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전생-3화 (3/275)

제3화

第二章. 돌아온 천의경

그렇게 화목한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송운은 자신의 방을 찬찬히 다시 둘러보기 시작했다.

일어나자마자 송하의 손에 이끌려 나가는 바람에 자세하게 볼 틈조차 없었기 때문이리라.

‘변한 것이 하나도 없구나.’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모든 것이 원상태로 돌아온 것이니 말이다.

송운은 자신의 책상을 손으로 한번 쓰윽 훑었다. 자신이 쓰던 먹과 붓, 책상마저도 단 한 치의 변화도 없이 그대로였다. 그리 화려하지는 못해도 집의 아늑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분위기를 풍겨내고 있었다.

송운은 자연스레 어릴 적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다시 돌아왔어. 이곳으로…….’

그가 그렇게도 바랐던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한참 동안 회상(回想)을 마친 그가 의자에 앉았다.

이제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만이 남았다. 더 이상 가족을 허망하게 잃지 않기 위해서는 이전 생의 기억을 되살려 자신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것이 필요했다. 이대로 손을 놓고 기다린다면 결국 결과는 똑같을 것이 뻔할 터.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화마(火魔)일 듯한데…….’

그의 왼손이 자연스레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고심에 빠졌을 때 튀어나오는 그의 오래된 버릇 중 하나였다.

송운은 순간 막막해질 수밖에 없었다.

화재가 언제 일어나는지, 누구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사고였는지를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아는 건 자신이 집을 나간 후 칠 년 후쯤이라는 것, 그것뿐이었다.

어차피 지나간 일이라 생각했고, 더 이상 송하의 아픔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기에 더 묻지 못한 탓이리라.

‘이럴 줄 알았다면 송하에게 더 자세히 물어둘 걸 그랬나.’

송운은 막심한 후회가 들었으나, 이미 후회하기엔 너무 늦었다. 대강 언제쯤이라는 것은 알고 있으니, 대비를 단단히 하면 될 터.

거기까지 생각이 든 송운은 마음을 굳혔다.

‘우선 무공부터 되찾아야겠다.’

다음날 새벽, 인정(寅正).

번쩍.

일찌감치 눈을 뜬 그는 몸을 정갈히 한 후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어찌 되었건 자신은 무인이 아니던가? 하루라도 무공수련을 게을리했다가는 몸에 좀이 쑤실 것이 뻔했다. 게다가 지금은 힘을 기르는 것이 최우선이니, 걸러서 좋을 건 없었다.

그렇게 밖으로 나온 그는 가장 먼저 몸을 가볍게 풀었다. 자신이 집을 나와 처음 무공을 수련할 때 당시에도 기초를 몸에 익히는 데만도 제법 시간이 많이 걸렸었다. 태어나서 몸을 쓰는 일이라곤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육체였기 때문이다.

지금이라고 다를 게 없었다.

아니, 다만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그의 머릿속에 각인된 무공의 기억 정도랄까? 예전엔 스승 없이 홀로 책을 봐가며 익힌 무공이었으나, 이제는 그 모든 것이 자신의 머릿속에 있으니 훨씬 빠를 터.

게다가 나이도 이 년 정도 더 당겨졌으니, 몸에 흡수되는 속도도 더 빠를 것이다.

‘우선 심법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 생각을 마친 송운은 우선 가부좌(跏趺坐) 자세를 취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기운이 차오르는 이른 새벽은 심법을 연마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여건이다. 게다가 마을의 이름답게 소나무가 많아 공기도 썩 나쁘지 않은 곳이 바로 이곳 송주촌이었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고향의 향취는 그를 더더욱 기분 좋게 만들어 주었다.

‘역시 소주천(小周天)을 한번 돌리고 나니 몸이 상쾌해지는구나.’

어린 소년의 몸인지라 그리 많은 탁기(濁氣)를 가지고 있진 않았으나, 탁기가 빠지고 맑은 청기(靑氣)가 들어오자 상쾌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이 상태라면 전생의 내력을 회복하는 데도 오래 걸리지 않을 터였다.

‘더 열심히 수련한다면……!’

이른 나이에 시작한 만큼, 오히려 전생 때보다 더 많은 내력을 갖추게 될지도 모른다.

그가 익힌 무공은 기본적으로 내공 소모가 막심하여, 강한 내력을 갖출수록 더 큰 힘을 낼 수 있게 되니, 분명 좋은 성과라 말할 수 있었다.

‘힘없는 정의(正義)는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송운이 겪은 세상이란 분명 그러한 곳이었다. 말과 붓으로만 적과 싸워 이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나 그 역시 제 몸 하나 지킬 수 있을 때나 가능한 말이었다.

그랬기에 전생에선 더더욱 무공을 미친 듯이 파고들었던 것도 있었다.

가족 없이 홀로 일어설 방법은 그뿐이었으니……. 그 덕에 그 많은 무인들 사이에서 질풍철각이라는 별호까지 얻으며, 이름을 날릴 수 있었지 않은가? 딱히 이렇다 할 문파가 없던 광서성에서 그는 무인으로서 최고의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비록 초절정의 벽을 깨진 못하였으나, 그는 무기가 아닌 맨몸으로 승부를 본 강자였다.

‘오늘부턴 무공 연마도 쉬지 말자.’

마음을 다잡은 송운은 곧바로 마보 자세를 취했다.

각법의 기초는 역시 하체다.

전생에서야 단단히 단련된 몸이었으나, 작금 아직 어린 현생의 육체는 이 당시까지만 하여도 책상에 앉아 글만 보던 학사에 불과했다.

무공을 익히기 전, 기본적인 체력과 몸을 만들어 주는 것이 우선이었다.

하나 마음만 앞선 탓일까?

채 반 시진이 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나가떨어졌다.

“허억, 허억.”

당연한 결과였다.

아직 이 몸은 평생 앉아서 글공부에만 치중했었지 않은가? 당연히 자신이 전생에 했던 수련법을 처음부터 따라와 주는 것은 불가(不可)하리라.

‘역시 아직 이 몸의 한계인 것인가?’

숨이 차서 숨 쉬는 것조차도 벅찬 그였지만, 이 역시 열심히 수련하다 보면 금방 늘 것이다. 지금 되지 않는다고 해서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이미 전생에 겪어보았지 않은가? 그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조급함을 지워버렸다.

그러곤 또다시 심법을 운용했고, 숨이 제법 고르게 되자 이번에는 달리기에 나섰다.

심폐력(心肺力)을 늘리는 데는 이만한 수련법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반 시진 정도를 더 뛰던 그는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씻으러 가려는 길이었다.

한데 지나가는 동안 몇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 시간에 웬 사람이지?’

아무래도 집안에서 일을 하는 자들 같았다. 그렇다면 자신이 무공을 연마한다는 사실은 삽시간에 퍼질 것은 뻔했다.

‘음,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는 건 시간 문제겠구나.’

하나 이내 그는 신경을 끄기로 마음먹었다.

애초부터 자신이 무공 연마하는 것을 숨길 생각이었다면 이렇게 대놓고 하지도 않았을 터.

지금 자신이 숨긴다고 해도 언젠간 들통 날 일이다. 어차피 부딪혀야 할 일이라면,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고 부딪치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렇게 마음먹은 송운은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 * *

송운은 깨끗이 몸을 씻고 개운한 마음으로 식탁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들어맞았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송운이 생각했던 것처럼 불호령이 떨어지지도 않았다.

“운아, 네가 오늘 아침에 앞으로 글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약속하였지?”

“예, 그랬지요.”

이미 아버지의 반응을 짐작하고 있던 송운은 담담하게 음성을 흘렸다.

“그런데 조금 전 강 씨가 내게 와서 네가 기합을 지르고, 몸을 단련하고 있다는 소리를 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느냐?”

강 씨는 송운이 어렸을 때부터 그의 집에서 일해 온 식구 중 한 명이었다.

“그것이…… 학문을 더 열심히 익히기 위해서라도, 체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더불어 공자께서도 말씀하시길 예(禮), 악(樂), 사(射), 어(敔), 서(書), 수(數)라 하여 육예(六藝)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악은 음악이요, 사는 궁술(弓術), 어는 마술(馬術)이고 서는 서도(書道) 수는 수학(數學) 일지니. 이를 모두 갖춘 사람을 현자라 하였지요.”

송운의 조심스러운 말에, 송악은 무언가 고민이 되는 듯 미간에 내 천(川)자가 깊게 파였다.

송악은 자타가 공인하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학사 집안의 주인이다.

무를 천시하는 것은 아니나, 장남인 송운이 자신의 뒤를 이어 학문의 길을 걸었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여태껏 그의 속을 무던히 썩이던 큰아들이 드디어 학문에 관심을 가진 것 같았는데, 몸을 단련하고 있었다고 하니 걱정스런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나, 여기서 괜히 송운을 다그쳤다가 혹 이제 막 마음을 다잡은 자식이 엇나가기라도 하면 어찌하나 고민이 되었다.

잠시 동안의 고민 끝에 송악은 송운의 생각을 존중해 주기로 결정했다.

“네 뜻은 잘 알겠다. 하나 엄연히 주(主)가 되고 부(副)가 되어야 할 것이 있는 것이다. 네가 아침에 약속한 것도 있으니, 몸을 단련하는 것에 빠져 학문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리라 믿으마.”

만약 오늘 아침에 송운이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았거나, 방금 전처럼 공자께서 하신 말씀을 예로 들지 않았다면 송악도 이렇게 쉽게 넘어가진 않았을 터였다.

송악은 큰아들이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자신의 뜻을 주장하는, 얼마 전까지는 상상도 못 한 아들의 모습에 아들이 진정 학문에 뜻을 두었다 여기고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기로 마음을 정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걱정 마세요.”

송운은 그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훗날이면 모를까 아직은 학문에 더 치중하길 바라시는 것이리라.

‘이 정도만 수용해 주셔도 충분하지.’

오히려 이 정도에서 마무리 지은 것을 다행으로 여길 정도였다.

그렇게 아침 식사가 끝난 후 방으로 돌아간 송운은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글공부를 하겠다고 하였으니 분명 공부를 하긴 해야 한다.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할까…….’

하나 그의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똑똑-

“누구십니까?”

“운 공자님, 저 양조광(梁朝光)입니다.”

‘양조광? 양조광이 누구…….’

짝!

송운이 양 손뼉을 맞부딪혔다.

그의 이름을 듣고 나니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들어오세요.”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약간 평범한 얼굴형에 잘생긴 외모는 아니었으나, 꽤나 호감이 가게 생긴 소년이었다. 눈매가 아래로 약간 처진 덕에 더욱 편한 인상을 풍기는 자.

바로 아버지의 제자이자 자신과 함께 동문수학(同門受學)하는 이였다. 어느 순간부터 평소에는 아버지와 함께하지만 삼 주야에 한 번은 이렇게 단둘만이 공부를 해온 것이다.

“오랜만…… 아니 왔어?”

송운은 순간 반가운 마음에 오랜만이라는 말을 내뱉을 뻔했다. 그에게는 자그마치 오십삼 년만의 재회가 아니던가?

하나 매일 보는 얼굴인 그에게는 오랜만이란 말은 과할 터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이내 미소를 띠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운 공자님.”

‘그래, 늘 이런 아이였지. 차분하고 나와는 정반대였던…….’

그는 새삼 추억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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