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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전생-15화 (15/275)

제15화

원시는 정식 시험으로 가기 전 마지막 관문인 만큼 더욱 엄격했다.

그 모든 걸 끝마친 이들은 자신의 자리로 배정받는다.

이는 송운도 피해 갈 수 없는 절차였다.

그렇게 순서대로 절차를 밟은 송운이 배정받은 자리로 옮겼다.

한참이 걸렸을까?

그 많던 인원들이 모두 자리에 앉자 이내 시험관이 앞에 나섰다.

송운도 나름 긴장이 되었는지 손에 땀이 배어 나왔다.

꿀꺽-

‘떨지 말자. 차분히 그동안 배운 만큼 하면 되는 것이다.’

송운은 속으로 숨을 깊게 들이 내쉬며 마음을 다졌다.

“시험을 치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우선 수험생들은 절대로 다른 사람의 답지를 보아선 아니 된다. 들키는 그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퇴장시킬 것이다.”

시험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일순간, 앞에 걸려있던 커다란 징이 널따란 장원에 굉음을 내며 울려 퍼졌다.

데엥-

촤르륵-탁!

그와 동시에 말려있던 두루마기가 펼쳐졌다.

드디어 감추어졌던 시험 문제가 공개됐다.

사서(四書) 논어(論語) 제 일 편 학이(學而) 십 육 장. 子曰(자왈), 不患人之不己知(불환인지불기지) 患不知人也(환부지인야).

“허……!”

“그렇지!”

그 순간 사방팔방에서 다양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허, 조용하지 못하겠느냐! 다들 자신의 답지에 얼굴을 묻고 풀도록!”

그의 말에 잠시 웅성거리던 시험장이 이내 고요해진다.

그리고 스윽스윽 하며 붓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만 들려오기 시작했다.

‘남이 나를 알지 못함을 탓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탓하라…….’

송운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이내 그의 손이 일필휘지(一筆揮之)로 붓을 놀리기 시작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을까?

데엥-

처음 울렸던 것보다는 조금 더 짧게, 징이 울렸다.

“그만! 이제 모두 붓을 놓으시오.”

하나, 그 시간이 조금은 부족했는지 몇 명이 붓을 놓지 못하자 시험관이 말렸다.

“조, 조금만 더…….”

“허어, 이것은 천자님의 은덕(恩德)아래 공평히 치러지는 시험이거늘. 어서 붓을 놓거라!”

그런 이들에 비해 송운은 이미 붓을 놓은 지 오래였다.

빠르게 써 내리고 나니, 시간이 남은 것이다.

‘이번 시험,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어.’

그렇게 시험관들이 답지를 걷어나갔고, 답지를 제출한 송운은 시험장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그의 뒷모습은 참으로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시험장 밖으로 나온 송운은 자신을 반기는 양조광의 모습에 몸에서 기운이 쭉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긴장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고 그리 믿었지만, 내심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고생하셨습니다.”

분명 본인도 꽤나 긴장했을 텐데 잘 보았는지, 어려웠는지 등의 백 마디 말보다야 고생했다는 그 한마디는 송운을 조용히 감싸 안았다.

“밥, 먹으러 갈까?”

* * *

시험은 끝났지만, 바로 떠날 수 없었다.

결과가 나오려면 최소한 칠 주야는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하여 송운과 양조광은 첫날 오자마자 시험 때문에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던 정주 구경에 나섰으나 그마저도 금세 흥미를 잃어버렸다.

성도인 만큼 구경거리는 많았으나, 결국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 아니던가?

조금 다를지언정 다 똑같은 모습에 송운은 남은 기간 동안은 무공 수련에 매진했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보니,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후미진 공터를 찾아낸 것이다. 양조광은 오랜만에 정주에 온 만큼 책들을 찾아본다며 나섰고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이레 후.

정주의 가장 정 중앙, 방문이 붙는 광장.

수많은 이들이 결과를 보기 위해 몰려든 탓에 시험 당일 날보다 더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에잇, 이 빌어먹을 놈의 세상 같으니!”

“부, 붙었다! 붙었어! 어머니 제가 붙었어요!”

수많은 이들의 희비가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정주 원시 최종합격자 명단.

장원(壯元). 송운.

방안(榜眼). 사공건(司空乾).

탐화(探花). 곽문녕(郭文寧).

그 많은 이름들 사이 맨 위에 당당히 걸린 이름 두 자.

바로 송운이었다.

“운 공자님, 축하드립니다.”

“하하. 뭐 이런 걸로 축하를 다…….”

평생 칭찬이라곤 익숙하지 않았던 탓에 어색한 웃음을 흘리는 송운을 향해 양조광은 잠시간 부러운 듯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으나 이내 다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당연히 축하받으실 만한 일이 아닙니까? 스승님께서도 몹시 좋아하실 겁니다.”

이젠 집으로 당당히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그리고 송운도 양조광과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가족들이, 특히 아버지께서 크게 기뻐하시겠구나.’

되레 무덤덤해 보이던 송운의 입가에도 어느덧 흐뭇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서둘러 집으로 달려가 이 소식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졌다.

그 마음을 알아챈 양조광은 더 이상 군말 없이 서둘러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이곳에 머물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송운은 갈 때와는 달리 확연히 가벼워진 마음을 느끼며 설렜다. 어서 빨리 집으로 달려가 가족들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마치 칭찬받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가 된 듯, 벅찼다.

* * *

그렇게 먼 길을 떠났던 송운이 집에 당도했다.

집으로 바로 가겠다는 양조광을 극구 말렸으나, 오늘은 가족들과 편히 쉬라며 자리를 양보해준 것이다.

문지기가 가장 먼저 송운을 반긴 뒤, 안채에 소식을 전했다.

“주인어른! 운 공자님께서 당도하셨습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온 가족이 뛰쳐나왔다.

모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오빠!”

“형님, 다녀오셨습니까?”

쪼르르 달려 나온 송후와 송하, 그리고 예령이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우리 아들! 어디 아프진 않았니?”

“예, 어머니. 심려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반면 말없이 서 있는 송악은, 그저 묵묵히 자신을 지켜보았다.

“심려는 무슨. 걱정 말고 어서 들어오렴. 조광이는 바로 집으로 갔나 보구나. 같이하면 좋았을 것을…….”

오랜만에 돌아온 송운까지 가족들 모두가 둘러싸인 밥상 앞. 아까부터 유독 얼굴이 긴장되어있는 듯해 보이는 송악을 보며 송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그래, 시험은 어찌 되었느냐.”

송악의 한마디에 일순간 가족들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괜히 시험을 치고 돌아온 송운이 부담스러울까 아무도 꺼내지 않았던 말이다.

한데, 송악이 먼저 입에 담았다.

“가가, 우선은 밥부터…….”

예령이 급하게 말리려 하였으나, 송운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어머니. 제가 먼저 말을 꺼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송운의 괜찮다는 말에 모두의 눈이 궁금증이 어린 눈빛으로 그를 향했다. 혹여 부담감을 느낄까 말을 꺼내지 못한 것이지, 궁금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마저 크게 들릴 즈음, 송운의 입에서 드디어 한마디 떼어졌다.

“장원입니다.”

“그래, 장원이……. 뭐라? 장원?!”

해봤자 합격 정도라 여기고 마음의 준비를 나름 했던 송악의 입에선 경악의 소리가 튀어나왔다.

송악뿐만이 아니었다.

예령도 꽤나 놀라는 눈치였다.

그냥 합격도 아니고 장원이다.

이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허허! 장원, 장원이란 말이지!”

순간 송악은 기쁨에 겨워 파안대소(破顔大笑) 하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온 가족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머, 가가. 가가도 그리 웃음 지으실 줄 아시는 분이셨습니까?”

이윽고 나온 예령의 한마디에 송악이 그제야 민망해졌는지 연신 헛기침을 해댄다.

“크, 크흠! 아니오. 그런 것이 아니고…….”

“이런 날에는 그리 좀 티 내셔도 됩니다. 가가. 못 본 척해드리지요. 얘들아 알았지? 호호호.”

“네. 어머니!”

“그럼요, 어머니.”

그 덕에 온 가족이 웃음꽃으로 뒤덮였다.

* * *

며칠이 지난 후.

송악은 마을 주민들과 주변 일가친척들 그리고 양조광을 불러 자그맣게나마 잔치를 벌였다. 늘 글공부를 멀리만 해오던 큰아들의 장원 소식은 더할 나위 없는 잔칫거리였다.

사람들의 숫자만큼이나 여기저기서 끝없이 들어오는 축하 인사에 송운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대부분 어릴 적 이후로 본 적이 없는 분들이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다들 육십여 년 만에 보는 얼굴이니, 일일이 기억해내는 데도 한참 애를 먹은 것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집에 사람으로 북적북적 하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송운도 이에 동조했다.

정말 말 그대로 오랜만에 보는 일가친척들의 모습에 감회가 새로웠다.

‘다들 변한 게 없으시구나.’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축하드립니다. 송 대인!”

“허허. 우리 운이 덕 아니겠소? 고맙소이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형님! 우리 운이가 공부를 싫어해서 그랬던 것이지, 송씨 가문의 핏줄 아닙니까? 결코 머리가 나쁜 게 아니었다니까요. 으하하하!”

“큼. 뭐,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 내 머릴 닮아 머리 하나는 좋다고 하질 않았더냐. 우리 가문에 내린 복덩어리지.”

하나 그중 오늘의 주인공인 송운보다 더 바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송악이었다.

부모의 가장 큰 즐거움은 자식 자랑이라 했던가?

여기저기 들려오는 축하 인사에, 앉아 있을 틈 없이 바빠 보였다.

그 수많은 인파 속에서 유독 아닌 척하면서도 가장 신이 난 듯 보이는 아버지의 모습에 송운은 죄송스러움과 뿌듯함이 동시에 밀려 들어온다. 여태껏 살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모습이다.

‘이제라도 조금씩 효를 행하는 것 같아, 다행이구나.’

전생의 자신은 늘 속만 썩이던 아들이었다.

게다가 집까지 나가버리면서, 부모의 가슴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대못을 박아버리지 않았는가?

하나 이젠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가족을 지키는 일.

그것이 당금의 자신으로 돌아온 이유이리라 생각하고 있는 송운이다.

시끌벅적한 잔치 속에서 그렇게 송운은 또다시 다짐하고, 다짐했다.

第八章. 대별산으로

휘이잉-

송운은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이슬을 맞으며 무공 수련에 매진했다.

거기에 옆에는 추울 법도 하건만 늘 송하와 송후도 함께였다. 이미 매섭게 변한 겨울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면서도 수련을 게을리하는 법이 없다.

원시에 합격한 이후로 송악은 한층 더 부드러워졌고, 무공을 익히는 데에도 더는 관여하지 않았다.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굳건한 믿음이었다. 그런 그에게 동생들과 함께하는 이 시간이 송운에게는 하루 일과 중 가장 즐거운 시간 중 하나가 된 것이다.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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