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그런 모습을 보며 송운은 매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송하 본인은 부족하다 생각했을지언정, 송운이 보기에는 꽤나 완벽한 자세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신이 한번 스쳐지 나가듯 보여주었던 자세들을 한 번에 보고 따라 했을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다.
‘의외로 송하가 무재인 건가?’
줄곧 그는 송하의 성격이 당돌하면서도 여성스러운 면이 많아 무공을 배운다 한들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한데 그런 그의 생각을 산산이 부서뜨려버렸다.
송후보다 운동신경이 훨씬 뛰어났다.
어쩌면 자기 자신이 동생들을 너무 약하게만 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송하다.
보통 일반적인 무가의 아이들은 학사 집안의 아이들이 다섯 살 즈음부터 학문을 익히듯 무공을 익힌다.
삼사 년 정도의 차이는 노력에 의해 좁혀질 수 있다.
송운은 무공 수련에 열중하고 있는 송하의 모습을 보며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허허…….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아신다면 얼마나 놀라실지 상상이 가질 않는구나.’
학사의 가문에 무재를 타고난 딸이라니.
어쩌면 이것도 나쁘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드는 송운이다.
* * *
그렇게 세 남매가 같이 무공 수련을 하며 서로의 우애가 더욱 돈독해져 갈 때 즈음.
원시를 치를 날짜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물론 무공을 가르친다고 그곳에 시간을 조금 더 쓴 것은 있었으나, 지금의 송운은 원시를 치르고도 남을 만한 실력까지 성장해 있었다.
‘음, 아무래도 이번 원시를 치러야 하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오늘 배웠던 책들을 정리하고 있던 양조광이 먼저 말을 꺼내왔다.
“운 공자님. 이번에 원시가 치러지는 것은 알고 계시겠지요?”
“당연하지.”
“그럼 이번 원시를 놓치면 내년 여름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계시겠군요.”
그렇다.
원시까지는 정식 과거 시험이 아니기 때문에 일 년에 한 번 주기적으로 이루어진다. 하나 그 일 년도 무시할 만한 기간이 아닌 건 분명했다.
“역시 이번 원시는 봐야겠지?”
“아무래도 그런 게 좀 더 학사로서 빠르게 나아가지 않겠습니까?”
그 또한 송악의 염원(念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꺼낸 말이었다.
송운의 나이 열여섯.
원시를 보기에는 결코 적지도 많지도 않은 나이다.
일반적으로 동시(童試)를 보는 시기가 열네 살 이전의 소년들을 대상으로 치러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 원생들이 다 합격하는 건 아니었다. 나름의 경쟁률은 존재했고 그로 인해 당연히 계속 합격하지 못하고 머무는 삼, 사십 대의 늦깎이 원생들도 있다.
하니 그동안 학문에 소홀히 해 놀린 시간까지 합산한다면 오히려 빠른 것이었다.
“정말 붙을 수 있을까?”
이 정도라면 충분할 것임을 알면서도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대답을 들어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그의 마음을 읽었는지, 이내 양조광은 송운을 쳐다보며 그의 특유의 편안한 미소로 화답(和答)했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그래, 이번 원시로 보도록 하자.’
한데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의문 아닌 의문이 들었다.
양조광과 자신은 같은 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시험을 치렀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본디 머리가 똑똑한 편이라 이미 시험에 붙었을 실력인데, 어찌하여 아직까지 보지 않았단 말인가?
송운은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떼었다.
“한데 이번 원시. 너도 같이 보러 가는 거지?”
그 말에 양조광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지는 듯했으나, 이내 씁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같이는 갈 테지만 저는 시험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송운은 순간 의아했다.
“같이 가나 시험을 치르지 않겠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사정상 저는 관직에 나아갈 수 없는 몸입니다. 관직에 나아가긴커녕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목이 달아날 테지요.”
그의 씁쓸한 모습을 본 송운은 더 이상 말을 잇지는 않았다. 단 한 번도 양조광이 저런 표정을 짓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저렇게 나오는 것에는 분명 무언가 이유가 있음이리라.
그에게 더 묻는다면 왠지 그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아픔을 건드리게 되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께 여쭙는 것이 더 낫겠구나. 그래도 꽤나 오랫동안 같이 자라온 아이거늘 내 어찌 이리 모른단 말인가……. 참으로 내가 무심했구나.’
송운은 쉽사리 입을 떼지 않는 양조광이 야속해 보이기보단 되레 자신의 무심함을 탓했다.
그날 저녁, 온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식사하는 자리.
송운이 묵묵히 밥을 먹다 말고 입을 열었다.
“아버지.”
“무슨 일이냐.”
여전히 딱딱해 보였으나, 분명 예전보다야 훨씬 부드러워진 음성이었다. 최근 들어 부쩍 아버지와의 관계가 완화되었음을 느끼고 있던 그다.
“이번에 원시를 치르기로 했습니다.”
“……그래. 볼 때가 되었지.”
별 반응은 없는 듯해 보였으나, 그 역시 송악만의 방식이었다.
되레 옆에 있던 예령이 큰 반응을 보였다.
“벌써 날이 그리 되었니? 어쩐지 날이 상당히 덥더구나.”
“예, 어머니. 한 달 뒤에 정주에서 원시가 치러진다 합니다.”
“후후. 벌써 네가 원시를 본다니. 우리 큰아들이 고생이 많아.”
“고생은 무슨요. 아직 멀었습니다. 시험을 치른 것도 아닌걸요.”
“오빠 잘 보고 와야 해!”
밥을 먹다 말고 자신의 말에 쫑긋 귀 기울이던 송하가 재빠르게 응원의 말을 덧붙였다.
그에 질세라 송후도 조심스레 한마디 했다.
“형님. 형님이 아마 장원(壯元)으로 합격하실 거예요.”
온 가족의 응원을 들으니 무언가 없던 힘도 불끈 솟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송운이었다.
‘역시,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언제나 늘 즐겁다.’
식사가 끝나고 송운은 아버지에게 슬쩍 운을 띄웠다.
“아버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 무엇이냐.”
평소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조차 잘하지 않던 아들이 물어오니 송악도 내심 궁금했는지 귀를 기울였다.
“조광이에 관련된 일입니다만…….”
“말해 보거라.”
“조광이가 자신은 관직에 나아갈 수 없는 몸이라 제게 말했습니다.”
“으음……. 그리 말을 하더냐?”
“예. 자신이 모습을 드러내면 도리어 목이 베일 것이라고요.”
송악은 그 얘기에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윽고 말을 이었다.
“서재로 가자꾸나. 가볍게 할 얘기는 아닌 것 같구나.”
그렇게 자리를 옮기고 송악은 차를 내왔다.
“들거라. 향이 좋구나.”
쪼르륵-
청아한 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는 맑은 향은 송운의 머리마저 깨끗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호록.
그 차를 한입 조심스레 마시고는 송악이 입을 뗐다.
“벌써 세월이 많이 흘렀구나.”
* * *
무덥던 여름이 지나가고 어느새 산들이 울긋불긋 물드는 것이, 가을이 다가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어느덧 현생으로 돌아온 지 일 년 하고도 반년이 더 흘렀구나.’
책장에는 꽤나 많은 책이 쌓여 있었다. 송운은 그동안 공부해왔던 책들을 다시 들춰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불현듯 그가 지나온 세월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어린 시절은 지금과 꽤나 많은 것이 달랐다. 엄격하기만 했다고 기억했던 아버지는 생각보다 자식의 일에 미소를 보일 줄 아시는 분이셨다. 아버지와 다시 마주한 매 순간들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자신이 알던 아버지가 맞나 싶을 정도로 마냥 고리타분한 성격이라고 여겼던 아버지는 오히려 모든 면에 대해 열려계셨다.
다방면의 지식과 넓은 포용력(包容力).
그것이 아버지가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며 떠받들어지는 이유 중 하나이리라.
더불어 어머니는 자신을 더 많이 알고 이해하려 노력해주셨고 동생들 또한 자신을 형, 오빠 하며 잘 따라 주고 있다.
‘대체 나는 왜 그런 바보 같은 선택을 했었던 것인지…….’
만약 하늘이 다시 기회를 주지 않았더라면?
굳이 겪어 보지 않아도 뻔했다.
아니 이미 충분히 겪었다. 남은 일생을 후회만 하며 살다 갔을 터다.
그래서 더 열심히 했다.
다시 얻은 기회를, 그 소중한 시간을 아깝게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무공과 학문을 동시에 익힌다는 건 엄청난 심력을 소모했다. 적당히 할 것이었다면 쉬웠을 테지만, 기왕 하는 것 더 빠르게 이뤄내고 싶었다. 그래야 가족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번 원시에 합격한다면, 그다음은 향시.
어린 나이로 향시까지 합격하고 나면, 아버지와 집안의 위신도 어느 정도 다시 설 터.
그리한다면 일차적인 목표로는 성공이다.
송운은 또다시 이를 악물었다.
‘절대, 두 번 잃는 일은 없다.’
지난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가 늘 가슴속으로 새기고 또 되새겼던 말이었다.
그렇게 한 번 더 읊조린 그는 침상에 누워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다녀오겠습니다.”
예령은 정성 들여 싼 도시락을 송운의 손에 넘겼다.
하나 이내 잡은 두 손을 놓지 못하고 한참을 꼭 잡고서야 놓으셨다.
“그리 많은 양은 아니지만, 가는 길에 먹으렴. 끼니 거르지 말고. 알았지?”
그 속에서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고소한 향을 그득 풍기고 있었다.
“예, 걱정 마세요. 어머니. 그리 먼 곳도 아닌걸요.”
기껏해야 걸어가면 왕복 칠 주야 정도 걸리는 거리였으나, 무언가 훨씬 더 먼 길을 떠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왠지 모를 눈물이 울컥할 뻔했다.
하나 이내 송운은 속으로 삼켜냈다.
아버지가 보시면 사내놈이 눈물을 보인다며 뭐라 하실 것이고, 어머니가 보시면 걱정이 되어 밤잠 못 이루실 것이 뻔했다.
자신의 걸음걸이라면 칠 주야 정도 걸릴 거리 따위 사흘로 줄일 수도 있을 터다.
하나 그건 불가해 보였다.
양조광이 함께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빨리 돌아온다 한들 무슨 수로 일찍 왔느냐 물으면 할 말이 없었다.
‘울지 말자. 시험 하나 보러 가는데 그 무슨 추태란 말이냐.’
단순히 가족과 떨어지는 것이 싫었다.
시험 따위 빠르게 보고 돌아오리라.
송운은 그렇게 가족들을 뒤로한 채, 시험이 열리는 성도(省都) 정주(鄭州)로 향했다.
* * *
생각보다 둘이 떠난 길인지라 그리 심심하진 않았다.
양조광은 시험을 치를 수 없었지만, 그래도 같이 가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송운은 얼마 전 아버지에게 들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역모 죄로 몰려 집안 하나가 완전히 풍비박산이 났다고 하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