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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전생-17화 (17/275)

제17화

마차가 멈추자 가장 먼저 뛰어 내려간 것은 다름 아닌 송하였다. 매일같이 너른 마당에서 자유롭게 뛰어놀고 하던 아이가 오랫동안 마차 안에 갇히듯 왔으니, 답답할 법도 했다.

아무리 신기한 것도 어린아이들에겐 오래 못 가는 법이니.

“으에, 마차 안 너무 힘들어.”

그런 송하를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유호길이었다.

자신들을 향해 짓는 웃음이 중후한 남성의 모습과 참으로 잘 어울리는 사람 좋은 인상. 적당히 벌어진 어깨와 몸채. 딱히 잘생긴 것은 아니나 늘 웃고 다니는 듯 눈매에 진 주름과 제법 멋들어지게 길쭉이 난 수염은 전체적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인상이었다.

지난번 보았던 평 의숙부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역시 상인은 상인인가? 학사보다는 조금 더 건강해 보이나, 무인은 또 아니로구나.’

“호오, 이 작은 꼬마 아가씨는 누구실까?”

“자네, 나와 있었는가?”

그 뒤를 이어 나온 송악이 반갑게 한마디 했다.

“오, 악이! 그래그래. 내 자네가 온다는데 어찌 집에서 한가히 맞이한단 말인가? 자네의 그 얼굴이 빨리 보고 싶어 이리 한달음에 달려 나왔다네.”

“으음. 정녕 내가 보고 싶어서 나온 것인가? 일 처리가 늦어질까 걱정되어 나온 것은 아니고?”

송악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자, 유호길이 능구렁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노련하게 답했다.

마치 이 정도는 익숙하다는 듯.

“거, 자네. 그 눈치는 왜 이리 좋아진 겐지……. 허허. 농담일세. 자자, 들어가세나. 우선은 먼 길을 왔으니 씻고 좀 쉬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봐라. 숙소로 안내해 드리도록 해라.”

“예, 단주님.”

* * *

다음 날 아침.

항상 가득 차려진 휘황찬란한 아침 식사에, 송악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건 송악뿐만이 아니었다.

식탁 위에는 잔칫상에나 올라올 법한 음식들로 가득했다.

“이게 다 무엇인가? 무슨 아침부터…….”

“허허. 많이 먹어야 일도 쉽게 하지 않겠는가? 사실……. 이리 부른 이유는 상단을 운용하는 데 있어 규율체계 정리와 서고 재배치 때문이네.”

유호길은 조용히 마치 기밀을 말하듯 하였으나, 송악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이미 다 알고 왔다는 듯, 한 말투였다.

“뭐, 자네가 날 불렀으면 그런 이유 말고 더 있겠는가?”

그런 송악의 말에 서운함이 담겨있자, 유호길이 손을 휙휙 내저었다.

“아닐세. 이거야 원, 자네만큼 잘하는 이가 있어야지 말이야. 믿을 만한 자도 없고 말이지. 악이 자네가 이쪽에 있어선 최고 아닌가? 물론 공짜는 절대 아닐세. 내 충분히 보수도 챙겨주지 않겠는가?”

“허어, 이 친구 상단을 꾸리더니 능구렁이가 다되었구먼. 알았네, 알았어.”

마지못한 척하면서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에 송운은 피식하며 웃음이 났다.

“자자, 다들 식사합시다.”

“네에!”

활기찬 송하의 대답에 모두가 웃으며 아침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 만찬이 끝나고 송악과 유호길은 서둘러 일을 하자며 자리를 뜨려 했다.

“이거 조카들과 제수씨가 왔는데 이리 급하게 가봐야 하니 참.”

“시끄럽고 어서 앞장서시게. 설마하니, 날 부려 먹으면서 홀로 보낼 생각은 아닐 테지?”

“그럴 리가……. 아, 내 아들을 소개해주고 가려고 그러네. 자네도 알지? 가량(加倆)아. 인사드리거라. 송 의숙부님이시다.”

그의 말에 말끔한 복장을 한, 한 소년이 걸어 나오며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송 의숙부님.”

그에 송악과 예령이 반가운 기색이 돌았다.

“네가 가량이더냐? 많이 컸구나.”

“그러게 말이에요.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구나. 어릴 적 모습 그대로야. 그래, 우리 운이와 또래였던가?”

하나 가량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유호길이 먼저 말을 가로챘다.

“맞네. 올해로 열여섯이지. 아무튼 내 얼굴을 빼닮아서 그런지 꽤나 인물이 반반하지 않은가? 허허!”

“그래. 네놈을 닮지 않아 꽤나 잘 자란 듯하구만. 제수씨를 빼닮았어. 다행이네.”

이미 익숙한 반응이라는 듯이, 송악의 말에 그는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가량아. 네가 오늘부터 이분들 안내를 좀 도와야 할 것 같구나. 알다시피 이 아비가…….”

“예, 아버지. 걱정하지 마시지요.”

처음엔 잘 몰랐는데, 가까이 와서 보니 차분한 음성에 꽤 미장부(美丈夫)답게 생긴 얼굴은 여인들에게 호감을 살 법해 보였다. 또한 살갑게 휘어 내리는 눈매는 편한 느낌을 주어 어쩐지 믿음이 가는 그런 인상이다.

한데, 송운에게 그것보다 더 먼저 관심이 가는 것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이었다.

‘잠깐, 유가량? 유가량이라고? 설마 내가 기억하는 그 유가량이란 말인가?’

그랬다.

전생에서 유가량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상단주가 있었는데 그는 대상인으로 상인들 사이에서, 아니. 전 중원에 유명한 큰 대부(大富)였다. 조금씩 기울어가던 상단을 다시 한번 일으켜 세우고 더 나아가 가장 크던 상단인 황금상가(黃芩商家)를 제치고 제일의 자리에 오르게 만든 이. 그를 모른다고 하면 중원 인이 아니라 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는 충분했다.

그런 이가 아버지의 친구 아들이라니.

그렇다면 이는 큰 기회가 아닌가?

‘지금부터 친해진다면 훗날 큰 도움이 되겠지.’

어쩌면 조금 속 보이는 짓일지 모르나,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인맥은 필히 쌓아두는 것이 좋다. 무공을 높이는 것도, 학문을 쌓아 올라가는 것도 어느 순간에 이르면 한계라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포부(抱負) 좋게 스스로 가족을 지켜 내리라 다짐했으나, 막상 던져진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이 험한 세상에서 단순히 송운 혼자만의 힘으론 역부족일 게 분명했다. 한데 이러한 인맥들이 쌓이고 하다 보면 필히 도움이 될 것이고, 조금 더 수월해질 것이다.

인맥은 또 다른 인맥을 낳는다고 하였던가?

그와 친분을 쌓게 된다면 당금을 보는 것이 아닌, 훗날을 도모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재력(財力)만이 아니라 인맥을 걸쳐 새로운 인맥을 만들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이다. 만일 그가 필요하다면 자신의 무공이나 지식적으로 도움을 줄 수도 있을 터.

하면 서로 상부상조(相扶相助)가 아니겠는가?

송운은 생각지도 못한 아버지의 인맥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생각보다 발이 넓으셨구나!’

생각해 보면 아버지의 인맥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늘 집안에서 글만 읽던 분이라 인맥이 그리 많진 않으나, 하나같이 다 대단한 이들 아니던가?

자신의 약혼녀 가문만 해도 그랬다.

‘잠깐.’

송운은 잠시 멈칫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문득 의문이 생긴 것이다.

‘아버지께 이런 친우들이 있었는데, 전생에 송하는 어찌하여 홀로 그리 쓸쓸히 남겨졌단 말인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 부분이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혹시 무슨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이미 지나온 일이지만 찜찜한 것은 사실이다. 하나 어차피 궁금하다 할지언정 지금 당장 알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집으로 돌아가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그건 후일에 알아보도록 하고……. 우선은 이것이 먼저겠지. 아버지의 인맥과 나의 기억이 이루어지게 된다면 최단 시간에 최고의 인맥을 쌓을 수 있겠어.’

그렇게 송운이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 즈음, 그의 눈앞에 불쑥 손 하나가 내밀어 들어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덧, 송악과 유호길은 떠나고 자신과 동생들, 그리고 어머니와 유가량만 남아있었다.

“반갑습니다. 대별상가(大別商家)의 유가량이라 합니다.”

“아, 예. 송씨 가문의 장남, 송운이라 합니다.”

“운 공자님, 올해로 열여섯 아닙니까?”

“맞습니다만…….”

“저와 같은 나이로군요. 이렇게 된 것 친구 삼는 건 어떻겠습니까?”

자칫하면 처음 만난 사내들끼리의 대화에 서먹해질 법도 하건만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말하는 것이 대화를 부드럽게 이끌어 나간다. 그 모습은 순식간에 사람을 참 좋아 보이게 만들었다.

자신 같았으면 뻣뻣한 나무처럼 굳어 분위기를 매끄럽게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 단순히 인사성만 밝은 것이 아니었다.

붙임성도 꽤나 좋아 보였다.

‘하기야, 이 정도는 되었으니 그리 대부로 성공했을 테지.’

송운도 그런 그의 모습이 싫지만은 않았던 듯 이내 손을 내밀었다.

“아. 그, 그럼……. 잘 부탁하오.”

자고로 상대방이 호의(好意)를 내비치며 웃어주는 데 마다할 필요는 없는 법.

‘친구라…….’

그런 송운이 몹시 어색해하는 걸 알았는지, 이내 유가량이 말했다.

“홍 의숙모님. 가시지요. 대별산 길은 그 누구보다 제가 잘 아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주겠니?”

그런 예령의 조심스러운 말에, 가량이 미소 지었다.

“예.”

* * *

“이곳 대별산은 계절별로 다른 얼굴을 비추는 곳이죠. 비록 중원 최고의 절경으로 꼽히는 곳은 아니나, 봄이면 산정에 만개한 붉은 진달래가 꽃 피워 산을 물들입니다. 정말 그 모습이 어찌나 예쁜지, 봄에 한 번 들르신다면 의숙모님께서도 아이들도 모두 반하실 겁니다.”

“호호, 가량이를 위해서라도 꼭 봄에 방문해야겠구나.”

“그러하신다면, 언제든지 제가 할 일들 모두 제치고 구경시켜드리지요. 하하. 무튼, 여름이 되면 그 붉은 옷을 벗어 던지고 푸르스름한 녹음들이 바위들과 함께 선경을 연출하는데 마치 제 몸속까지 가득 그 산 내음이 들어차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하지요. 가을이 되면 단풍이 다시 한번 산을 색색이 물들이고, 지금 겨울은 보시는 대로 새하얀 구름들과 함께 어울리는 설경을 표현해 냅니다.”

대별산을 돌아다니는 내내 유가량의 모습은 마치 자신의 자식이라도 된다는 마냥 소개하는 팔불출과도 같았다.

신이 나서 쉴 틈 없이 혼자 열심히 떠드는 걸 보면.

‘대부라고 해서 모두 다 쪼잔해 보이고, 고지식한 건 아닌가 보군.’

그냥 적당히 친분 정도만 쌓으려 했다.

대부분 돈 많은 상인들을 보면 성격이 어찌나 골방의 늙은이들 같은지 늘 고리타분하고 딱딱했다.

물론 이윤관계에 놓이면 웃음을 보이며 좋게 보이려 노력하지만…….

그런 관계가 깊어지면 골치 아픈 쪽은 송운일 터.

하여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했다. 일반적으로 장사치는 자신에게 유리한 쪽은 끌어내고, 불리한 면은 밀어내려는 성향이 강하기에 서로 이해관계가 쉽게 성립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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