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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전생-5화 (5/275)

제5화

“야, 약혼녀라니요 아버지?”

“무에 그리 놀라는 것이야? 너도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 네 어미 배 속에 있을 때부터 혼약(婚約)한 처자가 있다고.”

놀라는 송운과는 달리 태연하게 차를 마시며 송악이 대답했다. 지난 생에서는 혼인 따위는 사치라 생각하여 접어둔 채 평생을 홀로 살아온 그다.

아니, 실상 여인에게 숙맥인 점도 한몫했지만…….

어째서인지 송운은 여인 앞에만 서면, 말문이 막히는 편이었다. 하기에 전생에서도, 칠십이 넘는 노인이 될 때까지 여인의 손 한 번 잡기를 어려워했다. 차라리 무공을 익히고, 학문을 배우는 편이 쉬울 정도였다고 할까?

당시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친구들은 이러한 송운의 기묘한 약점을 고쳐주고자 노력했으나, 끝내 송운은 그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무림 생활을 하는 데 있어 강점이기도 했다.

적어도 암살자들이 가장 자주 이용한다는 미인계에 당할 걱정은 없었으니 말이다.

‘허허……. 그럴 만큼 여인과는 거리가 먼 일생(一生)이었거늘.’

어쨌든 아버지가 말하는 것이 거짓이진 않을 터.

자신에게 약혼자가 있었던가?

잠시 숨을 고른 송운이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그래, 맞다. 이제 기억이 나는구나.’

어릴 적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자식들을 데리고 아버지들끼리 술자리에서 도란도란 얘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던 도중 태어날 아이들이 남, 여 한 쌍이라면 이어주리라고 약조를 한 것이다.

하여 그들의 바람대로 송가에는 남아가, 평가(平家)에는 여아가 태어났고 그렇게 그 둘은 약혼으로 맺어진 것이다.

송운은 순간 멍해짐을 느꼈다.

“그 약혼녀가 조만간 우리 집으로 온다고 하는구나. 이곳에서 볼일도 볼 겸 하여 들르는 것이라 하니 너도 알아두어야 할 것 같아서 이리 말하는 것이다.”

송악이 그 뒤로 뭐라 몇 마디 더 하였으나, 송운의 귀에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어릴 적 몇 번 보지도 못했던 지라 얼굴도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왜 가출을 시도하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학사 가문의 자식이 학문이 아니면 무엇을 하며 살 거냐며 화를 내시곤 했지. 게다가 약혼도 결국 강제로 진행하려 하셨고…….’

그런 아버지의 고집에 못 이겨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살리라 마음먹고 집을 뛰쳐나갔던 것이다.

하나 이런 자신의 마음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아버지의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후우…….’

그러나 어쩌겠는가?

자신이 싫다고 하더라도 이미 오래전 가문끼리 정해진 약속이거늘.

그렇게 아버지와의 이야기가 끝난 후, 방으로 돌아가려던 송운을 예령이 불러 세웠다.

“운아 잠시 시간 좀 내줄 수 있겠니?”

다 죽어가는 표정의 아들을 안쓰럽게 쳐다보던 예령이 결국 그를 잡아 세운 것이다.

“만약 네가 정 싫거든 굳이 강요하지는 않는단다. 싫은 결혼을 할 필요는 없어. 누구에게나 자신의 삶을 정할 권리는 있는 법이니 말이야.”

“하오나…….”

난감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예령은 이내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말했다.

“만약 싫은 거라면 이 어미에게 말을 하렴. 네 아버지는 내가 잘 설득해 볼 테니.”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안심시켜주는 어머니의 모습에 괜스레 마음이 찡해왔다.

‘역시 자식의 마음을 알아주는 건 어머니가 최고인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하며 송운이 슬쩍 미소를 띠었다.

그렇게 어머니의 말까지 들은 그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대(大)자로 뻗었다.

머리를 베개에 푹 파묻은 송운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담스러운걸.’

자신은 지금 무공을 되찾기도 바빴다.

게다가 아버지의 바람대로 학문까지 익히고 있다. 둘 중 무엇 하나 쉬운 것이 없는데 거기다 여자랑 연애로 노닥거리며 보낼 시간 따위는 더욱더 없을 것이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생각지도 못했던 일에 당황한 송운은 애꿎은 머리카락만 쥐어뜯었다.

* * *

며칠이 흘렀을까?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고 있을 즈음.

아침 일찍 무공 수련을 마친 후, 책 읽는 것에 지루함을 느끼며 하품을 하고 있던 그의 곁에 누군가가 찾아왔다.

“오빠!”

마치 자신을 놀래키려 했다는 듯 반짝하며 나타난 동생 송하와 그 옆에 쑥스러운 듯 서 있는 송후였다.

그 모습에 송운의 입가에 자연스레 미소가 걸렸다.

‘저리 예쁜 동생들을 놔두고 가출을 시도하다니.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했던 것인지.’

너무도 사랑스러운 동생 둘의 모습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먼저 물밀듯 들어왔다. 이제는 자신이 지켜주어야 할 소중한 존재들이다.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인 게야?”

송운은 말과는 달리 반가운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헤헤, 큰오빠랑 놀고 싶어서 후야 오빠랑 찾아왔어! 오늘은 우리랑 놀아주면 안 돼? 웅?”

해맑게 웃는 송하의 얼굴엔 장난기와 동시에 서운하다는 표정도 곁들여 있었다.

‘하기야, 요즘 매일같이 무공수련과 공부에 매진하느라 동생들과의 시간을 거의 갖질 못하였구나. 서운할 법도 할 터.’

시선을 돌린 송운의 눈에는 송하와 달리 말 한마디도 제대로 걸지 못하고 뒤에서 우물쭈물 하고 있는 송후의 모습도 보였다.

늘 부끄러움과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데 반해, 바깥은 거의 돌아다니지 않는 데다 아직은 어려서인지 하얀 피부와 반짝반짝 빛나는 눈, 반듯한 외모가 그의 총명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어느 가문에 뒤처지지 않을 소공자(小公子)의 모습이다.

하나 그 모습에 문득 장난이 치고 싶어진 것일까?

송운이 송후의 옆으로 다가갔다.

“우리 후는 날이 갈수록 더욱 인물이 나는구나. 이래서야 일찌감치 여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겠는걸?”

“맞아, 맞아.”

그에 질세라 옆에서 맞장구를 치는 송하까지 가세하자 송후는 손을 휙휙 내저으며 잘 익은 사과마냥 얼굴이 시뻘게졌다.

“아, 아닙니다. 형님! 저보다야 형님이 훨씬 더…….”

“하하하. 형이 아우에게 장난 한번 친 것인데, 어찌 그리 정색을 하는 게야?”

“아니, 그것이 정색이 아니라…….”

“꺄르륵.”

쩔쩔매고 있는 송후의 모습을 보니 송하도 어지간히 웃겼나 보다.

참고 있던 웃음보가 끝내 터져 나왔다.

“이런, 내가 우리 아우님을 울려 버리는 게 아닌가 모르겠구나.”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송운은 그저 즐거움이 그득해 보였다.

“괜찮습니다. 저는 그냥 형님이 좋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송후가 자신의 입을 가렸다.

어머니의 말을 빌리자면 남들 앞에서는 똑 부러지며 똑똑한 아이인데, 어릴 적부터 자신의 앞에선 유독 부끄러움을 많이 타던 송후다. 형인 자신을 좋아하고 잘 따르면서도 감정표현이 서투른 아이였다.

‘이런 사소한 것들이 이리 즐거울 줄이야. 이대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지내고 싶구나.’

그렇게 삼 남매의 행복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 * *

제법 조용한 마을에 속하던 송주촌에 구경거리가 생겼는지 저잣거리에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뭉쳐 들려왔다.

지나가던 약초꾼이 궁금하여 그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대체 누구길래 이리 소란스러운 거요?”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네. 그렇지만 마차 겉모습만 보아도 대강 지체 높으신 나리란 건 알 수 있지 않겠는가?”

따그닥- 따그닥-

그들의 시선 끝에는 네 마리의 말이 이끄는 사두마차(四頭馬車)가 위용(偉容)을 뽐내며 마을 한복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마차 앞면의 널찍한 부분에 새겨진 새하얀 백합의 모습은 활짝 피어올라 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나비와 벌들이 내려앉을 듯했다.

가장 선두에서 말을 이끄는 마부의 눈빛에서는 자신이 모시는 가문에 대한 긍지로 가득 차 빛나고 있었다.

무언가 크게 화려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화려하기보단 과묵하고 단단함이 느껴졌다. 하나 그 모습 자체에서 그들이 주목받기엔 충분한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발길이 멈춘 곳은, 사람들의 예상대로 송 대인의 집이었다.

“히이이잉-!”

네 마리의 말들이 앞발을 들며 콧김을 내뿜었다.

“워워, 주인어른! 목적지에 당도했습니다.”

마부가 말들을 진정시키자, 흥분을 순식간에 가라앉혔다. 꽤나 노련한 자인 듯싶었다.

그의 말에 마차의 문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마차에서 내린 사내는 어깨에 백합 문양이 들어간 검푸른 무복을 걸친 채, 칠 척(七尺)은 훌쩍 넘어 보이는 키. 허리춤에 찬 기다란 검과 그 풍채(風采)는 또 얼마나 큰지 거대한 산과도 같았다.

그뿐이랴?

짙고 굵게 난 수염은 그의 인상을 좀 더 사내답게 보이게 만들어 주었고, 이마에 난 오래된 자상(刺傷)의 흉터는 그의 험난한 인생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어서 들어오시지요.”

밖의 부산스러움을 눈치채고 나온 하인이 그들의 방문을 알렸다.

“주인어른. 방금 막 평대인께서 북경에서부터 당도하셨습니다.”

하인의 말에 송악이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그리고 자신의 오랜 지기를 마주하러 마당으로 걸어 나왔다.

“으하하하. 이 얼마 만인가? 악이!”

그런 그의 모습이 반가웠는지 어깨를 한가득 벌리며 송악을 향해 덥석 안아버리자, 그에 비해 덩치가 작은 송악의 모습이 가려졌다.

“커흠, 자네 그 쾌활한 성격은 여전하구만. 이, 이것 좀 놔주시게.”

그에 숨이 막혔는지 조심스레 부탁하자, 그가 이내 팔을 거두었다. 평생을 무장으로 산 그와는 다르게 학사로서 글만 읽어온 송악은 한참 작아 보였다.

이토록 반갑게 맞이한 그들의 정체는 바로 북경에서 가장 유명한 무관(武官) 가문인 평가였다.

청명쾌검(淸名快劍) 평목단(平木段).

현재 평가의 가주이자 황궁의 무관으로, 송악의 가장 오래된 지인이었다. 그리고 송운의 약혼녀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내 이리 자네의 얼굴을 보니 기쁘기 그지없구만. 잘 지냈는가? 제수씨는 여전히 미인이시구려!”

“그래, 나야 늘 지내는 것이 똑같지 않겠는가? 일단 안으로 들어오게나.”

멀리서 온 지인을 이리 밖에 두는 것은 예가 아닐 터. 송악이 그들을 직접 자신의 접견실로 안내했다.

“이곳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구만.”

방 안을 쭈욱 둘러본 평목단이 추억에 잠긴 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비록 접견실 내부는 소소했으나, 곧게 뻗은 그 모양새가 마치 고아한 학사의 기개를 닮은 난초는 그런 방 안을 환히 밝혀주고 있었다. 마치 송악의 성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모습이었다.

“운아, 인사하거라. 평 의숙부시다.”

“안녕하십니까. 평 의숙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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