화(昇華)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질풍각이 이제는 질풍권(拳)도 질풍검(劍)으로도 모두 다 가능해진 것이다.
송운은 거처를 벗어나 넓은 밖으로 뛰쳐나갔다.
당장 실현해보지 않는다면 그것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러곤 이내 천천히 한 동작을 펼치기 시작한다.
한 획 한 획이 자연스레 이어지면서 때로는 마치 검술을 펼치는 듯 손끝으로 뻗어나간 무형의 그것은 부드럽게 허공을 긋다가도 금세 주먹으로 빠르게 찔러나갔고, 마지막으로 그의 발이 대기 중에 퍼진 공기를 날카로운 파공음을 만들어내며 찢을 듯 달려든다.
쌔애액-!
하나 그것들 모두 단 하나의 동작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동작을 마무리 지은 송운의 이마에선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땀방울 끝에 매달린 그의 입꼬리가 스윽 올라간다.
‘하나의 동작으로 모든 무공을 만들 수 있다니!’
이 기이한 무공은 송운 스스로 겪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에 한층 더해 질풍각이 가진 원초적인 한계까지 뛰어넘어버린 것이다.
본래가 가진 힘이 십 할이었다면 이제는 이십 할의 힘까지 쏟아낼 수 있다는 말이다. 놀랍고 또 놀라도 부족함이 없을 한없이 놀라운 일이었다.
그야말로 신공절학이 따로 없었다.
‘이것의 이름을 지어줘야 할 것 같은데…….’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던 송운은 양 손뼉을 마주치며 미소 지었다.
‘그래, 이 무공을 질풍신공(疾風神功)이라 하자.’
새 신공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第二章. 마두(魔頭)
평여현 인근에 위치한 어느 한적한 마을의 뒷길.
유난히 눈에 띄는 자가 있었다.
거의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이기도 했으나, 머리는 반백에 가까워 나이는 이미 지천명(知天命)을 넘어 보였는데 그 무엇보다 눈에 띄는 이유는 다름 아닌 키였다.
그 키는 노인네답지 않게 어마어마하여 족히 칠, 팔 척은 되어 보인다.
하나, 그것이 전부다.
무식하게 큰 키를 제외하곤 그저 평생을 촌부(村夫)로 살아 온 듯 평범한 외관을 지닌 그는 홀로 묵묵히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지금의 위험을 아는지 모르는지 열심히 걷고 있는 그를 향해 눈독을 들이고 있던 도적들이 한꺼번에 튀어나왔다.
“멈추어라.”
위풍당당하게 등장한 도적들은 자신들의 말에 멈칫하는 그를 보며 무에 그리 즐거운지 연신 자기들끼리 낄낄대며 웃기 바빴다.
“어이, 할아범. 우리가 한 며칠 굶어서 그러는데 지금 들고 있는 돈 다 내어주면 우리가 얌전히 보내 드릴게.”
“…….”
하나 그런 자신들의 말에 아무런 반응이 없자 이번엔 조금 더 완강히 나온다.
“아, 진짜. 짜증이 나게 구는구만.”
가장 선두에 선 채로 사람 좋게 웃어 보이던 도적 우두머리가 인상을 순식간에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소릴 질렀다.
“이 늙은이가, 나이 들어서 귀가 먹으셨나? 앙? 킬킬. 지금 가지고 있는 돈 다 내놓고 가면 순순히 보내주겠다. 이 말이야! 계속 이렇게 버티면 목숨이 위험해요. 기왕 오래 산 거 앞으로도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할 거 아니야?”
“…….”
이번에도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아니 들은 척도 하지 않아 보인다.
그러자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우두머리가 신호를 취했다.
“이런 씨앙. 진짜 귀머거린가! 왜 대답을 안 하고 지X이세요. 지X이! 얘들아. 무기 들어라!”
스릉.
쌔애액-!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는 자신의 허리춤에 메여있던 검초에서 검을 뽑아 들었고, 이내 그 날카로운 예기를 내뿜으며 날아온 검이 촌부의 목에 닿았다.
아마도 이제 곧 그의 검 날이 촌부의 목을 그으며, 새빨간 핏물이 사방에 튈 것이다.
모두가 죽었구나라고 생각할 그때.
파앙-
쾅-!
“크아악!”
짧고 굵은 외마디 비명이 함께 자신들의 판단이 빗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었다.
육안으론 따라가지도 못하는 속도에 대한 반동이었다.
하나 그것을 지켜본 이들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나가떨어진 이는 검을 든 장본인이었다.
자신의 애검이 촌부의 목에 닿는 촉감이 있었고, 이어 분명 피가 튀며 죽었어야 했다.
한데, 오히려 자신이 멀리까지 튕겨져 나온 것이다.
‘부, 분명 목에 닿았는데?’
다시 일어나 반격을 가하려 했으나, 거기까지였다.
“이…….”
촤아악-!
입을 벌리려던 순간 그의 목이 깔끔하게 날아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몸이 조용히 산 지도 오래되었긴 하지. 끌끌. 저런 어쭙잖은 놈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라니.”
“저, 저 미친놈이 지금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더, 덤벼라! 감히 두목을!”
“으아아아!”
눈앞에서 두목을 잃어버린 그들이 공포에 질려 병장기를 들었지만, 이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촌부의 손이 휘날리는 순간.
주변에 살아 있던 생명의 불씨가 모조리 꺼져나갔다.
서걱-
우드득!
“끄아아악!”
“쿠웨엑-!”
털썩.
“끌끌. 저승길이 외롭지는 않겠구나. 꼴에 제법 괜찮은 부하들을 두었군.”
마두, 광탑귀마(廣塔鬼魔) 귀적삼(歸赤三).
그것이 눈앞에 남은 도적들마저 모조리 휩쓸어버리고 광기에 물들어 버린 그의 진짜 이름이었다.
귀적삼은 본래 광탑귀마란 별호가 붙을 만큼 본질이 흉악하여 무분별한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자, 보다 못해 나선 무당의 검선(劍仙)에게 쫓겨 다니다 끝끝내 살아남아 은거한 이였다.
그렇게 세상을 피해 은거한 지도 어언 이십여 년.
살인을 즐기다 못해 삶의 낙으로 알아 온 그의 성정상, 그 긴 세월이 지겹기도 지겨웠고 피 맛이 그리워졌다. 이쯤 되면 그놈들도 지쳐 추적을 포기했을 거라 믿고 세상에 다시 고개를 내민 것이다.
오랜만에 광기에 어려 날뛴 그의 눈은 시퍼렇게 핏대가 서 그를 더욱 괴기스럽게 만들었다.
더불어 이는 바람에 사방으로 휘날리는 봉두난발의 머리와 옷가지에 묻은 핏방울들은 방금 전의 일들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설마하니, 아무리 끈질긴 개방 거지 놈들이라고 해도 더 이상 쫓아다니진 않겠지.’
자신의 발아래를 그득 적신 붉은 핏자국들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이 얼마 만에 맡아보는 피비린내란 말인가?
‘상쾌하다. 상쾌하구나! 크흐흐흘.’
그는 숨을 크게 한번 들이쉬더니 이내 눈을 번뜩인다.
‘빌어먹을 놈들 같으니. 감히 이 광탑귀마를 몇십 년 동안 썩게 만들어? 내 너희들은 이놈들보다 더 잔혹하게, 더 철저히 자근자근 밟아 줄 것이다.’
으드득-
그의 발아래 그득한 핏자국 사이에 누운 사체들의 모습은 참으로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목이 잘린 건 기본이요. 혀가 뽑혀 입에 피 섞인 게거품을 물고 죽은 자도 있었으며, 양 팔다리가 거의 뜯겨나가다시피 죽은 자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