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송운이 글공부를 시작한 것은 다섯 살부터였다.
그럼에도 지학이 되도록 제대로 된 글의 진전은 없었다. 글공부가 싫다는 그의 고집 때문이었다.
늘 설렁설렁 넘겨버리니 아버지 송악이 혹여 누군가와 경쟁을 한다면 좀 열심히 할까 싶어 삼 주야에 한 번 자신의 제자인 양조광과 둘이서 공부하라 이른 것이다.
그런 양조광은 자신이 아무리 글공부 하기 싫다고 떼쓰며 고집을 부려도 늘 묵묵히 웃으며 함께했다.
글공부를 멀리한다며 아버지께 함고(咸告)할 법도 하건만 그는 같은 나이임에도 형처럼 이것저것 챙겨주었던 아이다. 그 덕분에 억지로라도 듣고 자랐기에, 이 정도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와 생각하니 참 미안하기 그지없구나.’
멋쩍은 웃음을 짓던 송운은 책을 펴고 있던 양조광을 보며 생각했다.
그가 펴 들은 책은 사서(四書)중 논어(論語)였다.
“오늘 공부할 곳은 제 일 편 학이(學而)의 일장(一章)입니다.”
촤락.
책을 편 채 양조광이 먼저 읽어 나가기 시작한다.
“자왈(子曰),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면 불역락호(不亦樂乎)아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이면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아.”
송운은 미소 지었다.
다른 부분은 몰라도 왠지 모르게 저 첫 장만은 또렷하게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배움과 익힘, 이른바 학습을 뜻하여 사람은 배움만으로도 익힘만으로 부족한 것이라 습(習)이 없는 학(學)은 공허한 것이라. 학(學)이 없이 습(習)을 한다면 중심을 잡지 못하여 헤맬 것이며, 벼슬이 없어 자신의 뜻을 펴지는 못하나 이런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친구가 있어 외롭지 아니하다. 하니 관료가 되지 못하더라도 분해하지 않고 의연할 수 있다면 그 또한 군자가 아니겠냐는 말씀이지.”
한 치의 막힘도 없이 뜻을 이어나가자 양조광이 이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늘 복습(復習)을 하자고 하였으나, 정말 복습을 한 적은 거의 없었다. 오늘도 별 기대는 하지 않고 대답이 들려오지 않으면 그제야 자신이 말하려던 참이다.
한데 송운의 입에선 글을 읽듯 술술 풀려나오는 것이 아닌가?
‘역시나.’
송운은 그의 놀라는 모습을 보니 이리 뿌듯할 수가 없었다. 글을 보는 척하면서 양조광의 안면(顔面)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늘 자신 때문에 배로 고생하던 그였으니, 이 정도의 보상은 아무것도 아니리라.
하나 양조광의 놀라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평소 같으면 대강대강 넘길 그런 부분들조차도 열심히 읽고 따라하는 것이 아닌가?
‘스승님이 말씀하시긴 했지만 정말 운 공자님이 마음을 굳게 다지셨나 보구나.’
하루아침에 바뀐 송운의 모습에 그는 내심 뿌듯함에 얼굴에는 은은한 화기(和氣)가 돌았다. 학문을 멀리하려는 것만 제외하면 천성이 나쁜 아이는 아니다.
그런 동문이 나쁘게 변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열심히 한다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송운은 그의 하나뿐인 친구이기도 했다.
‘참으로 잘 되었어.’
그렇게 오전 공부가 끝이 났다.
* * *
송운은 온몸의 기가 다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오전 공부가 끝이 나면 자유 시간이 주어질 줄 알았건만 양조광이 숙제를 남겨주고 간 것이다. 그냥 대충 던져놓고 무공 연마나 할까란 생각을 잠시 했으나 양조광의 모습이 선명히 눈앞에 남았다.
“운 공자님, 내일 내가 올 때까지 제 이 장을 복습하시면 됩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환하게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어찌 잊으랴?
게다가 아버지의 뜻을 따라 학문 공부도 열심히 한다고 자신의 입으로 말했으니 이제 와선 빼도 박도 못하는 것이다. 이제 겨우 마음먹고 잘하기로 해놓고 하루 만에 이리 흐트러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니 조금 한심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 내 이런 큰 기회를 받고도 열심히 하지 않는다면 어찌 하늘을 떳떳이 바라본단 말이냐.’
그렇게 굳게 마음을 다진 송운은 아버지의 서재로 발걸음을 뗐다.
오랜만에 들어와 본 아버지의 서재는 역시나 책장과 그 사이를 메운 책들로 빽빽이 둘러싸여 있었다. 꽤나 오래된 책들까지 섞여 있어서인지, 그 책 특유의 쿰쿰한 곰팡이 내가 그의 코를 찔렀다.
아버지는 늘 그런 책의 냄새가 자신을 평온하게 만들어 준다고 하셨다.
‘역시 아버지는 천생(天生) 학자의 길을 타고나신 듯하구나. 나라면 이런 곳에선 몇 시진만 있어도 답답할 텐데……. 그러고 보면 나도 참 별난 놈이로군.’
생각해 보니 그랬다.
학사 집안에서 태어났으면 책을 좋아할 법도 하건만 그는 유독 책이 싫었다. 글공부가 싫어 집을 뛰쳐나가기까지 했으니, 이미 말 다 한 셈이다.
오히려 세 살 터울인 둘째 송후가 자신보다 더 아는 것이 많다고 생각될 정도로 그는 글을 싫어했다. 그는 새삼 아버지의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럴 때가 아니지.’
이내 마음을 다잡은 그는 의자에 앉아 책을 펼쳐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시진 정도가 지났을까?
그가 하품을 크게 하며 기지개를 켰다.
‘허어…… 오랜만에 앉아만 있으려니 좀이 쑤시는구나.’
송운은 몸이 뻐근해짐을 느꼈다.
아무리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열심히 공부하기로 했다 한들, 좋아하지 않던 공부를 오래 부여잡고 있는 건 그에겐 쥐약과도 같은 일이었다. 게다가 오십 년이 넘도록 몸을 수없이 움직이며 살아온 그로서는 한 곳에 메여 갇혀 있다시피 하는 건 답답하기 그지없는 일이기도 했다.
‘잠깐 서서 몸이라도 풀어볼까.’
송운은 지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하던 중 머리에 스치듯 지나가는 하나의 방법이 떠올랐다.
생각보다 널찍한 서재에 빽빽이 들어선 책장들.
그 사이를 간단한 보법으로 왔다 갔다 한다면 수련 효과로 제법 괜찮을 법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 굳이 책도 앉아서만 보란 법은 없지 않은가? 걸어 다니면서 본다 한들 누가 뭐라 하는 것도 아닐 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보법으로 사이사이를 오가기 시작했다. 만약 그걸 송악이 보았다면 어디 학사가 책을 걸으며 읽느냐며 기겁했을 일일지도 모르나 지금은 자신 혼자가 아니던가.
한참을 거닐었을까?
보법이 제법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효과가 좋은데?’
송운은 생각지 못한 뛰어난 효과에 놀랐다.
잘하면 이대로 얼마 안 되어 예전의 무위를 되찾을 수 있을 거란 생각까지 들었다. 그에 기분이 좋아진 송운은 잠시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서재에 꽂힌 책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서재의 맨 끝 편까지 왔을까?
송운의 눈에 매우 익숙한 책 표지 한 권이 들어왔다.
제법 오래된 책들이 많음에도 꽤나 보관상태가 좋아 깔끔한 책들 사이에 너덜너덜한 겉표지는 유달리 그의 눈에 쏙 들어오는 것이 왠지 심상치가 않아 보인 그는 그 책을 쏙 빼 들었다.
천의경
‘설마, 같은 이름의 책일 뿐이겠지.’
다른 책들과는 달리 꽤나 오래 처박혀 있었는지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는 터라, 조심스레 쓸어낸 후 책을 펼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쳐다보았으나, 이내 책 표지(表紙)를 펼쳐 든 그는 눈이 커다래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세세히 펼쳐 읽어보고 또 보아도, 눈을 감았다 떠보아도 내용은 그대로였다. 외울 정도로 달달 읽어댔던 책이다. 자신의 기억이 잘 못 되지 않은 이상 그 천의경이 아닐 수 없다.
분명 자신이 기억하던 그 천의경이었다.
‘뭐, 뭐지? 이 책이 어째서 아버지의 서재에 꽂혀 있단 말인가?’
송운은 믿을 수 없는 그 모습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第三章. 약혼녀
‘천의경이라니.’
송운은 멍한 상태로 계속하니 책을 들여다보았다.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분명 자신이 회귀하기 전 광서성의 어느 한 책방에서 우연히 찾았던 그 책이 분명했다. 한데 이 책이 어찌하여 아버지의 서재에 꽂혀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방도가 없었다.
책의 표지도 내용도 어느 것 하나 다를 게 없이 똑같았다. 만약 이 책이 본디 아버지 서재에 꽂혀 있던 것이라면 자신의 손에 들어오기도 전에 이미 불타 없어졌어야 맞는 것이다.
송운은 그야말로 혼돈에 빠졌다.
하나 이내 정신을 차린 그는 좋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저러면 어찌하고 이러면 어찌한가. 어쨌든 다시 손에 들어왔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았으나, 회귀를 한 뒤에도 이상하게 집착이 가서 마음속에 아쉬운 감이 없잖아 있었다. 하나 찾을 방도도 없어 포기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의 손에 다시 들어온 것이다. 그냥 자연스레 받아들이기로 한 그는 다시 천의경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다시 읽어봐도 역시 참으로 신비한 책이로다.’
회귀 전에도 그 문장 하나하나가 자신의 마음속에 속속들이 와 박혔었다. 그 덕에 용기를 내어 자신의 고향에 찾아가질 않았던가?
그리고 그건 다시 읽는 지금도 똑같았다.
턱.
송운이 책을 조심스럽게 닫았다.
왠지 인연의 끈이 맞닿아 있는 것만 같은 책이었다. 곁에 두고 공부하면 무언가 도움이 될 것이라 여긴 그는 이내 남은 먼지도 깔끔히 털어낸 후 자신의 품속에 넣었다.
‘어쩌면 제목처럼 정말 하늘의 뜻일지도 모르겠구나.’
오늘 더 이상의 공부는 무리라고 판단한 그는 천의경을 품에 안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또 하루가 흘러가고 있었다.
다음날 신초(申初).
오후의 햇살 아래, 땀을 흘리며 무공을 단련하던 송운에게 시녀가 다가왔다. 하나 무공에 집중하고 있는 듯 보이자 선뜻 말을 걸지 못했다.
그에 먼저 기척을 느낀 것은 송운이었다.
“무슨 일이냐.”
“지금 바로 집무실로 오시라는 주인어르신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송악으로부터의 호출이었다.
‘무슨 일로 이리 급하게 찾으시는 게지?’
의아한 생각을 갖으면서 빠르게 발걸음을 놀린 그는 서둘러 목욕을 마치고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렇게 향한 길, 송운은 도착하자마자 충격적인 발언을 들어야 했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공부는 잘되어 가느냐?”
송악은 대뜸 묻는 공부 얘기에 고개를 묵묵히 끄덕였다.
“네가 올해로 나이가 어찌 되었지?”
“열다섯입니다.”
“음……. 그래. 이제 슬슬 장가를 갈 나이가 되어가는구나.”
그에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송운의 표정에 당황이 어렸다.
‘잠시만, 장가. 장가라니?’
“오늘 내 너를 이리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약혼녀 때문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