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
화산천검 7권(20화)
8장 마진천, 우승빈, 사부, 그리고 이사도와 사사도(3)
“역시 맞구나. 령아, 령아.”
말속에 담긴 애틋함.
깊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한 감정에 조금씩 정신이 되돌아왔다.
“……무슨 말씀이세요, 사부? 아버지라니요?”
“살아 있었구나.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사부는 내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이제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셨다.
“…….”
초령은 아무 말이 없었다.
다만 눈이 촉촉해져 오는 것이, 사부와 같이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그동안 잘 지냈느냐? 아니, 괜찮다. 어서 이리로 오거라.”
눈을 쓱 비비더니 팔을 쫙 벌리시는 사부.
안기라는 말이었다.
“아니요.”
초령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뒤로 일보 몸을 뺐다.
“왜……?”
사부의 말에 초령이 결국 눈물을 살짝 흘리며 슬프게 웃었다.
“예전에는 아버지의 딸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당신의 딸이 아니에요. 저는 혈천회의 칠사도 중 사사도, 요희 초령이에요.”
촤라락!
초령이 접었던 섭선을 펴 얼굴을 가렸다.
“그게 무슨 소리더냐?”
“사부, 잘은 모르겠지만 한 가지 알려 드릴 것이 있어요. 저자는 혈천회의 사사도, 초령이에요.”
내 말에 멍한 표정을 하는 사부.
하지만 이내 사부가 노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대체 누가 널 혈천회에 들도록 만들었느냐!”
건물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커다란 목소리.
초령이 조용히 답했다.
“저는 제 의지로 들어간 것이니, 있지도 않은 사람에게 화를 낼 필요 없어요.”
“대체 무슨…….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네가 그럴 아이가 아닌데, 네가 그런 아이가 아닌데! 그자를 감싸려고 하는 것이라면 그만두거라. 내 절대 그자를 가만두지 않을 테니.”
“제 말을 믿지 못하시는군요. 하긴, 그때도 그랬기에 헤어진 것이지요.”
초령의 말에 사부가 얼굴을 굳혔다.
“령아, 그때의 그 일은…….”
“그래요, 그건 서로에게 상처일 뿐이니 덮어 두도록 하죠. 하지만 또다시 제 말을 믿지 않는 것은 정말 상처네요.”
“하지만 네가 어찌 네 의지로 혈천회에 들어갔다 하느냐? 사사도라 함은 네가 흑풍의 주(主), 혈천회의 정보를 관리한단 소리가 아니더냐? 그렇다면 내가 다쳤다는 소식도 들었을 터인데…….”
“그렇기에 혈천회에서 뼈를 묻기로, 더 있기로 마음을 굳혔죠.”
“뭐라고……?”
“저는 당신을 용서한 것이 아니에요. 시간이 갈수록 원한은 더 깊고 깊어져서 당신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기뻐서 춤을 추고 싶었을 정도니까.”
“……허허! 허허허허!”
초령의 말에 사부의 표정이 변했다.
유리가 깨지듯 천천히 사부의 표정이 변하더니 결국은 웃는 표정으로 변했다.
하지만 절대로 기뻐서 웃는 것이 아니었다.
그 웃음에는 허탈함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렇게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다면 평생 그렇게 웃으며 사세요. 저는 언제나 그 웃음을 날려 버리려 노력할 테니까.”
“조용히 해!”
끓어오르는 감정에 나서지 않으려 했지만 몸이 저절로 움직여 사부의 앞을 막아서며 크게 일갈했다.
내 외침에 초령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는 빠져.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야.”
“……대체 사부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고,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를 않지만 말이야.”
척!
검첨을 초령에게 향하고 싸늘하게 말했다.
“네가 지금 잘못을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사람들이 떠받들어 줬더니 네가 무슨 정의의 사도라도 된 듯 말하는데,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야!”
후웅∼!
초령이 섭선을 휘두르자 잘 벼려진 칼과 같은 예기를 뿜어내는 바람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쿠웅! 퍼서서석!
크게 진각을 밟자 나무판자가 솟아올라 바람을 막아서고 이내 진의 영향으로 다시 원래대로 복구되었다.
“그래, 내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라곤 하지만 이 상태로 가다간 사부만 다칠 것 같으니 둘이서 오붓하게 대화할 시간을 만들어 주마.”
“네가 어떻게?”
초령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대화하는 데 꼭 쌩쌩할 필요는 없지. 제압해서 사부 앞에 무릎을 꿇려 주마.”
“훗! 좋아, 검룡. 네 사부는 몰라도 나는 너와 적이지. 혈천회 사사도의 명예를 걸고 너를 쓰러뜨려 주마.”
폭사되는 살기.
바늘로 온몸을 쿡쿡 찌르는 듯한 강렬한 살기였다.
“네가 이길지 내가 이길지 한번 해보자고.”
팟!
“잠깐! 멈춰라!”
사부가 어느샌가 허탈한 웃음을 멈추고 다급히 소리쳤다.
하지만 들을 내가 아니다.
다른 말은 따라 주어도 이번 말은 따를 수 없었다.
사부와 초령이 정말로 아버지와 딸의 관계라면, 그리고 예전에 어떤 일이 있었다면 서로 마음 놓고 생각을 털어놓을 시간이 필요하다.
사실 초령의 말대로 내가 끼어들 만한 일이 아니다.
당사자끼리 해결해야 될 일이다.
하지만 내가 나서지 않는다면 사부만 상처를 입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바라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나중에 사부에게 욕을 먹더라도 싸워서 이겨, 제압하여 사부에게 데려갈 것이다.
후웅∼ 챙!
섭선과 청운검이 부딪치며 울음을 터뜨렸다.
9장 황신과의 결전(1)
휘리릭∼! 콰콰콰콰!
‘제대로 된 공격이 없어. 얼핏 보면 전력을 다해 공격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제대로 내공을 운용하지 못해서 화려하게 보일 뿐이야.’
지금만 해도 그렇다.
초령이 섭선을 날리자 섭선의 궤적을 따라 바닥이 갈라지고 강풍이 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무기를 날려 공격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역시 흔들려서 그런 건가?’
사부와의 관계.
그것이 마음속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서 자신이 어떻게 공격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에겐 좋은 일이지.’
내가 할 일은 초령의 제압이다.
제압은 죽이는 것보다 힘들다.
죽이는 것은, 상대와 비슷한 실력이거나 조금 약한 수준이더라도 운이 좋다면 할 수 있다.
하지만 제압은 상대보다 실력이 더 뛰어나야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게다가 한 수 정도 뛰어난 것으로는 안 된다.
절망을 느낄 정도로 압도적인 실력의 차이가 있어야지만이 제압이 가능한 것이다.
‘지금 파고들자.’
섭선이 초령의 손에서 떨어진 지금이 밀어붙여서 무릎 꿇릴 때였다.
팡!
재빨리 달리자 공기가 터져 나가며 비명을 터뜨렸다.
순식간에 초령의 앞에 다다르고 검을 내치며 말했다.
“끝이다.”
사사도라는 명성에 비해서 너무나 쉽게 끝난 듯했다.
“어딜!”
역시 너무 쉽게 끝난다 했다.
초령의 눈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눈을 마주치자 순간 머릿속에 오만 가지 상상이 떠올랐다.
쩌엉!
‘큭!’
위험하다는 생각에 엄청난 집중력으로 순식간에 파훼하긴 했지만, 초령의 실력이라면 피하고 공격을 할 수도 있는 시간이다.
초령의 손이 내 심장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도리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뒤로 몸을 빼지 않았다.
그대로 계속 검을 내칠 뿐이었다.
동귀어진으로 보일 만큼 위험한 순간이었다.
“멈추라고 하였다!”
바로 옆에서 사부의 노한 음성이 들렸다.
‘안 돼!’
이것은 노림수다.
초령의 사술은 깨졌다.
하지만 나에겐 상단전의 염력이 있다.
염력으로 초령의 손을 막아 내고 검첨으로 혈을 찔러 제압만 하면 되는데 사부가 지금 끼어들면 상황이 곤란하게 되어 버린다.
사부가 나에게 염력이 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으니, 아무래도 혼란스런 머리가 판단을 흐리게 한 것 같았다.
‘할 수 없군.’
사부를 다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사부도 우리에게 위협을 하려고 자하의 기운을 두른 권을 내찌르고 있었다.
팟! 푸욱!
“……!”
“무슨……!”
사부의 손이 초령의 배를 관통해 반대쪽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
튀어나온 손에서 뚝뚝 떨어지는 핏물.
초령은 나와 같이 피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 자리에서 멈추곤 사부의 권을 받아들였다.
“무슨 짓을…… 대체 어째서 피하지 않은 것이냐!”
사부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몸을 덜덜 떨며 말했다.
하지만 초령은 흐릿한 미소만을 지을 뿐이었다.
“애초부터 이럴 작정이었더냐! 어찌! 너를 어떻게 만났는데, 네가 어찌 그럴 수가 있는 것이냐!”
“……아무리 용서를 빌어도 지은 죄는 사라지지 않아요.”
붉은 입술 사이로 더욱 진한 피가 주르륵 배어 나왔다.
“죄를 지었다면 선으로써 갚으면 된다. 살아 있을 사람은 살아 있어야지! 어찌 죽을 생각을 하느냐!”
“이기적이시네요. 제가 만일 당신의 딸이 아니라면 그런 말을 했을 것 같아요?”
“크윽…….”
결국 울음을 터뜨리시는 사부.
초령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복부를 관통한 사부의 손을 빼냈다.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어 기뻤어요.”
털썩!
말이 끝남과 동시에 초령이 흐릿한 미소와 함께 눈을 감고 땅에 쓰러졌다.
“으흐흑! 어찌…… 어찌 네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이 상황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사부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있었다.
“그렇게 울고만 있는다고 저자가 다시 살아날 것 같아요? 아직 숨이 끊어진 것이 아니니 사천에서처럼 치료하세요.”
“그것은 응급처치일 뿐이다! 아무리 경황이 없다지만 내가 생각도 못 했을 것 같으냐!”
실핏줄이 선 눈으로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고함치시는 사부.
조금만 더하면 피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보낼 작정인가요? 시도라도 해 봐야 될 것 아닙니까. 아니면 사부에게 저자는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사람인 겁니까!”
나의 말에 사부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이내 무언가 결심을 굳혔는지 굳은 얼굴로 초령의 상처에 손을 댔다.
우우웅∼
손에서 뿜어지는 하얀색 서기.
‘지금부터는 운에 달려 있다.’
만일 하늘이 초령을 데려가고 싶어 한다면 사부의 치료는 실패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사부의 옆을 지나쳐 걸어가 마진천과 북초이를 묶고 있는 쇠사슬을 풀어냈다.
치르릉! 털썩! 털썩!
‘다행히 숨은 쉬고 있어. 그리고 그저 내공을 금제했을 뿐인가?’
내공은 힘의 원천.
그것을 금제해 놓았기에 심한 상처를 입은 뒤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건 그렇고 죄는 지워지지 않는다라…….’
내가 하늘의 검이 된다 하였을 때 했던 말이다.
저런 모습을 보니 과연 내가 그렇게 단호히 그들의 목숨을 취할 수 있을까 고민되었다.
‘아니, 할 수 있을 거다.’
사부는 그들을 갱생시킬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그들의 죄를 없애는 방법은, 나에겐 그저 그들의 목숨을 취하는 것뿐이다.
머리를 차갑게, 가슴을 금강석과 같이 단단하게.
내가 걸어갈 길은 그런 비인외도(非人外道)의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