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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전생-6화 (6/275)

제6화

송악의 말에 어느새 방으로 불려온 송운은 그를 향해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린다. 코앞까지 다가온 그를 보니, 멀리서 보았을 때보다 배로 거대해 보였다.

이에, 인사하는 송운을 한창 쳐다보더니 평목단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한다.

“오, 네가 운이로구나! 악이의 어릴 적 모습을 쏙 빼다 박았어. 으하하.”

그의 웃음 한 번에 주변의 기운이 휘몰아치는 것 같다.

‘황궁에서 무관을 지내고 있다 하더니, 과연 그 기세가 만만치 않으시구나.’

평목단을 본 건 아주 어린 시절뿐이었던지라 송운은 그의 모습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무려 칠십여 년만의 재회였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평목단을 보며 대단하단 생각을 하고 있던 송운은 순간, 그의 뒤에 서 있는 아리따운 소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소녀는 기다랗게 쭉 뻗은 몸매와 어울리는 갸름한 선에 하얀 백옥 빛 얼굴. 콧날은 산맥의 그것처럼 길고 우뚝 솟아 있었고, 입술은 작고 도톰한 것이 자색(紫色)빛이 맴돌았다. 또한 깊은 눈매는 짙은 아미와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었다. 아직은 어린 소녀의 티를 벗지 못하였으나, 그대로 자란다면 꽤나 미인이 될 상이다.

그리고 다른 일반 여인들과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그녀는 허리춤에 기다란 검을 차고 있다는 점이었다.

‘설마…….’

혹여나 하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있었거늘, 그의 궁금증을 시원하게 해결해 주었다.

“아, 내 정신 좀 보게. 이 애가 내 딸일세. 서란(藇爛)아 인사드리거라. 송 의숙부시다.”

그의 말에 조용히 입을 다물고 앉아있던 소녀가 드디어 그 자그맣고 고운 입술을 뗀다.

“안녕하세요. 송 의숙부님.”

서란이라 불린 소녀는 살포시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들려오는 목소리는 마치 은쟁반에 굴러가는 옥구슬과도 같았다. 더없이 맑고, 청아해 보였으나 목소리에는 당당함과 힘이 담겨있었다.

“어머, 이 아가씨가 서란이란 말이에요?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젠 정말 아가씨가 다 되어 못 알아볼 뻔했네요. 호호.”

예령이 그녀를 보며 한마디 했다.

그리고 그 이름에 송운은 고개를 갸웃했다.

‘가만, 많이 들어봤던 이름인데. 서란이라, 서란…….’

송운은 낯익은 소녀의 이름을 되새기더니, 이내 머릿속에 빠르게 무언가 스쳐 지나간다.

‘그래, 어디서 많이 들어봤다 했더니!’

평서란.

먼 훗날, 철혈무후(鐵血武后)라 불리며 구주칠대무신(九州七大武神) 중 하나에 뽑혔던 여인. 나름대로 무공을 익혀 절정고수라 불리던 자신조차도 감히 쳐다보지 못했던 존재였다.

전생에는 약혼녀에 대한 관심은커녕 반발심만 일었던 그였기에, 귀담아듣지 않아 그녀가 자신의 약혼녀인지도 몰랐었다.

하여 단순히 참으로 대단한 여인이란 생각밖에 하지 못하였는데, 그 여인이 자신의 약혼녀였다는 사실에 송운은 적잖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런 여인이 내 약혼녀였단 말인가?’

뭔가 새삼스럽게 감회가 맴돌았다.

그 고운 얼굴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검을 휘두른다 하여 붙여진 별호만큼, 다시 본 그녀는 무척이나 아름다우면서도 시렸다.

송운이 충격에서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이, 부모님들은 따로 얘기할 거리가 있다며 방을 나가버렸다.

* * *

방금 전까지만 해도 왁자지껄하며 여러 사람이 있던 방에서 세 명이 빠져나가고 나니, 이 방이 너무도 크게 느껴졌다.

게다가 여인과 단둘이라니?

적막함으로 그득 둘러싸인 방 안.

눈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난감해하던 송운은 앞에 따라진 애꿎은 차만 연신 들이켰다.

‘말을 걸어야 하나?’

평생을 홀로 살다 보니 접촉해본 여인이라고 해봤자, 객잔에서 음식을 팔거나 저잣거리에서 물건을 파는 여인네들뿐이었다. 그 흔하디흔한 기루(妓樓)에 한 번쯤이라도 몸담아 봤을 법한 사내의 몸이건만, 그래도 어릴 적 학사 가문에서 자라서인지 마뜩잖아 멀리하며 살아왔던 그다.

그런 송운에겐 여인과 단둘이 있는 이 시간은 쥐약과도 같았다. 그렇다고 이렇게 조용히 언제 올지도 모르는 부모님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가만히만 앉아 있는 걸 싫어하는 그에게는 너무도 답답한 일이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송운이 먼저 입을 뗐다.

“흠흠, 거…… 서란이라 하였소?”

다소곳이 앉아있던 서란이 그의 말에 잠시 머뭇머뭇하더니 이내 고개를 주억거린다.

송운은 그에 속으로 혼자서 자신을 질책했다.

‘기껏 꺼낸 첫마디가 서란이라 하였소? 라니…… 허.’

그 나름대로 고심해서 꺼낸 말이었으나, 막상 내뱉고 나니 이리 멋이 없을 수가 없다. 딱히 잘 보이고 싶어서 던진 말은 아니지만 뭔가 멋없는 말은 분명했다.

연애의 연 자도 모르는 그다.

늘 상 쉰내 나는 사내놈들하고만 대화하던 자신의 탓이니, 누굴 원망하랴?

“나, 나는 송운이라하오.”

“이미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서란의 똑 부러진 대답에 또다시 송운의 말문이 막혔다. 여인들이 무슨 화젯거리를 좋아하는지, 또 어떠한 남자를 좋아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으니 막막해짐은 당연했다.

‘여기서 또 무슨 말을 꺼내야 한단 말인가?’

송운은 막막해진 머리를 열심히 굴리던 차였다.

탁.

내내 찻잔만 바라보고 있던 서란이 탁자 위에 찻잔을 올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긴장되십니까?”

“기, 긴장이라니! 사내는 그런 것으로 긴장하지 않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가 귀여워 보인 것일까? 서란의 입가에 살포시 미소가 내려앉았다.

“역시, 그런 것이지요? 제가 잘못 본줄 알았습니다.”

여인에게 긴장한 모습을 들키다니.

송운은 그저 말재주라곤 없는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제 막 지학에 들어섰소만, 서란 낭자는 올해 나이가 어찌 되오?”

“올해 열 넷입니다.”

송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나보다 한 살 어린 셈이로구나. 아니, 근데 내가 왜 그것에 안도하고 있는 게지?’

문득 생각해 보니, 이상하게 자꾸만 그녀에게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신경을 쓰고 자신보다 어린 것에 대해 안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무언가 묘한 듯하면서도 말을 주고받는 이 상황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게다가 무신경해 보이는 듯하나, 은근히 대답은 꼬박꼬박해주는 서란이 왠지 모르게 예뻐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그때였다.

“내 조만간 꼭 다시 시간을 내어 오리다.”

“허허. 그렇게 하시게나. 나야 그리 해준다면 싫어할 것이 무에 있겠는가?”

부모님들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가시는 건가? 이제야 겨우 몇 마디 떼었거늘…….’

막상 시간이 끝나가니 무언가 송운의 가슴에 아쉬움이 잔잔하게 남았다.

“이리 급하게 가게 되어 미안하이. 나도 더 머물고 싶으나…….”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이는 평목단에게 송악이 고개를 내저었다.

“미안해하지 말게. 나야 이런 한적한 마을에서 책이나 읽고 있으나, 자네는 매우 바쁜 몸이 아니던가? 황제의 검이라 불리는 이가 이리 여기까지 발걸음을 한 것으로도 이미 충분히 고맙네. 차라리 다음번에는 여기까지 올 필요 없이 우리가 북경으로 가도록 함세.”

“으하하. 역시 자네는 늘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힘이 있구만. 고맙네. 이리 나를 이해해주어서. 그럼 다음에 또 보도록 함세. 운아, 아버지 말씀 잘 듣고 멋진 사내로 자라야 한다.”

“예, 평 의숙부님. 몸 조심히 올라가십시오.”

그런 송운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연신 껄껄 웃던 평목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수씨도 몸 건강히 계시지요. 서란아, 가자꾸나.”

“호호, 별말씀을요. 몸 조심히 올라가세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처음 인사했을 때처럼 고개를 숙인 그녀는 이내 아버지 평목단을 따라 길을 나섰다.

서서히 돌아서는 서란을 보며, 무언가 한마디 더 건네고 싶었으나 차마 송운은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긴 만남은 아니었으나, 생각보다 남은 여운은 길었다.

‘북경이라…….’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던 송운에게 송악이 말을 건넸다.

“운아.”

“예, 예? 아버지.”

생각에 깊이 빠졌던 송운이 놀라며 답하자 그에 송악이 뭔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네 약혼녀. 그러니까 서란이. 어떠하더냐? 맘에 들더냐?”

송운은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괜찮았습니다.”

* * *

북경으로 향하는 마차 안.

송주촌을 떠난 지 한참의 시간이 흘렀을까? 평목단은 주위가 조용해지자 조심스레 자신 앞에 앉아있던 서란에게 말을 걸었다.

“란아.”

“네, 아버지.”

그에 차창 밖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운이랑 얘기는 좀 해보았느냐?”

“먼저 말을 걸던걸요.”

“그래? 호오.”

평목단은 의외의 반응에 놀란 듯했다.

‘악이의 예상과는 딴판인데? 크하하. 역시 내 딸이 예쁘긴 하지.’

그는 내심 흐뭇한 미소를 짓더니 말을 이었다.

“네가 보기에 운이는 어떻더냐?”

그의 말에 서란이 조용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뭔가 여인의 속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탓일까?

‘긴장한 모습도 제법 귀엽던걸요.’

그녀는 뒷말은 내뱉지 않고 속으로 삼켰다.

어차피 자신의 지아비가 될 남자 아니던가?

조금 천천히 나가는 것 정도야 나쁘지 않을 터다. 얼음장과도 같던 그녀의 얼굴에 조금씩 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第四章. 천의경의 비밀

평가가 다녀간 지 만 하루가 흘렀다.

그럼에도 딱히 크게 변한 건 없는 듯했다.

송운은 따사로운 햇볕이 쏟아지는 나무 아래 편히 누운 채 눈을 감고 살짝 꼰 다리를 까닥이고 있었다.

“이삼 년 후, 정식으로 약혼식을 올릴 것이다. 그리 알고 있거라.”

그게 아버지가 남긴 말의 전부였다.

그렇다면 앞으로 최소 이 년은 자신의 길에 방해가 될 일은 딱히 없다는 셈이다.

‘뭐, 말이 약혼식이지 약혼식을 올린 후 결혼은 순식간에 치러질 듯하지만…….’

어제 자신 앞에 앉아있던 서란을 떠올린 송운의 얼굴에 붉은 기가 돌았다.

“으흠, 흠.”

주변엔 아무도 없었으나, 마치 자신의 생각을 누군가 들은 것만 같은 기분에 송운이 괜히 헛기침을 해댔다.

하나, 어차피 그 일들은 모두 나중 일이다.

후일은 후에 생각해도 충분할 터. 지금은 자신의 무공과 학문에만 심력을 쏟아붓기에도 바빴다.

‘서란 낭자가 그런 대단한 무인이 될 텐데 나라고 맘 편히 놀고 있을 수는 없지. 게다가 난 아직 가족들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지 않은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송운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잠시간이라도 놀리는 시간이 아까웠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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