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전생-1화 (1/275)

제1화

하남성(河南省).

평여현(平輿縣) 내에 자리 잡은 송주촌(松稠村).

소나무가 많은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곳. 아름드리 곧게 뻗은 소나무들이 마을의 운치를 더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마을의 입구에서 한 백발의 노인이 우수(憂愁)에 젖은 듯 마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나이와 맞지 않게 온몸엔 근육이 붙어 한층 젊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마을을 한번 스윽 둘러본 그가 이내 숨을 한번 들이쉬며 내뱉었다.

질풍철각(疾風鐵脚) 송운(松雲).

광서성(廣西省)에서 이름 꽤나 날리던 절정고수인 그가 이 머나먼 하남성까지 와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곳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구나.”

그의 나이 어언 종심(從心).

집을 떠난 지 약 오십여 년 만에 고향의 땅을 밟은 것이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신의 일생을 떠올렸다.

본디 그의 집안은 한때 황사(皇師)까지 지냈던 관료 집안이었으나, 시대가 흐르며 가세가 살짝 기운 차였다. 예전만은 못해도 여전히 길은 열린 집안이었거늘 송운은 고리타분한 학사의 길보다, 강호를 호령하며 평생을 사는 무인들의 삶을 동경(憧憬)했다.

매일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 그를 무료하게 만들어서였을까? 아니면 단순히 어린 나이의 치기(稚氣)였을까?

그는 자신의 두 동생과 부모님을 뒤로한 채, 흑운(黑雲)이 밝은 달을 가린 그 어두컴컴하던 밤 가출을 시도했다. 가출에 성공한 그는 무작정 훔쳐 나온 패물을 팔아가며 멀리, 더 멀리 도망갔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걷고 또 걷던 그는 마침내 광서성에 도착했다. 하나 어린 혈혈단신(孑孑單身)의 소년에게 강호는 너무도 가혹했다.

매일이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정처 없이 거리를 떠돌던 그는 산길을 타다가 발을 헛디디면서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졌다.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던 그가 눈을 뜨니 앞에는 웬 동굴이 하나 놓여있었다. 당장 어디로 나갈 길도 없어 보였던 그는 그 동굴 속으로 들어갔고 그 안에는 우연히 누군가 남긴 낡은 무공서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는 그것을 홀로 읽고 또 읽으며 수련해 나가기 시작했고, 결국 끈질기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송운을 있게 한 질풍각(疾風脚)과 질풍보(疾風步), 질풍심공(疾風心功)이었다.

비록 신공절학(神功絶學)이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의 것은 아니었으나, 어린 송운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기연이었다. 그걸 기반 삼아 살다 보니 어느덧 광서성에서 제법 인정받는 무인이 되어있었다. 그는 그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마치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살아왔다.

하나 세월이 흐르고 보니 이제 와선 다 부질없는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그의 마음속 한구석엔 늘 무언가 텅 빈 것처럼 공허(空虛)했다.

그것이 결국 자신이 동경했던 무림의 전부였다.

그에 인생의 덧없음을 느낀 그는 지나던 길에 눈에 띈 서점을 보자 옛 생각이나 책을 둘러보러 잠시 들어갔다. 한데 그런 그의 눈에 너덜너덜한 겉표지에 뭔가 기이한 분위기를 가진 천의경(天意經)이라는 제목을 지닌 책이 들어왔다.

그 기이함에 마치 귀신에게 홀린 듯 책을 사서 나온 그는, 책을 펼쳐 읽는 순간 두 개의 문구가 그의 가슴에 쿵 하며 비수를 내리꽂았다.

父母在 不遠遊 遊必有方(부모재 불원유 유필유방)

부모가 생존해 계시면 먼 길을 떠나지 않아야 하며 부득이 가는 경우는 반드시 행방을 알려야 한다.

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수욕정이풍부지 자욕양이친부대)

나무는 고요하려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봉양하려 해도 어버이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본디 공자께서 했던 말씀이었으나, 천의경을 통해 들으니 무언가 더 크게 와 닿았다. 그 글자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며 자신을 질타하는 것 같았다.

그제야 송운의 눈에서 굵디굵은 눈물이 투둑 하고 떨어졌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동생들의 얼굴이 생각난 것이다. 그 부모의 정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오랫동안 사무쳤던 그 그리움은 한 번에 터져 나와 그의 눈가를 가득 적셨다.

실상 오래전부터 그의 마음은 이미 고향에 가 있었으나, 차마 돌아갈 수가 없었다. 철없던 자신의 어린 시절이 생각나며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또한 현실을 마주하기 무서웠었다.

하나 그 문구를 보니 겨우 그러한 두려움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자신의 모습이 마냥 못나 보였다. 천의경에는 그 외에도 군자적 도리와 학문에 관한 이야기 등, 배울 것이 무궁무진했다.

모조리 외울 정도로 미친 듯이 정독하던 그는 결심을 굳혔다. 더 늦기 전에 누군가라도 살아있기를 간절히 빌며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렇게 돌아온 고향은 여전했다.

추억에 젖어있던 그는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살았던 그 집으로.

한데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자신의 기억이 잘못되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 그는 두 눈을 벅벅 비볐으나, 똑같았다.

그 큰집이 마치 땅으로 꺼진 것처럼 사라진 것이다.

‘도대체 그 큰 집이 어디로 간 것이란 말이냐. 설마……!’

혹여 이사를 했을까 싶어서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묻기 시작했고, 이내 촌장을 통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아, 송 대인 집이라면…… 이미 예전에 화재에 휩싸여 집 전체가 날아갔소. 지금은 새로운 터로 쓰이고 있지. 허어……. 그때 생각하면 정말 마음이 아프다오.”

쿵.

송운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화재라니? 전부 불에 탔단 말인가! 그럼 가족들은?’

“그 불길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가 지금 산 중턱에서 살고 있다고…….”

그는 말을 채 끝낼 수 없었다.

살아남은 이가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송운이 뛰어갔기 때문이었다.

산 중턱까지 빠르게 뛰어간 그는 자신의 눈앞에 놓인 반쯤 쓰러져 가는 집 한 채 앞에 멈추었다.

아니, 사실 집이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만큼의 초라한 행색이었다. 그리고 그가 그 집을 들어가려는 순간, 그의 눈앞에 얼굴이 반쯤 화상으로 뒤덮인 여인이 보였다. 비록 얼굴 반쪽이 화상을 입고 나일 먹은 모습이었으나 그는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세월이 흘렀다곤 하나 설마 자신의 가족을 못 알아볼까.

털썩.

송운은 온몸에 힘이 풀리며 그 자리에 주저 앉아버리고 말았다.

“하(夏)야…….”

그제야 그 소리를 들었는지 그 여인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여인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오, 오라버니?”

* * *

말도 없이 사라졌다 수십 년이 흐르고 나서야 나타난 자신이었다. 화라도 낼 줄 알았건만 송하는 그저 따뜻하게 그를 받아주었다. 그러곤 이내 담담히 그 긴 세월 있었던 이야기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화재가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꽤나 잘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아무리 가세가 조금 기울었다곤 하나, 수 대 동안 쌓아온 명성은 쉽게 떨쳐지는 것이 아니었으니. 한데 어느 날 갑자기 거대한 화마가 집안을 통째로 집어삼켰고, 간신히 홀로 살아남은 그녀의 얼굴마저 큰 화상을 남긴 것이다.

‘많이 힘들었겠구나…….’

송운은 송하에게 보이지 않게 조용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여인에게 있어, 얼굴의 흉이란 것이 얼마나 큰 상처던가? 단순한 외적 고통을 제외하더라도, 얼마나 많은 시선과 질타가 그녀의 내면을 할퀴어댔을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터였다.

세상 모두가 그녀에게는 적이었을 터다.

‘애초에 결혼은 생각도 못 했겠지.’

모두 자신이 남긴 흉이다.

여자 혼자 홀몸으로 이런 외진 곳에서 살아간다는 게 어찌 쉬웠을까?

모든 것이, 뒤늦게 돌아온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다.

가슴이 너무나도 저려왔다.

‘내가, 내가 집만 나가지 않았더라면…….’

하나 후회하기엔 이미 너무도 먼 길을 걸어왔다. 이미 자신만 해도 백발의 노인이 되질 않았던가?

“오라버니, 식사하세요. 마침 식사하려던 참인데 잘되었습니다.”

그리 말하며 방긋 웃는 송하의 얼굴을 보았다. 비록 얼굴을 다쳤으나 자신의 눈엔 세상 그 어떠한 여인보다 어여뻤다.

“그래……. 어서 먹자꾸나.”

차려온 밥상을 보니 밥에 나물 몇 가지뿐이었다. 아마 그녀는 평생을 이리 살아왔으리라.

“지금 형편이 이런지라……. 차린 건 별로 없지만 맛있게 드세요. 저는 작금이라도 오라버니가 돌아와서 좋아요.”

송하가 정말 기쁘다는 듯이 환하게 웃는다.

그 긴 세월을 홀로 이리 살았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절로 아파왔다.

송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밥 한 숟갈 가득 입에 넣었다. 그 순간 마음속 깊이 무언가 울컥하고 올라왔다. 오래전 어머니가 해주었던 그 맛과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너무도 오래되어 기억이 안 날 법하건만 그의 혀는 그 맛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맛있다. 어머니…… 솜씨를 빼다 박았구나.”

“그럼요. 어머니에게 배운 것인걸요.”

송하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순간 송운의 눈에 송하의 어릴 때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는 그 모습에 목까지 차오는 눈물을 밥알과 함께 삼켜보려 했으나, 끝내 눈물이 흘러내렸다.

“크흑……. 미안하다 하야. 이 못난 오라비 때문에…….”

“아니에요…… 아닙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탓이 아니에요. 흐흑…….”

결국 송운의 모습에 송하도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남매간의 약 오십 년 만의 재회였다.

늦은 밤.

눈물겨운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좁은 단칸방에 들어와 자신의 옆에 잠든 여동생을 바라보았다. 그 긴 세월을 대변(代辯)이라도 해주려는 듯 송하의 얼굴엔 주름이 제법 져 있었다.

‘그 모진 세월의 풍파가 곱디곱던 네 얼굴마저 이리 바꾸어 놓았구나…….’

송운은 세상모르고 잠든 여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어릴 적에도 자주 자신의 옆에 잠든 송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와 달라진 것은 세월이 바꿔놓은 둘의 외관뿐이었다.

‘내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생일지언정, 너는 꼭 지키리라 약조하마.’

그리 다짐을 한 송운은 이내 품에 넣어두었던 천의경을 꺼내어 펼쳤다. 초를 밝힐 기름은커녕 초마저도 구하기 힘든 형편이었다. 하여 희미한 달빛에 의지한 채였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그리도 공부가 싫어 집까지 뛰쳐나갔건만…… 이제는 이 글이 나를 달래주는구나.’

한참 동안 글을 읽다 보니 또다시 후회가 물밀듯 들어왔다.

자신이 만약 집을 뛰쳐나가지 않았더라면, 어떻게든 화재만이라도 피할 수 있었더라면…….

송운의 두 눈에 고이기 시작한 눈물은 이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그는 억지로 눈물을 참아보며 글을 읽어나갔으나 이내 그렁그렁 맺혀 펼쳐있던 천의경에 뚝뚝 떨어져 번졌다. 한데 이상하게도 눈앞이 흐려져 잘 보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 더 쏙쏙 잘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송운은 그렇게 울면서 천의경을 보다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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