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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전생-18화 (18/275)

제18화

한데 유가량은 생각 외로 그렇지만도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돈 많고 욕심 많은 늙은이만을 봐왔던 지라 생긴 편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송운이었다.

‘으음, 괜히 미안해지는데…….’

자신이 가진 편견으로 인해 상대방의 진면목을 알아보기도 전에 선입견을 가지고 판단을 내렸으니 미안할 법도 하다.

‘이미 그런 단계는 뛰어넘었다고 생각했거늘. 아직도 먼 게로구나.’

눈앞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행하리라 마음먹었으나, 아직은 그것은 쉽지 않은 길인 듯했다.

어쨌거나, 생각보다 편안하고 세세한 성격을 가진 유가량 덕에 식구들은 모두 즐겁게 대별산 이곳저곳을 구경할 수 있었다.

“오늘 구경은 만족하셨는지요? 워낙 어릴 적부터 산과 함께 자라와 소개를 하느라 저만 혼자 즐거웠던 것은 아니 온 지…….”

“후후. 그런 걱정일랑 하지 않아도 된단다. 우리 모두 아름다운 자연과 가량이 네 소개에 흠뻑 빠져들었으니 말이야.”

“응응! 맞아. 오빠 덕분에 정말 즐거웠어요. 겨울 산이 참 예쁘던걸요?”

예령의 말에 이어 송하가 그 크고 맑은 눈을 빛내며 가량을 쳐다보며 한마디 거들었다.

그제야 가량은 마음이 놓인다는 듯이 환하게 웃었다.

“정말 다행입니다. 날도 추운데 이제 방 안으로 들어가서 몸도 식힐 겸 식사하시는 것이 어떠하실는지요? 맛있는 음식으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자꾸나. 다들 추울 테니.”

第九章. 만년설삼(萬年雪蔘)

어느새 대별산으로 온 지 칠 주야가 흘렀다.

그동안 송운은 유가량과도 많이 친해져 제법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까지 나아갔다.

이는 유가량의 친화력이 한 몫 거들었다. 물론 처음 서먹하던 모습에 비하면 오랜만에 친구를 사귄 송운도 신이 난 것도 있었지만…….

하여, 나른한 오전을 보내던 송운에게 일거리가 들어왔다. 아니, 들어왔기보다야 스스로 자청(自請)한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도착한 첫날에 비해 어쩐지 매우 퀭해 보이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도와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이 힘드신가 보구나.’

하나, 자존심이 강한 송악이 거절할까 조심스레 물어본 그는 그것은 단순히 자신의 기우에 불과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버지. 저…… 제가 일 좀 도와드리는 것은 어떠하실는지요?”

“커험, 험. 힘들지 않겠느냐?”

그의 말에 송악이 헛기침을 크게 하며 힘든 기색을 숨기려 했으나, 눈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자신을 향해 도움의 눈길을 보내온 것이다. 웬만해선 남에게 도움을 잘 받지 않는 송악이었으나, 이번 일은 꽤나 힘든 것이 분명하리라.

“저는 괜찮습니다. 아버지.”

그렇게 도착한 송운은 기겁했다.

서고는 상상 이상이었다.

단순히 서고 정리라고 하여 별것 없을 거라 생각했으나, 이는 오산이다.

‘무슨 놈의 서고가 이리 크단 말이냐?’

유호길은 상인임에도 책을 좋아한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유독 책을 사들여 모으는 것에 취미를 둔 것이다.

그렇게 어릴 적부터 조금씩 사들여 모아 오던 것들이, 쌓이고 쌓여 이제는 포화지경에 이른 상태였다. 학사들처럼 보통의 학문적인 책만이 아닌, 잡다한 철학(哲學)서적들부터 무공서적들까지…….

그 종류는 각양각색(各樣各色)했다.

그렇게 모인 책들을 그는 그 나름대로 정리한다고 분류해놓았으나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은 듯해 보였다.

학사도 아닌 그가 이 많은 책을 정리하는 건 쉽지 않은 일.

하여 송악에게 도움 요청을 한 것이었으나, 송악 역시 만만치 않은 그 양에 혀를 내둘렀다.

그건 송운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애초에 송악보다 훨씬 책을 더 싫어하는 송운이 아니던가? 아버지의 서고도 매우 많다고 생각했거늘, 온갖 잡 서적이 다 섞인 이곳은 흡사 전쟁터와 같았다.

‘왜 아버지께서 그리 다급하게 내 요청을 거부하지 않으셨는지 알 것도 같고……. 허허.’

송악은 서고를 보자마자 굳어버린 송운을 향해 말했다.

“그리 멍하게 서 있는다고 해서 책이 알아서 옮겨지더냐? 우선은 책을 옮기는 것부터 좀 도와다오.”

송악의 말 그대로였다.

저 많은 책은 나누는 것도 나누는 것이지만, 옮기는 것 또한 만만치 않아 보인다. 책 한 권의 무게는 가볍지만, 여러 권이 쌓이면 그 무게는 결코 무시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옮기는 것은 송악보다는 송운이 더 적절해 보였다.

“다른 이들은 따로 안 붙여주신 겁니까?”

“그것이…….”

말하기를 내심 주춤거리는 송악에게 결국 답을 들어낸 송운은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처음엔 책이 꽤나 무거울 것을 예상해 몇 명을 더 붙여주었으나, 홀로 하는 것을 좋아하는 송악이 모두 물린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다운 행동이었다.

‘음……. 유 의숙부님께서 신경을 써주시긴 하셨구나.’

하나 그마저도 쉽게 물러간 것을 보면, 오랜 지기인 만큼 송악의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미리 언질을 해놓아서였을 것이다.

그렇게 두 부자(父子)의 서고 정리가 시작되었다.

한참이 지났을까?

어느덧 중천에 떠 있던 해가 모습을 감추고 차가운 음기를 내뿜는 달이 얼굴을 드러낼 때 즈음.

송악이 드디어 손길을 멈추었다.

“오늘은 이만하자꾸나. 흐흠. 그래도 운이 네가 있으니 진행 속도가 매우 빨라진 것 같구나. ……고맙다.”

마지막 한 마디는 진심이 가득 묻어 나오고 있었다.

‘고맙다’라니!

늘 차가운 달과 같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버지에게서 어쩌면 생전 처음으로 들어 보는 말인 듯했다. 순간 송운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으나, 이내 사실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송운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흘러내린다.

최근 들어 아버지와의 사이가 한층 더 가까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느낌도 들어 기분이 좋았다.

‘많이 부드러워지셨다. 나를 인정하고 계신단 것이겠지.’

전생에서 약 칠십 년이란 생을 살아오면서 그저 다 컸다고,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하나 역시 자식은 아무리 나일 먹어도, 철이 들어도 아버지에겐 아이일 뿐. 아버지는 생각보다 더 단단하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자신을 붙들어 주신다.

자식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정신적 지주임에 변함이 없다. 자식이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늘 믿어주시는 것은 부모다.

그런 생각이 들자 송운은 순간 살짝 울컥하는 마음이 일었으나, 이내 마음을 다잡고 말을 잇는다.

“고맙다니요, 아버지. 그 무슨 당치 않은 말씀이십니까? 아들이 아버지를 돕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늘 그렇게만 제 곁에 있어 주세요. 아버지.’

송운이 차마 못다 한 말은 가슴으로 삼켰다.

그런 아들의 늠름한 말을 듣던 송악의 입가에도 이내 미소가 지어진다.

‘점점 더 성숙해져 가는구나.’

이젠 더 이상 송운은 송악이 알던 그런 어린아이가 아니다. 마냥 떼쓰고 반항하려던 그런 아들이 아닌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어른스러워졌고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이제는 되레 자신을 걱정하고, 이해해줄 수 있는 그런 든든한 자신의 버팀목이 되어간다.

자식은 부모에게 정신적 버팀목이 아니던가?

그렇게 서로를 믿고 감싸주며 살아나가는 것이 가족이 아니던가?

그렇게 두 부자의 정이 깊어질수록 밤도 함께 깊어 가고 있었다.

* * *

대별상가에서의 일이 모두 끝난 마지막 날.

모두가 잠든 새벽 인초(寅初).

스스슥-

새벽 보초를 서고 있던 호위무사가 멍하니 쳐다보며 말했다.

“자네, 방금 무언가 스쳐 지나가지 않았나?”

“으응? 그게 무슨 소린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이 친구 졸았구먼. 그리 피곤하면 내가 혼자 설 터이니 들어가서 좀 쉬게.”

“끙…… 그런가? 알았네. 내 그럼 반 시진만 잠시 눈 좀 붙이고 오겠네.”

바로 그 소리의 정체는 송운이었다.

‘이런, 들킬 뻔했구나.’

그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거처에서 빠져나왔다.

굳이 말하지 않고 나올 필요는 없었으나, 괜스레 사람들에게 보여 누군가를 달고 가게 될 바에야 조용히 홀로 움직이는 것이 더 편했다. 이렇게 나온 이유는 단 하나.

다름 아닌 만년설삼의 채취.

본디 이곳에 온 송운의 취의(趣意)를 이루기 위함이다. 이런 상급 영약을 누군가가 알게 된다면 시끄러워질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게다가 이곳은 상단이니, 큰돈을 주고라도 살려고 할지도 모른다. 하나 애초에 돈 따위가 목적이 아니었다. 하니 조용히 빠져나온 것이다.

‘오늘 새벽, 되도록 동이 트기 전까지 찾아내자.’

자신이 나갔다 온 일은 들키지 않는 편이 나았다. 하여 이곳에 온 첫날, 그는 유가량이 안내하는 내내 열심히 보는 듯했으나 속으로는 모조리 길을 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야만 새벽에 몰래 빠져나와 빠르게 채취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만년설삼은 매우 깊숙하고도 음습한 극한지에 존재한다.

송운은 기억을 되짚어가기 시작했다.

역시나 영약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녀석인지라 찾으러 가는 길은 상당히 험했다. 눈이 잔뜩 쌓인 채로 얼어버린 덕에 가파른 곳을 오르다 미끄러질 뻔한 위기를 몇 번 넘기고서야 산의 고지에 다 다를 수 있었다.

유가량과 함께 다닌 길은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쉽게 터놓은 길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험난한 산의 흉포함을 드러내는 그러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쪽이던가?’

얼핏 보면 다 똑같이 생긴 산속이었기에, 길을 찾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설마 내 기억이 잘못된 건가? 대략 이 부근(附近)이 맞을 텐데…….’

자신이 집을 나온 건 인초.

현재 시각은 어느덧 묘초(卯初)를 향해가고 있었다. 그렇게 송운의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할 무렵, 그의 눈에 무언가 영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부분을 발견했다. 영약이 난 자리는 무언가 신비로운 기가 맴돈다고 했던가?

만년설삼이 묻힌 곳은 처음 보는 것이었으나,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저기다!’

송운은 그곳을 조심스레 파내기 시작했다.

다른 것으로 하다가는 뿌리라도 다칠까 조심스레 손으로 파헤치기 시작했다. 하나 추위로 인해 꽁꽁 얼어버린 탓일까? 쉽사리 땅이 자신의 속살을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 하여 이내 송운은 손으로 내기를 모았다.

‘제법 튼튼해졌는걸.’

그러고 나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파지긴커녕 꿈적도 하지 않았던 땅이 조금씩 속살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한결 수월해진다.

‘좋아, 이대로 마저 파내자.’

한참이 걸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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