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전생-2화 (2/275)

제2화

第一章. 다행이다

“오빠, 오빠아.”

“으음…….”

“얼른 눈 좀 떠보아.”

그는 얼른 눈을 떠보라는 송하의 말에 천천히 눈을 떴다.

‘내가 글을 읽다 잠이 들었나 보구나. 나일 먹으니 언제 잠든 지도 모르고 잤어.’

그리고 그의 눈이 완전히 떠지는 순간.

송운은 깜짝 놀랐다.

어린 시절의 송하의 모습이 눈앞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얼굴도 멀쩡했다.

어제도 스쳐 지나가듯 본 어린 시절의 환상.

송운은 자신이 그때가 얼마나 그리웠으면 이런 환상을 다 볼까란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또다시 가슴 한편이 저미어왔다.

한데 몸을 일으켜 세운 그는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주변을 둘러보니 자신이 잠들었던 그 허름한 집이 아니었다.

고갤 들어 본 자신의 머리 위에 놓인 선반에는 책이 그득했고, 옆으로 트인 창문에서는 따사로운 햇살이 비쳐 포근하게 자신을 안아주고 있었다.

하나 그렇다고 낯설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익숙했고 포근했다.

‘크윽……!’

무언가 머리를 찌릿하고 울려 퍼지면서 아파오자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이 있는 곳이 어린 시절 자신의 집 모습이라는 것을 떠올랐다.

‘이, 이게 대체 무엇이지?’

송운이 놀라며 생각하고 있을 때 송하가 장난치듯 자신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오빠, 밥 먹을 시간이래두.”

송운은 조금 멍한 눈빛으로 송하의 손길에 이끌리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게 정말 무슨 일이란 말인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고 일어났더니 갑작스럽게 어린 송하가 눈앞에 있고, 주변 풍경은 어린 시절 그의 집이다. 가족들이 모두 머물던 집인 것이다.

그의 머릿속이 복잡해지며 빠르게 돌아갔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나?’

하나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생생했다.

송하의 손길이 닿는 촉감도, 문을 열고 나서서 보이는 풍경도 어느 하나 빠질 것 없이 너무나 현실적이다.

‘만약 이게 꿈이라면…… 제발 깨지 말아다오.’

의문도 잠시뿐.

활짝 웃고 있는, 어린 시절의 밝은 송하를 보자 저도 모르게 가슴 한편이 따듯해져 왔다. 이런 예쁜 여동생이었다. 세월이 흐른다 한들 얼굴 한편에 어딘지 모를 그늘이 질 것 같지 않은 밝은 아이였었다.

‘그래, 송하는 이런 아이였지…….’

감격에 빠져 걸음을 옮기다 보니 꽤나 넓었던 집의 풍경이 속속들이 떠올랐다.

‘이 길을 따라가면…….’

가족들이 매일 함께 밥을 먹던 넓은 방이 나온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억 속의 그곳에 도착한 송하의 손이 큰 문의 문고리를 잡았다.

끼익-

자신의 키보다 훨씬 큰 거대한 문이 거친 소리를 내며 열리는 순간이었다. 저 문 너머로 따뜻하면서도 환한 빛이 그의 시야(視野)를 가렸다.

마침내 그 빛이 사라지고 눈앞이 보이는 순간.

‘아……!’

송운은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꿈에서만 보았던 가족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던 것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들을 한 상 가득 내려놓으시던 어머니가 가장 먼저 자신을 웃으며 반겨주셨다.

“이제 나오는 거니? 하야가 오빠를 데리러 갔구나. 호호.”

방안 그득히 찬 맛있는 음식 냄새가 그의 후각을 자극했다.

그 옆에는 여전히 서책을 펼쳐두고 읽고 계시는 아버지 송악(松岳)과 자신의 둘째 동생인 송후(松逅)의 모습도 보였다.

평생을 학사의 길만 고집하신 아버지는 여전히 고고한 학과도 같았고, 여전히 후는 부끄러움 많은 어린 소년의 모습이었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이 집을 나가기 전, 그대로였다.

‘아아, 아버지 어머니……. 후야……!’

송운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좀 늦게 일어났구나. 혹 몸이 어디 아프기라도 한 게냐? 학문을 익히더라도 몸이 상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항상 명심하거라.”

어린 시절엔 아버지의 이런 따뜻한 말도 간섭이라고 여겼다.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작금 이렇게 자신을 걱정해 주는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나도 기뻤다.

그토록 사무치게 그립던 가족의 품.

그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볼을 세게 꼬집어보았다.

‘아얏!’

일부러 세게 꼬집어본 것인데, 그 감촉은 너무도 생생했다. 눈물까지 찔끔 나왔다.

‘아프다. 아파. 정말…… 꿈이 아닌 것인가? 정녕 이것이 현실이란 말인가?’

꿈이라 하기엔 너무도 아팠고 현실이라고 하기엔 지금 이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들이었다.

‘이는 하늘이 나를 불쌍히 여기어 주는 기회인가? 아니면 나를 농락하려 드는 실낱같은 허망한 꿈인가?’

아니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는 한편으로 생각했다.

제발 지금 이 상황이 꿈이 아니기를.

가족들을 한 명 한 명 쳐다보며 멍하니 서 있는 그를 보며 어머니 홍예령(洪睿伶)이 송악을 놀리듯 말하며 웃었다.

“어서 앉으렴. 밥 먹어야지. 네 아버지도 널 걱정하고 계시잖니. 호호.”

그런 예령의 말에 송악이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부인, 난 그저 요즘 운이가 힘들어하는 것 같아 그런 것이오. 운이 너도 얼른 앉아라, 가족들이 모두 기다리고 있지 않으냐?”

“아, 예. 아버지. 앉겠습니다.”

여러 가지 심경(心境)이 뒤섞인 표정으로 자리에 앉은 그는 어머니가 퍼주신 밥을 쳐다보았다.

그러곤 한 숟갈 가득 퍼낸 밥을 자신의 입으로 향했다.

입에 고인 밥의 따스한 온기가 온몸에 돌고 돌아 자신의 마음까지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착각이 일었다. 뜨거움이 입안을 데울 것 같았으나 그것마저 마냥 좋았다.

이번엔 진짜 어머니의 음식 맛이었다.

몇십 년만의 먹어본 어머니의 밥상.

그의 눈가가 어느새 촉촉이 젖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머, 운아 너 우는 거니?”

이에 살짝 당황한 예령이 그의 눈을 보며 물었다.

그 말에 온 가족의 시선이 송운에게 몰렸다.

“아, 아닙니다. 어머니. 그냥…… 그냥 밥이 너무 맛있어서…….”

“사내의 눈물은 그리 헤퍼선 아니 된다. 어서 눈물을 거두어라. 어린 동생들도 보고 있지 않느냐?”

“하하…… 예, 예 아버지.”

그러는 와중에도 그의 눈에선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송운도 멈추려 했으나 한번 터진 눈물은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눈물과 함께 웃음도 나왔다.

이제는 슬픔이 아닌 기쁨의 감정이었다.

“오빠, 내가 깨워서 그런 거야? 울지마. 으응?”

송운을 쳐다보며 송하의 사슴같이 동그란 두 눈에 눈물이 고이며 말했다.

“아니다. 아니야. 오히려 송하가 깨워줘서 기분이 좋아.”

그가 그런 송하를 달랬다.

“그런 거야? 헤헤, 다행이다. 그럼 울지 말고 어서 밥 먹어 오빠!”

해맑게 웃는 송하를 보며 송운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옆에 조심스레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송후의 모습까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제 너희 둘의 그 맑은 모습, 내가 꼭 지켜주마.’

하늘이 다시 준 엄청난 기회였다.

두 번 다신 집을 뛰쳐나가 가족을 잃어버리는 그런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의 손으로 가족을 꼭 지켜 낼 것이라고 그는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송운이 가족들을 쭈욱 둘러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을 열었다.

“아버지.”

“……?”

묵묵히 밥을 먹고 있던 송악이 그의 부름에 고개를 틀었다.

“아버지. 앞으론 글공부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순간, 숟가락을 들고 있던 그의 손이 멈추었다.

생각 외의 말이 들려온 것이다.

늘 자신은 글공부가 싫다며 빼기 일 수였던 송운이었다. 한데 그런 녀석이 자기 입으로 스스로 글공부를 열심히 하겠다니? 송악은 겉으론 무덤덤한 척 했지만 속으로는 내심 기뻤다.

‘드디어 학문에 흥미를 붙인 모양이구나.’

대대로 내려오던 학사 가문이 아니던가?

지금은 가세가 조금 기울었으나, 언제고 다시 재건할 수 있는 여력이 남아 있었다. 그런 집안에 장남이 공부에 뜻을 두겠다는 것은 쌍수(雙手)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그래, 안 그래도 네가 요즘 학문에 거리를 두는 듯하여 걱정했는데, 그리 말해 주니 참으로 좋구나. 앞으로 더 열심히 할 거라 믿는다.”

그는 최대한 기품을 유지하며 말하려 하였으나 자꾸만 그의 입가가 씰룩이며 올라가는 것이, 영락없이 자식의 모습에 흐뭇해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 미소를 알아차린 송운은 덩달아 웃음이 났다.

‘진작 이리 했었다면 좋았을 것을……. 저리도 좋아하시질 않는가? 내가 참 못났었구나. 어릴 적 아버지의 모습을 너무 엄하게만 기억하고 있었어.’

그는 스스로를 질타했다.

너무 어릴 적 기억인지라 유독 자신에게는 엄하게만 대했다 생각했고, 그런 아버지를 원망만 했었다.

평생을 그리 살아왔었다.

한데 자신의 아버지도 웃을 줄 아는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아니다. 이미 끝난 일을 말하여 무엇 하며 이미 지나간 일을 비난하여 무엇 하랴. 못다 한 효도 앞으로 잘하면 되는 것이다.’

더 이상 속을 썩이는 불효는 저지르지 않으리라.

그리 맘먹은 송운은 울어서 시뻘게진 눈으로 송악을 자꾸 쳐다보자 이내 민망했는지, 그가 결국 한 소리 하고 말았다.

“큼. 무얼 뭘 그리 보느냐? 어서 밥 마저 먹도록 해라. 네 어머니가 이른 아침부터 준비한 음식이 다 식겠구나.”

그리고 그런 송악을 웃으며 예령이 또 한마디 던졌다.

“이렇게 절 위해 주시는 분도 어서 식사를 하셔야지요.”

그 말에 다소 겸연쩍게 웃은 송악이 말했다.

“커흠. 밥 먹자.”

“꺄르륵.”

그 모습에 송하의 웃음보가 터졌다.

이내 그 행복한 웃음은 가족 전체에게 번져나갔다.

‘행복하다.’

송운의 입가에도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이 얼마 만이던가?

이렇게 가족들과 둘러앉아 오손도손 얘기하며 식사하는 이 자리가.

자그마치 오십삼 년 만에 느껴보는 가족의 따스함이었다. 서로의 온기가 방안 가득 감싸고 있는 듯했다. 예전엔 몰랐던 이 모습이 지금은 너무나도 소중하고 감사했다.

‘만약 이것이 꿈이라면 차라리 평생 깨고 싶지 않구나. 이대로 꿈에서 깬다면…….’

그런 상황은 정말 상상조차 하기 싫어졌다.

지옥보다 더한 고통이 기다릴 것이다.

하여 지금의 상황에 송운은 거듭 감사했다. 못난 자신에게 새 인생을 부여해준 하늘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그리고 이제 앞으로 어찌 해나가야 할지, 자신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렵게 되찾은 가족인 만큼 더더욱 잘해주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해줄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바치리라.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