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두 번 다시는 날 볼 생각 하지 마시게!”
쾅-!
그렇게 문을 박차며 나가버린 송악을 보고 모두가 멍해 있다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여대길이었다.
‘이런 젠장!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야! 도, 돈이 부족했나?’
정신을 차리자마자 바로 성급히 송악을 따라 나간 여대길은 아직 저 멀리 가고 있는 그를 향해 소리쳤다.
“송 대인! 잠, 잠시만 머, 멈추시지요! 헉헉.”
여대길은 말을 끝내면서 숨을 헐떡였다. 그다지 먼 거리는 아니었으나, 가뜩이나 짧은 다리에 육중한 몸을 이끌고 뛰다 보니 적은 거리지만 숨이 차오른 것이다.
그의 성의에 감동이라도 한 것일까?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소릴 내지르던 기세만큼이나마 성큼성큼 나아가던 송악의 발걸음이 잠시 멈추었다.
‘돼, 됐다.’
하나 그에 잠시 안도하기가 무섭게 송악은 아까의 표정 그대로 돌아섰다.
“……그깟 돈으로 사람의 마음을 매수하고, 한자리 꿰차려 한 것이더냐? 그래. 그렇게 해서라도 더 높은 자리가 그리 탐이 나더냐?”
“그, 그것이…….”
“진정한 군자(君子)란 선(善)을 행(行)하여 그 아랫사람을 교화(敎化)하라 하셨다. 군자는 스스로 단정하게 지키고 성인을 높이며, 착한 이를 공경하고 인자(仁者)하고 박애하며 성인(聖人)의 가르침을 감히 훼손하거나 등지지 말지니. 또한! 자왈(子曰), 군자유어의(君子喩於義) 소인 유어이(小人喩於利)라! 이는 군자는 의(義)를 탐하므로 욕(慾)을 버릴 수 있으나, 소인은 이(利)를 탐하므로 욕을 버릴 수 없다 하심이라. 어찌 백성을 돌보기 위해 현령의 자리에 오른 군자가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탐한단 말이냐!”
다짜고짜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말들에 여대길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저게 웬 개소리란 말이야?’
하나,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딱히 반박할 말도 떠오르지 않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다만 속에선 화가 치밀어 오를 뿐.
여대길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쩔쩔매자 송악은 콧방귀를 끼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앞으로는 날 찾지도 찾아오지도 말거라.”
돌아서는 송악을 보며 여대길은 속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며 송악의 뒷모습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이익! 네 이놈, 아무것도 아닌 기껏해야 마을 유지 주제에 아주 현에서 받들어 주다시피 하니 콧대가 하늘을 찌르다 못해 솟는구나. 주제를 모르고 설친 죄. 내 이 수치는 반드시 갚아 주마!’
* * *
쪼르륵-
제법 큰 방안, 차를 따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들이 있었으니…….
한 명은 평여현 장가무관의 관주 첩철권(疊凸拳) 장우량(張圩凉). 다른 한 명은 현 내에서 유명한 흑도 방파의 문주 적사검(赤死劍) 조구유(趙九幽)였다.
두 사람의 밀담(密談)은 점점 깊어만 갔고, 그 이야기의 중심에는 송주촌의 송가가 있었다.
장우량은 순간 조구유의 말에 이마에 내 천자가 그려졌다. 멀지 않은 과거, 자식 놈 두 명이 모두 다 송가네 아들놈에게 죽이 되도록 맞고 왔기 때문이다.
작은놈은 작은놈에게, 큰 놈은 큰 놈에게.
그런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현 내의 유지인 송가네를 쉽사리 건드렸다가는 가문 전체가 욕을 먹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속까지 들여다보면, 대외적으로 자신의 자식들이 잘못한 것도 있었다.
민심은 생각보다 가벼이 여길 것이 아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당시 관아와의 연줄도 짧지 않은 터라, 잘못 건드렸다가는 무관 전체가 끝장날 수도 있는 판국이었다. 하니, 대체 어떤 간 큰 녀석이 박살을 내겠다고 하겠는가?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그런 모든 것이 가미된 상태에 무관 집 자제들이 학사 집 자제들에게 맞고 온 것이니, 쪽까지 팔려 어딜 가서 속 시원히 말도 하지 못하고 속으로 홀로 끙끙 앓은 것이다. 그 후로 열이 뻗쳐 몇 날 며칠을 잠을 자지 못하고 분을 삭였었거늘, 다시 생각하고 보니 이가 갈린 것이리라.
파직-
순간, 장우량의 손에 들려있던 찻잔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로 인해 조각이 손에 상처를 입혀 피가 흘러내렸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아 보였다.
“내 그날 당장 달려가 집안을 뒤집어 엎어버리고 싶었으나! 크흐…… 차마 하지 못했소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에 건너편에 앉아있던 조구유도 그에 심히 동조했다.
“옳은 말이외다.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하오.”
으드득-
그 역시, 먼 과거에 송악에게로부터 피해자였다.
당시 잘 나갔던 흑도방파인 자신들이 마구잡이로 평여현을 설치고 다니자 대체 어찌 알았는지 자신의 앞마당까지 찾아와 훈계를 하였다. 그에 잘나가던 참이라 세상 무서울 게 없었던 그는 욱하는 버릇을 참지 못하고 송악에게 버릇을 고쳐주겠다며 몇 번 주먹질을 날린 것이다.
한데 그날 송악은 그로 인해 몸살로 몸져누웠고, 얼마 뒤 관아에서 현령이 직접 나와 현 내의 흑도방파의 씨를 말리겠다며 나섰다.
관아에서 직접 파병 나온 이상 피해 갈 수 없었고 그 덕에 자신들은 적잖은, 아니 엄청난 피해를 봐야 했다. 흑도방파에서 관리하던 자릿세라던가 등등의 많은 것을 잃었다.
흑도방파에겐 암흑기나 다름없던 시절이었다.
조구유는 그 기억이 끔찍했는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크윽……. 그때 일은 생각하기도 싫소.”
그때의 타격은 지금에도 유지되어 상인들이 아직도 자신들을 만만히 보는 추세였다.
어찌 이를 갈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체 관아에 무슨 연줄이 있기에 전 현령이 그렇게까지 반응했는지는 몰라도, 좋지 않은 기억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여하튼 그들이 송가네와 얽혀서 좋은 일이 생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여 언젠가 손을 보긴 봐야겠는데, 아무리 머릴 굴려보아도 딱히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두고만 볼 수는 없지 않겠소? 늘 조금만 거슬릴 일이 생기면 나서서 귀찮게 굴어버리는 통에 방도 녀석들이 탈주하는 일까지 생겼소이다!”
쾅-!
더는 힘깨나 쓴다는 녀석들이 너도나도 들고 싶어 하던 예전의 흑도방파가 아니었다. 먹고 살기가 힘들어지자, 되레 탈주하는 현상까지 벌어진 것이다.
“그냥 조용히 살수들을 시켜 뒷골목에 묻어버리는 것은 어떻겠소?”
하나, 장우량은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그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나, 그리했다가 혹여나 꼬리라도 잡힌다면? 그쪽이나 우리나 곤란해질 것이오. 그렇지 않아도 흑도방파는 그 기세가 추락할 대로 추락하지 않았소?”
그렇게 둘이 고심하던 도중 조구유의 입가에 추악한 미소가 그득 걸렸다.
“그래서 말이오. 내게 좋은 수가 있소. 이번 현령을 이용하는 건 어떻겠소?”
“그놈이 뭐 어쨌단 말이오?”
“그 말이 무슨 말이겠소이까. 크큭.”
“끄응……. 녀석을 이용해서 송악을 처리하자는 말이오? 하나, 그놈도 결국은 관아 놈 아니오?”
“그놈이 이번에 송악을 대접하다 제대로 된통 당했다고 하오. 한데 그런 상황에서 그를 감싼다? 아니, 아니지. 그럴 리가 없지. 이를 박박 갈고 있거늘 돕긴커녕 우리에게 굽실거리며 고마워할 것이오. 높은 자리에 있으려 하는 놈일수록 그런 수모는 되갚아 주려 하는 법. 더군다나 자신의 손은 더럽히려 하지 않는 법이외다.”
“그, 그렇다면……?”
“바로 그거요. 서로 손을 잡는 것이지. 어제의 적은 오늘의 친구라 하였던가? 크흐흐흐. 그런 녀석이라면 되레 현령이 우리 편이 될 수 있다는 말이오.”
“그렇군. 으흐하하하! 그런 수가 있었어! 내 조만간 날을 잡아서 다리를 놓아보도록 함세.”
그 둘은 그렇게 서로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맞대었다.
밤이 깊어 갈수록, 그들의 음모도 또한 깊어 가고 있었다.
第十二章. 송운의 경고
한바탕 일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온 송악은 돌아와서도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어찌 한 현의 현령이나 되는 자가 그리 추악할 수 있단 말이냐? 자고로 관직에 섰을 때에는 신하로서 군주를 올바르게 세우고, 본인이 가장 낮은 곳에서 머물며 군주를 대신하여 백성을 돌봄이 옳은 것이거늘. 어찌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그런 뒷돈을 쓴단 말이냐. 허어……. 세상이 말세구나. 말세야. 쯔쯧.”
여전히 눈을 부릅 치켜세우며 말하는 아버지를 보며 송운은 씁쓸하게 웃으며 답했다.
“아버지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관모를 쓴 자가 그리 썩어있으니, 어찌 세상이 올바르게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돌아오자마자, 열변을 토해내던 송악의 말은 확실히 틀림이 없었다. 이미 송운 자신도 세상을 살아오면서 그런 부패한 관료들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었다.
또한 세상 곳곳에 그런 것들이 스며들어,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송운 본인도 화가 났다.
분명 아버지의 행동은 옳았다.
뒷돈을 받는다면 떳떳해지지 못함은 물론이오, 똑같은 족속이 되는 것이다.
하나, 그런 놈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송운은 더욱 마음 한편이 찝찝해짐도 사실이다.
‘새 현령이란 놈이 확실히 더러운 자이긴 하다. 하나 그런 놈들일수록 자신이 당한 것은 배로 갚아 주는 습성이 있는 법이지. 그럴수록 방비를 해야 한다. 그렇게 된통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리가 없을 터. 어찌 나올는지…….’
이미 재차 아버지의 말을 통해 상황을 충분히 인지한 송운이다. 조금씩 생기는 이 불안감은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화재 사건도 이 일 때문에 생겼을 수도 있겠어. 시간상으로는 아직 한참 남았으나, 언제고 그런 놈들이 무슨 일을 벌일지는 모르는 법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가만히 있을 수 없겠구나.’
한때 노강호(老江湖)였던 송운의 눈과 머리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찌 나올지는 모르나, 원한을 품고 무엇이든 일을 벌일 것이 뻔히 보이는 상황에 가만히 놔둘 수는 없는 법. 일단 현령이란 놈이 딴생각을 못 하게 기를 확 꺾어두는 것이 중요했다.
‘본디 일이란 닥치기 전에 미리 처리를 해두어야 하는 것이지. 기다릴 필요가 없을 때는 더더욱이. 더는 판치지 못하게 말이야.’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송운은 조금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산책이나 다녀와야겠다며 문지기에서 조용히 기별을 넣고 나왔다.
“조심히 다녀오십쇼. 큰 공자님.”
집 문에서 한참을 떨어져 나온 송운은 주변에 보는 눈이 모두 사라지자 발걸음에 속도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