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
화산천검 7권(17화)
7장 진격! 진격!(3)
와아아아∼!
혈천회 진영을 천천히 살펴보곤 뒤돌아 무림맹 진영으로 돌아왔다.
“잘했다.”
사부의 칭찬에 긴장이 다 풀렸다.
‘그래도 조금 위험했어.’
간단하다는 듯이 얘기했지만 사실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았다.
나락쇄라는 초식.
틈이라고 해 봐야 엄청나게 작아서 조그마한 동물들이나 피할 수 있을까?
아무런 상처도 없는 것은 그 조그마한 틈을 자하십육검 오 검으로 벌렸기 때문이었다.
‘나락쇄 초식이 완벽했더라면 조금은 위험했을 테지.’
그래도 지지는 않았겠지만 이렇게 쉽게 이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무림맹 기습 사건과 사천혈사의 일 때문에 떨어졌던 사기가 일기토의 승리로 껑충 뛰어올랐다.
‘하지만…….’
혈천회 쪽을 보아하니 일기토를 이번만으로 끝낼 것이 아닌가 보다.
만일 이번에 진다면 올라간 사기가 뚝 떨어져 버릴 것이다.
‘이기면 될 일이지.’
천천히 혈천회 무리들 사이에서 걸어 나오는 한 인영.
흠칫!
‘……!’
놀라움에 몸이 순간 경직되고 나도 모르는 새에 크게 소리를 질렀다.
“고루시수 망영!”
“클클클! 화산파의 애송이, 네놈을 죽이려 지옥에서 살아 돌아왔다.”
역시 강시로 되살아난 것인가?
심검으로 끊은 목숨, 전보다 더 음산해지고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것이 추측에 확신을 더해 주었다.
“저자가 혈천회의 삼호법이냐?”
장문인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역시나 강시로 다시 되살아났습니다. 그때 시체를 회수했어야 했는데…….”
“이미 지난 일이다. 그리고 적으로 나타났다면 다시 목숨을 취하면 그만. 고민할 필요가 있더냐?”
맞는 말이긴 했지만 그래도 안심할 수가 없었다.
금환봉이 없다고는 하지만 강시가 되었으니 실력도 더 뛰어나졌을 테고, 마지막 결전이니 가지고 있는 모든 강시를 데리고 왔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일기토고 뭐고 순식간에 난전이야.’
게다가 대부분의 무인들은 흑철인도 상대해 보지 못한, 강시와의 싸움은 단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기를 강하게 불어넣지 않으면 무기가 박히지 않는 강시 때문에 이쪽이 밀릴 가능성이 컸다.
‘결국 순식간에 해치워야 된다는 소린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부르고 있는 고루시수 망영.
어쩔 수 없다.
그 목숨, 다시 한 번 취해 주마.
나가려는 순간.
“이번엔 내가 나가도록 하마.”
부드러운, 풀숲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과도 같은 목소리였다.
‘누구지?’
무림맹 수뇌부 쪽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도사.
‘화산파는 아닌데? 어디의 장로시지?’
“이 아이가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적입니다. 고귀한 검을 이런 곳에서 쓰지 마십시오.”
장문인께서 존대를 하였다.
‘장문인보다 높다? 원로이신가?’
하지만 장문인은 일파의 대표.
화산파의 원로가 아닌 자에게 장문인이 존대를 할 필요는 없었다.
“오랜만에 몸을 좀 풀려고 하니 걱정할 필요 없소이다.”
“하지만 이제 연세도 있으신데…….”
“저 소림사의 노인네도 아직 정정한데 나라고 안 그렇겠소? 이만 비키시구려.”
장문인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옆으로 물러났다.
산책이라도 나온 듯한 느긋한 발걸음.
혈천회의 호법이라는 것을 나와 장문인의 대화로 알았을 텐데도 아무런 긴장도 하지 않는 것일까?
“누구십니까?”
“저분 말이냐?”
“예, 장문인께서 예를 표하는 것도 그렇고, 지금의 저 느긋한 모습도 그렇고. 평범하신 분은 아닌 듯싶은데.”
아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너무도 평범해 보였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조금 추레한 옷을 걸치면 시골의 촌부라고 해도 믿을 것만 같은 노인.
“현 천하제일인이시다.”
“예?”
잘못 들은 건가?
되묻자 장문인이 노인의 등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못 들은 것이냐? 현 천하제일인이시라 했다.”
“현 천하제일인? 설마…… 무당파의 태극검사이신 허정 노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은거하신 뒤로는 전설이 된 분이시지.”
“그런 분께서 어째서 이곳에 계신 겁니까?”
노인의 정체가 천하제일인이라 칭해지는 허정 노사인 것에 놀라긴 했지만 다시 궁금한 것이 생겼다.
보통 원로들은 바로 아래 세대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산골이나, 아니면 인적 드문 곳에 은거를 한다.
세속에 관여를 하지 않고 수련을 하고 싶으면 수련을 하고, 조용히 살고 싶으면 조용히 홀로 사는 그런 사람들.
심지어 그것이 도를 넘어서서 문파가 멸문이 되기 직전의 상황에 처해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시지 않는 원로들도 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허정 노사도 원로인 만큼 무당산 깊은 곳에 은거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무당파가 위험에 처한 것도 아닌 이런 상황에 어째서 이곳에 계신 것일까?
“저분의 제자가 누구인지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허정 노사님의 제자?”
잠시 생각해 보자 장문인의 말대로 답이 나왔다.
무당파 신룡, 유룡 명도.
분명 명도는 처음 만남에서 비무를 할 때 기묘한 보법을 선보이며 허정 노사의 제자라고 말을 한 적이 있다.
현재 명도는 사천당가에서 아직까지 치료를 받는 중이다.
그리고 다친 원인은 혈천회와의 싸움!
허정 노사는 은거를 했다고는 하지만 제자를 다치게 한 장본인들을 살려 둘 만큼 무심한 사람은 아니었다.
‘과연 얼마나 강할까?’
북숭 소림 남존 무당이라고 불릴 만큼 구파에서도 독보적인 두 문파.
그 남존 무당에서 가장 강한 이이자, 천하에서 가장 강한 이로 암암리에 칭해지는 분의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궁금해졌다.
‘하지만 아까는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는데. 그저 평범한…… 잠깐, 설마 반박귀진?’
전설의 경지라는 반박귀진.
너무도 뛰어나 도리어 평범해 보인다는 그 경지.
설마 그 경지에 이르렀단 말인가?
“잘 보아라. 저것이 바로 네가 이 정도 빠르기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성장한다면 언젠가 발을 디딜 경지다.”
장문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서로 말을 끝냈는지 고루시수 망영이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스스슥! 쿠웅! 쿵! 쿠쿠쿵!
혈천회 무리가 있는 쪽에서 뛰어오고, 숨어 있었던 것인지 땅속에서 빠져나와 모습을 드러내는 수많은 강시들.
‘정말 작정하고 왔군.’
기가 질릴 정도로 많은 강시들이다.
흑철인은 기본이고 독강시, 혈강시, 그리고 내가 모르는 종류의 강시들과 고루시수 망영 바로 옆에 서 있는 혈마강시.
그 수만 무려 이백이나 되었다.
강시 이백이면, 무리한다면 대문파까지도 멸문시킬 수 있는 전력이다.
만일 저것이 우리에게 달려든다면, 도문과 불문의 사람들이 막지 못한다면 아마 많은 수가 죽었을 것이다.
‘저것들 모두를 쓰러뜨리려면 엄청 힘이 들 텐데.’
혈마강시만도 다섯 기.
나로서는 절대 저것들을 이길 수 없었다.
저것이 바로 강시술만으로 호법이 되었다고 하는 고루시수 망영의 진면목이었다.
‘어떻게 승리하실까?’
천하제일인이라 칭해지는 분이니 승리를 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결과보다도 과정이 궁금했다.
“움직이셨다. 눈을 감을 시간도 없다. 상승의 영역에 진입할 때처럼 집중하고 집중해서 움직임 하나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는 장문인.
장문인의 말대로 눈도 감지 않고 집중해서 허정 노사의 움직임을 보았다.
스윽! 쿠우웅!
천천히 발을 들었다가 내려놓았을 뿐인데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귀를 멍멍하게 만들 정도로 커다란 소리.
혈천회 쪽에선 이미 수준 낮은 무인들이 귀에서 피를 쏟으며 무릎을 꿇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 반면 무림맹 쪽 사람들은 고통스러워할망정 귀에서 피가 쏟아지진 않았다.
‘항마가 담겨 있는 소리인 건가?’
하지만 그것보다도 대단한 것이 있었다.
단 일 보 움직인 것일 뿐인데 고루시수 망영은 물론이고 모든 강시들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 것이다.
‘허보!’
장문인들에 비해서 많이 뒤떨어지는 실력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천수신검만큼의 압박을 주었던 명도.
그때 보여 주었던 보법이었다.
‘수준이 다르군.’
명도의 허보는 내가 집중만 한다면 파훼할 수 있었다.
하지만 허정 노사의 허보는 절대 파훼하지 못할 것 같았다.
산책이라도 하듯 느긋하게 걸어가건만 그 어떤 것도 앞을 가로막지 못했다.
강시들의 숲을 뚫고 허정 노사가 다섯 혈마강시에게로 다가갔다.
“어째서 혈마강시에게 다가가는 거지요?”
“쯧, 생각이 짧구나. 잘 생각해 보거라. 혈천회의 삼호법을 쓰러뜨리면 이 승부는 어떻게 되느냐?”
“끝나겠지요.”
“그렇게 되면 바로 전면전이다. 아무리 허정 노사라고 해도 저 모든 인원을 붙잡아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계가 있는 법이지. 그리고 전면전이 시작되면 붙잡아 놓았던 강시들이 날뛸 것이 아니냐?”
“아!”
강시를 조종하고 있던 자가 죽었다고 강시가 쓰러지는 것은 아니다.
심령이 연결되어 있어 크게 타격을 입긴 하겠지만 그것뿐이다.
결국 지금 바로 고루시수 망영을 쓰러뜨린다면 우리 쪽에 불리할 뿐인 것이다.
‘저렇게 보니 혈마강시도 약해 보이는군.’
물론 절대 약하진 않지만, 천천히 하나하나 목이 잘리는 것을 보니 엄청 약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다섯 혈마강시 중 두 마리만 남은 순간, 마지막 순서의 혈마강시가 더욱 짙은 핏빛 안광을 흘리며 허공 노사의 수도를 막았다.
‘역시 너무 쉽다 했어.’
혈마강시는 고수로 만드는 강시다.
생전의 실력을 모두 발휘할 수 있는 강시.
하나같이 한 성의 패자를 자처할 만한 실력자로 만든 강시이니만큼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허정 노사의 허보를 파훼한 것이다.
“이제 본격적인 싸움이겠군.”
장문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고루시수 망영과 두 혈마강시가 허정 노사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천하제일인이란 명성은 도박으로 따먹은 것이 아니다.
세 고수가 삼방에서 짜기라도 한 듯 연수합격을 하고 있는데도 허정 노사의 옷깃조차 스치지 못하고 있었다.
‘저것이 천하제일인.’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다는, 현 시대의 일인자였다.
‘뭐하는 거지?’
고루시수 망영이 두 혈마강시만을 놔두고 뒤로 풀쩍 물러났다.
그러곤 품속에서 피리 하나를 꺼내 들고 불기 시작했다.
삐리리∼!
머리를 아프게 하는 불길한 소리.
뒤쪽에 있는 몇몇 무인들이 비명을 토해 내며 졸도했다.
“갈!”
우르릉!
천둥이 치는 듯한 울림.
불타승의 사자후(獅子吼)가 울려 퍼지자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편안한 안색을 보였다.
‘우리를 공격하려던 것은 아닐 텐데, 대체 저 피리의 공능이 뭐지?’
불리하니 일기토를 그만두고 전면전을 펼치겠다는 목적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사도의 인물이라지만 고수로서 그 정도 자존심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 피리는 대체 어떤 용도로 분 것일까?
‘강시가……!’
혈마강시의 움직임이 갑작스레 빨라졌다.
그리고 혈마강시를 제외한 나머지 강시들의 몸이 움찔움찔거렸다.
‘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