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황실과의 연줄!
그것은 그 어떠한 것보다 더 막강한 힘이었다. 하여 그토록 많은 이들이 원하던 권력 중의 권력 아니던가?
만일 정말 자신의 눈앞에 있는 자가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자신들을 몰래 묻어버리고도 남을 터다.
울던 아이도 멈추게 한다는 황실 아니던가?
더 이상 희망은 없었다.
유일한 희망이라면 그의 마음을 돌려놓는 것뿐. 여대길은 이내 송운의 다리를 붙잡으며 빌기 시작했다.
“공자님 제, 제발 목숨만은……. 목숨만 살려주신다면……!”
하나, 송운은 그 시커먼 속에 가득 찬 아버지에 대한 음모를 가진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 만큼 선량하진 못했다.
죽이지 않고 딱 기절할 만큼만 때려눕힌 것이 이미 그에겐 마지막 남은 자비였다.
“목숨은 살려 드릴게. 한데……. 우리 아버지가 개만도 못해? 집을 불태워? 오늘 현령(縣令)이 아니라 혈령(血令)이 되게 만들어 주지. 이 개자식아.”
그 말을 끝으로 여대길은 날아오는 송운의 주먹과 발에 살로 가득 둘러싸인 몸뚱이가 불어 터지도록 얻어맞아야 했다.
울고불고 싹싹 빌었으나, 이미 자비란 물 건너간 이야기요,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이라.
손속에 자비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그나마 다행이라 한다면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라 내력을 싣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 * *
늦은 밤.
하늘에 떠 있는 달빛만이 잠든 세상을 밝게 비추고 있을 시각.
환한 달빛이 비추는 그 아래 얼굴이 퉁퉁 불은 채, 머리에서는 핏물을 흘리며 땅을 파고 있는 세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아까 송운에게 두들겨 맞은 세 명이었다.
“거 빨리 빨리 파지 못하겠습니까? 땅 파는 것 기다려줬다간 해가 뜰 참입니다.”
송운이 뒷짐을 진 채, 영 속도를 내지 못함을 나무라며 쳐다보고 있었다.
“끄응…….”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묵묵히 좀 전과 같은 속도로 파 내려가자 한마디 더 덧붙인다.
“해 뜨면 귀찮으니 그냥 제 손으로 죽여 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땅이고 나발이고 힘든 것 그만하고 지금 죽여 드릴까요?”
살기를 풀풀 내뿜으며 말하는 그의 모습은, 달빛에 얼굴이 가려 어두워져 더욱더 음산한 기운을 퍼뜨린다.
이미 전생에서 노강호로 수십 번도 넘게 사람을 죽여 본 송운이다. 물론 그들 모두 무공을 배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약한 이들을 괴롭히고 죽이던 마인들이었다. 하나 이놈들도 결국 사람만 제 손으로 죽이지 않았을 뿐, 같은 족속들이 아니던가?
그것도 모자라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아버지를, 더 나아가 자신의 가족들을 죽이려 했던 이들이다.
봐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본디 이런 자들일수록 아예 두 번 다시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꺾어두어야 한다. 그런 송운의 기세에 다들 기세가 꺾일 대로 꺾여 입도 열지 못한 채 땅을 파는 데에만 열중한다.
파바박-
그 와중에 급작스레 빠르게 땅을 파는 소리가 들려와 조구유과 여대길이 슬쩍 곁눈질로 쳐다보니 그 광경이 가관이었다.
장우량이 그토록 자랑하던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빠르게 땅을 파냈기 때문이다.
짝짝짝-
“제법이네요? 그래. 진작 그렇게 빠르게 파면 서로 좋잖습니까. 당신 것 다 팠으면 저 돼지도 좀 도와서 파세요. 해뜨기 전에. 알겠죠?”
송운이 박수를 치며 씨익 웃자 장우량의 인상이 구겨질 대로 구겨졌으나, 그것도 정말 잠시뿐이었다.
자신들보다 어려도 한참은 어려 보이는 소년의 말에 화가 날 법도 하건만, 반박 따윈 할 수 없었다. 다만 자신을 귀찮게 만든 현령을 향해 욕을 쏟아부었다.
‘현령 이 개자식. 이딴 것도 하나 제대로 파지 못해서 남의 손을 빌려? 젠장!’
하나 그것도 속에서 밖으로 배출되진 못했다.
자신의 뒤에서 무섭도록 노려보고 있는 송운의 섬뜩한 눈길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여 화를 속으로 삭이며 도와줄 뿐.
지금 자신에겐 힘이 없었다.
“고, 고맙소.”
그런 그의 도움에 자존심을 죽이며 감사의 말을 전했으나, 돌아오는 건 욕뿐이었다.
“말할 시간에 입 다물고 땅 파는 데나 집중하시오.”
여대길은 뭐라 더 하고 싶었으나, 입을 닫고 다시 땅을 파기 시작한다.
으득-
‘저 빌어먹을 자식. 불과 몇 시진만 해도 내 앞에서 빌빌 기며 부탁하던 것이! 내 이곳만 나가면 네놈부터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하나, 그것도 이미 과거형이다.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한다면 부질없는 것이다.
장우량의 도움으로 여대길의 땅굴이 다 파지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조구유의 땅굴까지 모두 다 파졌다.
송운은 슬쩍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직은 시커먼 어둠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대강 인초 정도 되었겠군.’
그러곤 이내 다 파진 땅굴들을 슥 훑는다.
“사람 하나는 충분히 들어가겠네. 그쵸? 각자 위치로.”
그의 말을 듣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셋은 하나같이 ‘설마 진짜로?’라는 똑같은 표정으로 송운을 쳐다보았다. 그러곤 그 눈빛들을 읽었는지 말했다.
“진짠데? 난 농 같은 거 안 해요. 뭐해요 들어가지 않고?”
이라며 냉소를 머금는다.
그런 그의 웃음을 본 셋은 마치 지옥을 다스리는 염라대왕(閻羅大王)이라도 본 것처럼 기겁하며 슬쩍 발걸음을 뒤로한다.
“뭣들 해요 정말? 안 들어가면 뭐……. 저기 혈령(血令)님보다 더 맞는 거고.”
그에 현령이 가장 먼저 부어오른 얼굴을 부여잡으며 땅굴 속으로 몸을 던졌고 이어서 조구유도 이어 자신이 파둔 땅굴 속으로 들어갔다.
장우량만이 반항해보려 했으나, 이내 송운의 ‘뭐해?’라는 살벌한 눈길을 받고서야 조심스레 들어간다.
여태껏 느꼈겠지만 반항해봤자, 맞아 죽으면 죽었지, 달라질 건 없다는 빠른 판단 아래였다.
“내가 댁들 하나하나, 다 묻어주는 귀찮은 수고까지 해주는 데 불만 있는 건 아닐 테고. 오히려 이런 내 성의에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는 땅을 파고 모아뒀던 흙들을 발로 팍팍 밀더니 순식간에 그 큰 땅굴들을 메워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 엄청난 속도에 또다시 세 사람은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서, 설마 절정 고수인가? 아니. 아니다. 초고수인가?’
아무리 땅을 파는 것이 더 힘들다곤 하나, 어찌 저리 혼자서 셋이 땅을 팠던 것보다 곱절로 빠르게 묻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뭔가 해볼 틈새도 없이 고개만 빼고 모조리 묻힌 것이다.
멍한 표정으로 고개만 빠끔 내민 세 명은 그제야 자신들의 처지를 깨달았는지 두려움에 몸이 떨려왔다.
실상 떨지도 못할 만큼 꾹꾹 눌러 담긴 상태였지만…….
“내가 누군지 다들 아십니까?”
송운이 묻자 세 명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고개를 힘껏 끄덕인다.
“그래요. 송가네 큰아들 송운입니다. 한데, 내가 성격이 매우 더럽거든요. 소문은 안 났는데, 댁들은 다 알 거라 믿는데. 아닌가요?”
끄덕끄덕.
“한데……. 이게 소문이 나면 어떻게 될까요?”
여태껏 싱글벙글 웃고 있던 송운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그 모습에 세 명의 얼굴은 사색(死色)으로 뒤덮였다.
“역시 시체는 말이 없으니 입막음하려면 시체 세 구 치우는 편이 훨씬 빠르려나?”
“아, 아닙니다!”
그에 여대길이 빠르게 대답했고 연이어 장우량과 조구유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 말뜻은 무엇이겠는가?
살려는 주겠다는 뜻이었다.
굳이 이 자리에서 죽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내가 이런 일을 했다고 떠벌리고 다니고 싶으면 그렇게 하세요. 다만…….”
꿀꺽.
침 삼키는 소리마저도 크게 들릴 만큼 고요해진 그들은 송운의 입이 움직이는 것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사람들은 그 누구도 믿지 않을 겁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대대로 학사 집안의 자제인 제가 댁들을 때려잡았다고요? 그것도 무공을 배운 어른들을 제가요? 과연 믿을까요? 더군다나 황실에 연줄까지 닿아있는 우리 집안이 굳이 몸을 써가며 막으려 했다면 믿을까요? 밝힐 테면 밝혀보세요. 대신 그 뒷감당은 알아서들 하셔야 할 겁니다.”
‘그 상식이 왜 우리에겐 통하지 않는 것이냐!’
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그들은 반박할 수 없었다.
자신들조차 믿지 못하며 그런 말을 하는 자가 있거든 웃음거리로 만들어 안주로 삼아 비꼬아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정말 말 그대로 울며 겨자 먹기인 셈이다.
“정말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송가네 건드릴 생각은 하지도 않는 게 신상에 좋을 겁니다. 다들 오래 부귀영화 누리며 천수(千手)를 누려야 하실 게 아닙니까? 혹여라도 그렇지 않으면 저도 어찌 될지 모르겠거든요.”
‘이, 이걸로 끝인가?’
송운의 신신당부에 마지막이라 생각된 그들은 아까보다 더욱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더불어 같이 잘 삽시다.”
끄덕끄덕.
“그럼 모두 살아서 얼굴 또 보길 바랍니다.”
마지막 말만을 남긴 채 바람처럼 사라진 송운을 멍하니 바라보던 셋은 황당함이 그지없었다.
‘우, 우리는? 여기서 어찌 나가라고?’
* * *
지옥 같던 그 시간이 끝난 것에 안도하는 것도 잠시 사라진 송운을 제외하곤 자신들을 이 땅굴에서 꺼내줄 이가 없다는 것을 뒤늦게 인지한 탓이다.
하나, 절규하기엔 늦었다.
송운은 이미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억울하고 분했다.
어찌하다 잘나가던 자신들이 이리된 것이란 말인가?
공동으로 분노할 대상이 사라지자 남은 셋은 서로를 향해 헐뜯으며 욕하기 시작했다.
그저 지금 당장 분풀이할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누가 송가네 처리하자고 먼저 말을 꺼낸 것이야?”
그중 가장 먼저 욕을 먹은 건 장우량이었다.
“그래, 장우량! 네놈은 자식새끼들이 쥐어 터지고 왔는데 저놈이 저런 고수인 것도 몰랐던 것이야? 이 염병할 놈아!”
“허, 그러는 네놈은? 혼자도 아니고 부하랑 셋이 덤벼서 한 방에 뻗은 놈이 말이 많구나. 쳇!”
계속해서 둘이 말다툼을 하자 그들의 딱 중간에 끼어있던 여대길이 나선다.
“혼자 무공 익혀서 남다르다며 기세 좋게 달려들더니, 일격에 기절한 네놈은? 결국 똑같지 않으냐!”
“닥쳐, 이 돼지 새끼야!”
“닥쳐, 이 돼지 새끼야!”
양측에서 똑같이 고함을 지르는 통에 입을 다물어야 했지만…….
그로 인해 한풀 기세가 꺾인 여대길이 말했다.
“그나저나 이걸 정말 어찌한단 말이냐? 이, 이러다 영영 못 빠져나가는 건…….”
“그런 재수 없는 소리 말고. 그딴 생각 할 시간에 누군가 빨리 발견하기나 빌어라.”
꼬르르륵-
하필 그 순간 들려온 요란한 뱃고동 소리는 그들을 더 좌절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