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천검-166화 (166/175)

# 166

화산천검 7권(16화)

7장 진격! 진격!(2)

“네 길이 악에 물들기 쉽다는 것을 아느냐?”

하늘을 따르려[順天] 하는 자들이 있다면, 하늘을 거역하는[逆天] 자들도 있기 마련이다.

하늘은 어떠한 의지가 없다.

그저 공평하게 벌하고 공평하게 복을 내릴 뿐이다.

그렇기에 순백의 도화지와 마찬가지로 무언가에 물들기가 매우 쉽다.

사부는 이 점을 경고한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많이 주의를 해야지요.”

“세상에 완벽이란 없다. 특히나 너의 꿈같은 경우에는 무척이나 주관적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정도에서 벗어나면 그것 자체가 죄가 된다. 그걸 모두 감내할 수 있겠느냐?”

잠시 생각해 보았다.

‘과연 내가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사부 말대로 완벽이란 존재치 않는다.

나도 사람이니 죄를 범할 수 있고, 정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괜히 사부가 아니잖아요? 그럴 때면 사부가 저를 도와주셔야지요.”

멍한 표정의 사부에게 씨익 웃음을 날려 주었다.

“허허허! 그래, 맞는 말이다. 사부란 제자에게 가르침을 내리고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잘 인도해 주어야 하는 법이지.”

“제가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많이 도와주세요. 저는 여려서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으니까요.”

“네가 여리다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개미만 죽여도 심장이 멈추겠구나.”

“하하하, 그것도 그렇네요. 제가 여리다면 이런 길을 걸어왔을 리가 없으니.”

가는 길마다 피, 피, 피.

나의 행보에는 언제나 비린내 나는 피의 강이 흘렀다.

매화검로가 변한 시절부터 나의 어린 시절의 여린 마음은 사라졌다.

항상 살기만이 넘치는 세상에서 살아온 것이다.

‘이제는 평범하게 살고 싶은데…….’

예전처럼 취운암에서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사부와 수련이나 하고, 연화와 같이 놀기나 하며 지내고 싶다.

하지만 이미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멀리 왔다.

만일 그렇게 된다 해도 내일의 싸움이 끝난 후일 것이다.

‘그래, 뭔가를 한다 해도 어차피 이 싸움이 끝난 후다. 그 이후로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도 되겠지.’

“많이 생각하고 많이 고민하거라. 그만큼 네 정신은 성숙해지고 너의 마음은 단단해질 것이다.”

“이제는 그만 단단해지고 싶네요.”

진심 섞인 우스갯소리에 사부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이제는 사부의 말이 말 같지도 않은가 보구나.”

“절 혼자 두신 대가예요. 아마 몇 년간은 계속 겪어야 할 일일 걸요?”

“이놈이!”

사부가 짐짓 노한 표정을 지으며 내 머리를 쥐어박으셨다.

“저도 이제 다 컸으니까 머리는 때리지 마세요.”

살살 아려 오는 맞은 부위를 쓰다듬으며 말하자 사부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하셨다.

“네놈이 커 봤자 나한테는 꼬맹이일 뿐이다.”

“보통은 ‘그래, 너도 컸구나.’ 이러지 않아요?”

“나는 평범하지 않아서 말이다. 불만이면 네가 내 사부하지 그러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한숨을 내쉬자 사부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리를 툭툭 터셨다.

“어린이는 잘 시간이 넘었다. 감상에 젖는 것도 작작하고 내일을 위해 편히 쉬어라.”

“아까는 많이 생각하고 많이 고민하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남아일언중천금이라는 말도 모르세요?”

“나는 남아(男兒)가 아니다.”

“아(兒)는 여기선 아이라는 뜻이 아니거든요?”

예전에 한 번 했었던 듯한 말싸움.

하지만 이제는 너무도 멀게 느껴지는, 채 십 년도 되지 않았는데 먼 과거의 일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적당히 고민하다 알아서 잘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기묘한 느낌에 사부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래, 알았다.”

사부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휘적휘적 자리에서 떠나셨다.

“뭐, 정 안 되면 운기라도 하면 되겠지.”

솔직히 이미 잠은 일주일을 넘게 자지 않아도 문제가 없는 경지다.

사부도 알고는 있지만 걱정되어서 한 말일 것이다.

“내일이면 시산혈해라는 말이 왜 생겼는지 알 수 있을 텐데…….”

사부와 얘기를 했음에도 복잡한 심경.

“……하늘은 내 마음과는 달리 눈이 시리도록 맑구나.”

둥! 둥! 둥!

……하고 크게 울음을 터뜨리는 전고는 없었다.

무림인의 싸움이다.

문파에 적들이 들이닥치면 타종을 울리기는 하지만 각자의 이유가 있고 각자의 싸움 방식이 있고 각자의 이해타산이 섞여 있는 무림인의 싸움에서 그런 것은 필요가 없었다.

정말로 말 한마디면 전고와 같은 효과를 낼 때도 있다.

지금은 아니지만.

무림맹 맹주, 불타승의 말이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두근! 두근!

심장이 터질 듯이 쿵쿵 뛰었다.

‘끝을 낼 수 있다.’

황신으로부터 시작한 악연.

그 기분 나쁜 인연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 것이다.

두근! 두근!

아마도 저 멀리 안쪽에 있겠지.

부대를 이끌고 왔다가 밀려 혼자 도망친 수치스러운 기억도 있으니, 아마 수뇌부라는 직책대로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이곳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를, 이 악연을 끊을 자를.

와아아아∼!

불타승의 말이 끝난 것인지 모두가 흥분된 상태로 크게 함성을 질렀다.

그 패기에, 그 기백에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다.

“온다!”

저 멀리 피어나는 먼지구름.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한 혈천회의 무리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척! 척!

얼마 지나지 않아 기운을 집중하지 않아도 눈으로 식별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가 되었다.

순식간에 몸을 난도질당할 만큼 강한 살기.

무림맹 쪽도 지지 않고 살기를 뿜어내자 중간에서 폭풍이 일고 폭풍전야의 긴장감이 흘렀다.

터벅! 터벅!

긴장감 넘치는 대치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혈천회 무리 속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독두(禿頭)에 나의 세 배는 될 법한 덩치.

그리고 올려다봐야 할 만큼 엄청난 키.

험상궂은 인상으로 우리를 노려보며 남자가 크게 외쳤다.

“나 파정대주(破正隊主) 혈응쇄엽(血鷹鎖獵) 전봉무(典奉武)! 무림맹에게 일기토를 신청한다!”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

일기토는 원래 전쟁에서 말을 탄 장수끼리 겨루어 이긴 진영의 사기를 고취시키기 위해서 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림에서도 통용된다.

각 문파에서의 싸움은 원래 고수의 수와 질에 따라서 결정된다.

그렇기에 병력을 낭비하기 싫다고 생각하는 문파들은 싸울 때 문파의 최고 고수끼리 겨루어 승패를 결정짓기도 한다.

말은 없기에 당연히 그냥 겨루지만, 말을 탄 것보다 빠른 무림인이니 그것은 별 상관없다.

아무튼 그런 일기토를 지금 저자가 신청한 것이다.

“파정대주라고? 지금 사도의 잔당 주제에 우리한테 일기토를 신청한 거야?”

“같잖은 소리를 하는군.”

“일기토라니, 혈천회도 그래도 예의는 아는군.”

웅성웅성 소란을 떠는 군중들.

“조용!”

“조용히 하십시오!”

수뇌부라 할 수 있는 구파의 장로들이 크게 소리치며 소란을 중재했다.

“누가 나갈…….”

“청우, 나가도록.”

‘장문인?’

장문인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군중들 모두에게 들린 목소리.

내공이 깃든 목소리였다.

“제가…… 말입니까?”

깊게 침전되어 있는 심연의 눈동자.

무저갱과 같이 깊은,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불길한 눈이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화산파 장문인으로서의 명이다. 따라라.”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저벅! 저벅!

혈응쇄엽 전봉무에게로 가는 길을 터 주는 군중들.

생겨난 인(人)의 길을 따라 전봉무의 앞에 섰다.

“크크크, 네놈이 떠오르고 있는 신룡인 화산파의 검룡이로구나. 아까 들어서 알겠지만 나는 파정대의 대주인 혈응쇄엽 전봉무다.”

다가서자 말을 거는 전봉무.

아까와는 다르게 성격을 드러내는 것인지 살기 짙은 미소를 지었다.

“과분하게도 검룡이라고 불리고 있는 화산파의 선검수 청우라고 하오.”

“회 내에서 돌았던 많은 소문들이 진실인지 내 직접 확인해 보겠다.”

“실력이 된다면.”

먼저 움직인 것은 전봉무였다.

파락! 치르르릉∼!

몸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오는 쇠사슬.

끝 부분이 뾰족하게 세워져 있는, 핏빛의 독특한 병기였다.

콰아앙! 타다닥! 카카캉!

“이놈은 피같이 붉고, 매의 발톱과 같이 뾰족하다 하여 혈응쇄라고 이름 지은 병기다. 이놈으로 사냥하지 못한 자는 아주 드물지. 과연 네가 버틸 수 있을까?”

“…….”

쇠사슬의 향연은 끝이 없었다.

대체 저 많은 쇠사슬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몸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온 쇠사슬은 스무 개가 넘었다.

‘이대로라면 끝이 없어.’

실력을 보려 지금까지 피하기만 했는데 더 이상은 무리다.

멀리까지 공격할 수 있는 장병기인 만큼 피하다 보면 거리가 벌어지는데, 그 거리만큼 나의 승산은 점점 떨어져만 간다.

게다가 숫자도 숫자이고, 전봉무의 쇠사슬을 다루는 솜씨도 일품인지라 조금씩 피할 수 있는 틈이 사라져만 가고 있었다.

“쥐새끼처럼 피해 다니기만 할 참이냐? 네놈에 관한 소문은 역시나 부풀리기 좋아하는 정도 놈들의 헛소리였군. 이거 너무 손쉬워서 몸이 풀리기도 전에 끝나겠구나.”

하하하!

전봉무의 말에 맞추어서 혈천회 진영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 기를 죽이려는 수작이었다.

‘그래 봤자 헛수고다.’

이미 각오는 끝냈다.

마음은 금강석과 같이 단단해져 흔들리지 않았다.

어제 밤은 뜬눈으로 지새웠다.

복잡한 심경에 도저히 잠이 오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운기로 피로는 다 풀었다.

그리고 밤을 새운 효과가 있었는지 더 이상의 흔들림은 없었다.

이 악연의 끝이 눈앞에 있는데 흔들려서야 되겠는가?

‘일단 강도는 단단하군.’

땅을 무슨 두부 뭉개듯이 꿰뚫는 것이, 기로 보조하지 않아도 충분히 바위 정도는 깰 만한 수준의 강도였다.

‘하지만!’

자하십육검 일 검.

촤르륵! 카가강! 챙!

가슴을 노리고 날아들던 쇠사슬이 검의 잔영을 따라 말끔한 단면을 내보이며 잘려 나갔다.

“아니!”

경악한 표정의 전봉무.

그래 보았자 그 정도일 뿐이다.

특별한 초식 없이 마구잡이로 휘두른다면 하수에게는 통해도 고수에게는 절대로 통하지 않는 잡기일 뿐이다.

팟! 치지직! 챙! 쩌엉!

극성으로 펼쳐 낸 암향표 신법과 매화작보.

흘려 낼 것은 흘려 내고 피해 낼 것은 피해 내며 빠른 속도로 전봉무에게 접근했다.

“수작을 부리는구나!”

커다란 고함과 함께 순간 공격이 멎었다.

‘……?’

갑작스런 현상에 잠깐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것이 실수였다.

“죽어라! 나락쇄(奈落鎖)!”

하늘이 어두워졌다.

아니, 강렬한 태양 때문에 더욱 핏빛이 도드라져 보이는 무수히 많은 혈응쇄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칫!’

콰콰콰콰쾅!

먼지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라 시야가 가려졌다.

“하하하! 끝이다! 검룡 청우, 내가 죽였다!”

우와아아∼!

흥분에 고취된 전봉무의 목소리와 혈천회 무리의 함성 소리가 들렸다.

“착각은 자유지.”

자하십육검 십사 검.

촤촤촤촤촤악! 스걱! 스거거걱!

“무……슨…….”

피어오른 먼지구름이 십사 검의 경력에 갈라졌다.

그러자 경악에 찬 전봉무의 표정이 보였다.

이해할 수가 없다는 눈빛.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아직 수련이 덜 된 초식을 쓰다니,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닌가? 많은 수 때문에 자칫 틈이 없어 보이지만 냉정히 잘 살펴보면 피해 낼 공간은 얼마든지 있다. 그게 네 패착이다.”

“크윽…….”

전봉무가 쓰러졌다.

정적에 휩싸인 전장.

이내 무림맹 쪽에서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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